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중문화 리뷰] 슬픔은 조약돌이 되어

존 카메론 밋첼 감독의 <래빗 홀>을 보고

▲영화 <래빗 홀> 포스터. 
이토록 슬픈 가정의 달이 있었을까. 어린이날을 맞이한 청명한 5월의 하늘은 숙연한 분향소에서 부모를 잃고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던 어린아이를 떠올리게 하여 더욱 가슴이 미워진다. 아직도 누군가는 되돌아오지 못한 채 차디찬 바다 속에 있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식과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가족과 연인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 분들의 고통과 슬픔은 아직 뜨겁기만 하다. 지난 2011년의 마지막을 따뜻하게 장식한 존 카메론 밋첼 감독의 <래빗 홀>이 전하는 상실과 그리움, 그리고 위로의 이야기가 참사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하는 우리 모두를 따뜻하게 감싸주었으면 한다. 
 
“신이 천사가 필요해서 아이를 데려 갔다고요? 
왜 또 다른 천사를 만들지 않고 내 아이를 데려갔나요!”
 
단 한 순간의 사고로 생긴 사랑하는 사람의 빈자리는 잔인하게도 평생의 상처로 남는다. 8개월 전 교통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은 하위(아론 에크하트 분)와 베카(니콜 키드먼 분)는 이러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슬픔을 받아들이는 서로의 다른 태도와 각자의 노력은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긴다.
 
남편 하위는 밤마다 아들을 찍어놓은 동영상을 보고 슬퍼할 정도로 매우 감성적이지만 아내 베카는 슬픔 앞에서 매우 이성적인 모습을 보인다. 자식을 잃은 부부들의 모임에서 신이 천사가 필요해서 아이를 데려갔다는 한 부모의 말에 베카는 격앙된 반응을 보이며 왜 신은 또 다른 천사를 만들지 않고 내 아이를 데려갔는지 울분을 토하며 그 자리를 박치고 나온다. 종교로 슬픔을 승화시키는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베카를 보고 있자면 참사의 현실을 머리로 받아들 수 없고 신의 섭리를 가슴으로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 하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이후 하위와 베카는 각자의 슬픔을 치유하기 위해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다.

“언제부터인가 견딜 만해져. 
결국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작은 조약돌 만하게 되지.”
 
▲자식을 잃고 슬픔에 빠진 베키(나콜 키드먼 분). ⓒ영화 <래빗 홀> 스틸컷.

혼자서 슬픔을 삭이며 아들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했던 베카는 어느 날 우연히 교통사고를 일으킨 학생 제이슨(마일즈 텔러 분)을 만나게 되면서 처음으로 자신만의 위안의 방식을 찾게 된다. 제이슨 앞에서 보여준 그녀의 감정은 분노가 아닌, 연민의 감정이었다. 죄책감을 가지고 자신과는 또 다른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제이슨 앞에서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서로 마음을 열고 진솔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와중에 흐르는 눈물로 베카는 마음 깊숙이 쌓여 있던 슬픔을 하나 둘씩 지워나간다.
 
하지만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슬픔은 너무 큰 상처이기 때문일까. 베카는 11년 전 약물중독으로 아들(베카의 오빠)을 잃은 그녀의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슬픔은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시간이 흐르면 슬픔의 느낌이 사라지냐는 베카의 질문에 엄마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슬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엄마는 베카에게 점점 그 느낌의 무게는 줄어들어 견딜 수 있다고 말해준다. 처음에는 거대한 바위 같았던 슬픔이 점점 작아져 주머니에 넣고 다닐 말한 조약돌이 된다고.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그 조약돌이 손에 잡히기에 때로는 끔찍하지만 아들 대신 주어진 그 조약돌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엄마의 조언은 잔인하지만 지극히도 현실적인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 생각이 좋아. 멋진 것 같아. 
난 지금 슬픈 버전의 삶을 살 뿐이야.”
 
▲베키는 평행우주이론에 관심을 보이고, 이 이론에 힘입어 슬픔의 무게를 덜어낸다.

슬픔의 무게를 평생 간직하고 살아야 함을 알게 된 베카는 제이슨이 알려준 평행우주 이론에 관심을 보인다. 제이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우주가 존재하며 래빗 홀이라는 통로를 통해 무수히 많은 우주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그림으로 보여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우주에서는 또 다른 우리가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평행우주 이론을 알게 된 베카는 슬픔의 무게를 한껏 덜어낸다. 지금 이 우주의 자신은 불운하고 슬픈 삶을 살고 있지만 또 다른 우주에서 자신은 아들과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만족해한다. 너무나도 이성적이어서 종교를 믿지 않았던 베카가 평행우주 이론이라는 다소 비과학적인 과학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결국 그녀가 지닌 슬픔의 무게를 덜어준 것이 이성이 아닌 ‘믿음’이라는 감성이었음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베카는 제이슨을 통해 슬픔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위안을 얻고, 엄마를 통해 슬픔이 삶과 함께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과학 이론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는 길을 찾았다. 이후 베카는 남편 하위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지금까지 슬픔 때문에 벽을 쌓고 지냈던 친구와 이웃들과 파티를 열며 그들과의 회복된 관계 속에서 평온을 되찾는다.
 
영화 <래빗 홀>에서 아들을 잃고 슬퍼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담담하게 슬픔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베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온 국민이 슬픔에 빠진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이 떠오른다. 참사 앞에서 너나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슬픔의 무게를 지게 되었다. 더욱이 곧 이어 다가오는 어버이날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 아픈 시간을 보내실 분들에게는 지금의 슬픔이 바위와도 같을 것이다. 영화 <래빗 홀>은 이러한 슬픔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가야 할지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 참사의 슬픔은 끝까지 우리 곁에 남겠지만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모두에게 참고 견딜 수 있는 조약돌이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글/ 이가람(연세대 신과대학 4학년)·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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