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신 5:12-15, 히 4:1-9, 막 2:23-28)
설교문
[중요한 안식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신명기의 말씀은 1절부터 21절까지 나오는 십계명 일부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17절에도 십계명이 나옵니다. 십계명은 자유의 헌장입니다. 애굽에서의 종살이가 익숙한 이들에게 자기 자신이 되어 제 삶에 책임지는 자유인으로 살게 하기 위해 선포된 것입니다. 이 십계명을 살펴보면, 두 번째 계명과 네 번째 계명 즉 우상 숭배 금지 명령과 안식일 준수 명령에는 긴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세세한 설명을 붙여야 할 만큼 중요하고,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계명인 것이지요.
특히 오늘 우리가 살펴볼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 준수 명령은 그 옛날부터 오늘날까지도 철저하게 지켜지는 명령입니다. 민수기 15장 32-36절에 보면 출애굽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안식일에 나무를 하다 들킨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나무를 한 이 사람을 모세와 아론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이 사람을 가두어 두었는데 하나님이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온 회중이 그 사람을 진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렇게 엄격한 명령이라 오늘날도 정통파 유대인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일몰부터 모든 가게의 문이 닫히고 대중교통도 일절 끊어집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휴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메아 쉐아림'이라는 예루살렘의 한 지역에서는 안식일에 그 지역을 지나는 모든 차에 돌을 던지는데, 이것은 구약시대처럼 안식일을 위반한 사람들을 돌로써 응징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가톨릭 성경 마카베오기 상권 2장 38절에는 이런 구절도 나옵니다.
"이렇게 그들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아내와 자녀와 가축과 더불어 죽어갔다. 죽은 이는 천 명이나 되었다."
유대인들은, 공격하는 적군과 대항하여 안식일을 범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주전 63년 로마 제국의 폼페이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진격할 때 안식일을 골라서 공격하였으며 유대인은 허무하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유대인에게 있어 안식일 준수는 목숨과도 맞바꿀 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안식일 준수 계명의 본뜻을 찾아서 : 1. 노동과 쉼]
오늘 저는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여겼던 안식일 준수 명령의 본뜻이 무엇인지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왜 하나님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리스도교는 주님 예수의 부활을 기억하여 안식일 대신 "주일 성수"라는 신앙을 발전시켰는데, 안식일 성수든 주일 성수든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될까요?
출애굽기와 신명기를 비교해서 읽어보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은 같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다르게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까지 일을 마치시고 제 칠일에는 쉬신 거룩한 날이기에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하고,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너희를 이끌어 내어 자유의 몸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노동에서 벗어나 쉬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먼저 신명기의 말씀이 이해도 잘 되고 바로 와 닿으며 큰 위로도 받습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보호하시고 그들의 고통에 늘 가슴 아파하시며 그들의 부르짖음에 민감하신 분입니다. "주인인 네가 쉬어야 남종도 쉬고 여종도 쉬고 또 집안에 찾아온 손님도 쉴 수 있을 것 아니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 매일 야근을 해야 하는 회사원이나 노예처럼 일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너희 집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집주인이 쉴 새 없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으면 찾아온 손님은 머쓱하게 됩니다. 특히 거기서 밥을 얻어먹는 손님은 더하겠지요. '뭐라도 해야 하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 테니까요. 이런 것 하나하나 모두 배려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구절입니다.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하루 정도 잘 쉬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우리나라가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일의 효율성 면에서도 일과 쉼의 균형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정확한 유급휴가를 주는 것은 정당하고 바른 일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건강과 바른 삶을 위해서도 잘 쉬어야 합니다.
한 미국인 관광객이 멕시코의 작은 어촌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마을의 어부가 잡은 크고 싱싱한 물고기를 보고 감탄했지요.
"그거 잡는 데 얼마나 걸렸나요?"
멕시코 어부 왈, "별로 오래 걸리진 않았어요."
"왜 좀 더 시간을 들여 물고기를 잡지 않나요? 더 많이 잡을 수 있을 텐데..."
"이 정도의 물고기로도 저와 가족들이 살기에는 충분하니까요!"
"그럼 남은 시간에는 뭐하세요?"
"늦잠 자고, 낚시질 잠깐 하고, 애들이랑 놀고, 마누라하고 낮잠 자고... 밤에는 마을에 가서 친구들이랑 술 한잔 합니다. 기타 치고 노래하고... 아주 바쁘지요."
미국인이 그의 말을 막고 말했습니다.
"사실 제가 하버드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습니다.(MBA) 제 말 들어보세요! 당신은 매일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낚시질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거에요. 더 많은 수입이 생기고 더 큰 배도 살 수 있겠죠. 큰 배로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배를 몇 척 더 살 수 있고, 나중에는 수산회사도 세울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 조그만 마을을 떠나 멕시코시티나 LA, 아니면 뉴욕으로도 이사할 수 있다구요!"
이번엔 어부가 물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얼마나 걸리죠?"
"20년 ..., 아니 25년 정도요."
"그 다음에는요?"
"당신 사업이 진짜로 번창했을 때는 주식을 팔아서 백만장자가 되는 거죠!"
"백만장자? 그 다음에는요?"
"그 다음에는 은퇴해서, 바닷가에 있는 작은 마을에 살면서, 늦잠 자고, 아이들이랑 놀고, 낚시질로 소일하고, 부인과 함께 낮잠 자고... 그리고 남는 시간에 술 마시고 친구들이랑 노는 거죠!"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죽도록 일하고 바쁜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010년 <피로사회>라는 책으로 독일 사회에 경종을 울렸던 한병철 선생은 시대마다 고유한 질병이 있는데 21세기의 현대인이 시달리는 질병은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 증후군 등이라고 진단한 바 있습니다. 이런 질병들은 대부분 과잉 활동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긍정의 과잉 활동 때문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류는 자아실현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자기가 자신을 닦달하면서 경쟁으로 내몰며 결국은 자기를 소진합니다. 자기를 내모는 채찍을 자기가 들고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는 느낌을 주지만 결국 자기를 고갈시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자기를 내모는가를 성찰하면 거기에는 자본주의가 주입한 탐욕의 기재가 숨어 있습니다. 더 많이, 더 멋지게, 더 그럴싸하게 소유하고 가지고 즐기려는 욕망은 성취나 성공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를 다그치게 됩니다. 쉬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계속 해야지만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일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은 자본주의적 우상 숭배에 맞서 싸우라는 이야기이며, 자기 소진과 우울증을 강요하는 시스템에 저항하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잠시라도 가만히 멈추어 있는 그대로 보는 법, 넉넉한 마음으로 듣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그래서 떠다니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져 버리는 것, 긴 것, 느린 것, 눈길을 주어야만, 손길로 어루만져야만 보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보고 들을 줄 아는 사색적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다시 한번 진정한 노동은 무엇이며 참된 쉼은 어디에 있는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안식일 준수 계명의 본뜻을 찾아서 : 2. 정체성 확인]
그런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쉬면 되는 것일까요? 출애굽기에 나오는 십계명의 안식일 준수 계명은 이 물음에 답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이렛날에 쉬셨으며, 그날에 복을 주고 거룩하게 하셨기에 우리도 쉬어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쉬셨으니 너희도 쉬어야 한다."는 명령은 강요처럼 들리기에, 합리적이며 주체적으로 살기를 원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습니다. 특히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한다면 더욱 더 문제가 되는 명령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계명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우리는 이사야 58장 13-14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유다야, 네가 안식일에 발길을 삼가 여행을 하지 않으며, 나의 거룩한 날에 너의 쾌락을 일삼지 않으며, 안식일을 '즐거운 날'이라고 부르며, 주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이날을 귀하게 여겨서, 네 멋대로 하지 않으며, 너 자신의 쾌락을 찾지 않으며, 함부로 말하지 않으면, 그 때에 너는 주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 이하 생략."
이사야에 나온 이 구절을 살펴보면 주로 금지하고 있는 것이 쾌락을 일삼는 것들입니다. 안식일에 발길을 삼가 여행도 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현대인들의 바쁜 삶 속에서 주말에 주일을 끼고 여행을 가는 것이 뭐 그리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우리들의 쾌락을 즐기려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것! 하나님 없이도 참된 안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하나님이나 안식일 계명을 함부로 말하거나,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즉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의 둘째 핵심은 인간이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할 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하라는 명령입니다. "정말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곳은 과연 어디인가?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런 공동체,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안식일 준수 명령을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안식일을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께서 쉬신 날로 알고 있지만, 대다수 유대인 랍비와 신학자들은 안식일이 바로 창조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은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와 만나는 날로, 모든 피조물의 생명이 바로 창조주의 손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모든 존재가 자신의 존재 근원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창조주 하나님의 품 안에서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길 때, 창조가 완성되고 지속되는 것이라고 랍비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안식일이 없다면 창조는 미완성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다수의 사람이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쉼 없이 일합니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면 세속적 오락을 즐기는 데 힘을 쏟지요. 인간은 끝없이 평안과 행복과 즐거움을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안과 행복과 쉼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품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시간을 내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받아야만 우리는 진정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먹을 것이 들어가야 생명을 유지하고 옷을 입어서 보호해야 하고 집을 지어 잠을 자고 쉬어야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이고 영적인 존재입니다. 육체적 욕구의 충족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 높고 깊은 무엇인가를 찾고 그것을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배불러 만족한 돼지로 살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자 합니다. 지적 희열을 맛보게 하는 학문의 세계, 심미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예술의 세계가 우리의 그러한 깊은 측면을 일부분 만족시키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안식 정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안식, 정신의 고요함을 지닐 줄 알아야 합니다. 도구적 이성에서 한 걸음 나아가, 깊은 사변적 이성의 샘을 파야 하고, 이성의 충만함을 넘어서 하나님의 영적 생명에 다가설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하는 특별한 시간을 정하시고 우리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안식일 준수 계명의 본뜻을 찾아서 : 3. 사람이 주인이다]
하나님께 초청받은 우리는 고된 노동과 번쇄한 규범, 많은 일들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뿌리를 기억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며 참된 안식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일주일에 하루는 하나님과 특별한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로 오면 안식일 준수 계명이 점차 왜곡되고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안식일의 본래 정신은 사라지고, 안식일에 지켜야 할 율법 규정만 남아서 오히려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일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서기 200년경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율법들을 집대성하여 만든 미쉬나에 보면 안식일에 금지된 39가지 종류의 일이 나옵니다. 1. 씨 뿌리는 일, 2. 밭가는 일, 3. 수확하는 일, 4. 곡식단 묶는 일, 5. 타작하는 일, 6. 키질하는 일, 7. 곡식 고르는 일, 8. 맷돌질, 9. 체질하는 일, 10. 반죽하는 일, 11. 빵 만드는 일, 12. 양털 깎는 일, 13. 표백하는 일, 14. 짐승털 다듬는 일, 15. 염색하는 일, 16. 물레 돌리는 일, 17. 끈으로 고쳐 매는 일, 18. 바늘귀 꿰는 일, 19. 모직물 직조하는 일, 20. 분류하는 일, 21. 끈 매는 일, 22. 푸는 일, 23. 바느질 하는 일, 24. 찧는 일, 25. 사냥하는 일, 26, 짐승을 잡는 일, 27. 가죽 벗기는 일, 28. 고기를 소금에 절이는 일, 29. 가죽 처리하는 일, 30. 닦는 일, 31. 자르는 일, 32. 글씨 쓰는 일, 33. 지우는 일, 34. 건축하는 일, 35. 허무는 일, 36. 짐 나르는 일, 37. 불 켜는 일, 38. 불 끄는 일, 39. 안식일 전에 시작했던 일을 끝마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길을 내고, 밀 이삭을 잘랐지요. 즉 이동하는 것과 수확하는 것을 금지한 법을 어긴 것이지요. 바리새파는 이것을 빌미 삼아 예수 일행을 옭아매려고 합니다. 참된 안식을 주려고 했던 안식일이 오히려 사람을 옭아매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안식일 준수 계명이 번쇄한 율법 규정으로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규정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처벌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흔히 벌어집니다. 2010년 미주 뉴스앤조이라는 인터넷 신문에 실린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글 하나를 인용하겠습니다.
"새벽기도에 오래도록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새벽기도에 빠진 목사와 장로들의 빠진 횟수와 날자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꼬박꼬박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십일조를 빼먹거나 제대로 하지 않는 동료 신자들의 목록이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시선에는 '너는 왜 금식기도를 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타가 섞여 있습니다. 크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말투에는 작고 별 볼 일 없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넘쳐납니다. 무언가를 깨달은 '안티'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몸짓에는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한 손가락질이 배어있습니다.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가 무섭습니다. 그분 앞에 서면 모든 사람들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분류되어 버리고 맙니다. 성도수가 제법 되는 교회 목사들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권위와 무게가 엄청난 압박으로 성도들을 찌그러트립니다." (최태선 목사 칼럼)
새벽기도, 금식기도, 십일조, 깨달음, 신학 공부, 교회의 성장! 이것들은 모두 가치 있는 것들이지만 이렇게 잘못 이용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 하나가 맛있는 스프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함께 금식을 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눈길 속에는 유혹에 넘어간 불쌍한 영혼을 향한 애처로움이 아니라 분노에 찬 정죄의 따가운 시선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았던 제자들은 유혹에 넘어간 젊은 제자를 엄하게 꾸짖어주기를 바라며 스승, 프란체스코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더니 젊은 제자가 먹었던 스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경악의 눈길로 스승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 서로가 서로를 참으며 사랑하며 아끼자는 것입니다. 저 젊은이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프를 떠먹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굶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안식일과 주일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의 주일과 안식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테두리에 있었기에 안식일을 준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유대 지역을 벗어나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안식일의 준수라는 유대의 율법보다는 우리 주님의 날(주일) 즉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더욱 축하하며 기념하였고,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한 콘스탄틴 황제가 일요일을 공휴일로 선포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준수 대신 주일에 모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안식일 규정의 정신입니다. 첫째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쉼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나머지 엿새를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궁극적인 안식은 하나님에게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서 하나님을 뵈었기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회상하고 그분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제를 여는 주일이 하나님과 특별한 시간을 갖는 것이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유대 전쟁으로 파괴된 이후에 번성한 기독교는 성전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매이지 않는 시간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공간을 넘어서서 시간을 거룩하게 한 것은 종교의 역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일주일에 하루 그것도 일요일이라는 제한된 시간만을 정하여 그때만 반짝 그리스도인처럼 사는 "한정된 시간의 종교"를 넘어서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안식일 계명이 주는 궁극적인 명령은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특별한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주일은 바로 그러한 특별한 시간입니다. 그날은 먹고 사는 문제보다, 오락과 재미보다, 인간사에 의존하여 거기에 매달리기보다, 자본주의 계략에 푹 빠져 자기마저 소진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 안에 있으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주일 말고도 늘 여러분이 정하는 좋은 시간에 여러분에게 주어진 많은 시간 속에 반드시 하나님과의 특별한 시간을 가지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나를 성찰하는 그 시간을 가지시고, 하나님을 만나는 그 시간을 위하여 나머지 시간에는 충실히 일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십시오. 바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의 뜻입니다. 여러분이 안식일 준수 계명의 이러한 본뜻을 알고 실행한다면 여러분의 온몸과 영혼이 참된 쉼을 누리며 기쁨의 넘치는 삶이 이어질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동료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십시오.
개미에게서 배웠다면 베짱이에게도 배우십시오.
정신없이 살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깊고 충만한 시간을 만들어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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