다수라는 이름은 언제나 무섭다. 개인의 주관, 즉 사실에 대한 인식이나 견해들이 모여 ‘다수’라는 하나의 공통된 주관을 가진 집단을 형성하게 되면, 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주관을 가진 개인들을 끊임없이 소외시키는 폭력의 주체가 된다. 다수의 폭력은 ‘사회적 합의’를 통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잔인하기 그지없다. 그들이 행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 것이다. 지극히 정당하고 민주적인 행위이다.
영화 <더 헌트>(2012,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에는 다수라는 괴물의 횡포가 잘 드러나 있다. 극 중 주인공인 유치원교사 루카스는 어느 날 친구의 딸 클라라의 거짓된 진술로 성추행범 이라는 누명을 쓰게 된다. 그와 가장 친한 친구들조차 그에게 등을 돌리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심각하게 소외시킨다. 결국 그의 무죄가 입증되고 어느 정도 관계가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와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여전히 불신의 벽이 남아있다.
영화에서 루카스는 실제로 아무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루카스를 제외한 모든 마을 사람들은 ‘루카스가 클라라를 성추행했다’라는 합의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그를 마을 공동체에서 소외시키는 폭력을 행사한다. 마을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들이 행한 폭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루카스는 성추행범으로서 사회에서 고립되어야 할 나쁜 존재’라는, 모두가 동의하는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했을 뿐이다. 사실과 다른 다수의 주관, 이에 따라 옳지 못한 행동을 옳다고 여기는 마을 사람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루카스라는 개인의 인생이 망가진다.
▲영화 속의 한 장면 ⓒ영화 <더 헌트> 스틸컷 |
민주주의 하에서 사회는 이미 다수의 사회적 합의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 따라서 주(主)가 되는 다수의 주관과 이와 다른 개인의 주관들의 소외는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다. 결국 개인은 폭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는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다수에 의한 폭력에 개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가? 아니다. 그 가능성은 개인의 주관이 뭉쳐 다수의 주관에 맞설 정도로 성장하고, 소수의 주관이 다수의 주관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에서 비로소 찾아 볼 수 있다.
세상에는 완벽하게 객관적인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어제 있었던 일 조차 우린 완벽하게 기억해내지 못한다. 사건이 있은 후 남는 것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일 뿐,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동의하는 진리가 아니다. 결국 진리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을 뿐,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는 사실 완전한 진리가 아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소수의 주관은 자신들의 주관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캠페인, 퍼레이드 등 여러 ‘사건’들을 만들어 자신들의 주관을 이슈화시키고 아군들을 만들어야한다. 또한 소수의 개인들은 다수의 주관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소수의 주관과 다수의 주관 간의 대화가 시작될 때 조금 더 진리에 가까운, 소수의 개인들까지도 수긍할 수 있는 새로운 주관이 만들어 질 수 있다.
극 중 루카스는 아들 마쿠스, 친구이자 마쿠스의 대부 등 자신과 같은 주관을 가진 지인들이 있었음에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국 루카스는 그의 주관을 공론화시키지 못했고,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낸 진실이 곧 진리가 되었다. 루카스는 나약한 개인이자 폭력의 피해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소수가 다수에 맞설 수 있는 길은 그들이 직접 다수가 되는 방법뿐이다.
글/ 최웅재(연세대 신학과 2학년)·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