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이화대학교회 장윤재 담임목사] 주님, 내가 보게 하소서

2025년 7월 20일 주일예배 설교

jangyoonjae
(Photo : ⓒ베리타스)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신명기 4:15-19, 고린도후서 3:12-17, 요한복음 9:1-41

설교문

오늘의 복음서 본문인 요한복음 9장에는 '보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냐 물었지만, 예수님은 아무의 죄도 아니고 다만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니 그가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눈먼 사람이 다시 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웠습니다. 대신 그들은 그 기적을 '예수'라는 사람이 일으켰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눈먼 사람을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죄인'으로 분류됩니다. 그런 '죄인'이 기적을 행할 리는 만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멀었던 사람과 그의 부모를 불러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24절, 새번역)라고 다그칩니다. 거절하자 이번에는 욕설을 퍼부으며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른다"(29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이렇게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39절, 새번역) 바리새인들은 더욱 발끈했습니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40절, 새번역)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41절, 새번역)

참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세상을 '확실히' 보고 있다는 사람들과 논쟁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을 '밝게' 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모세가 준 율법에 따라 이 세상에서 무엇이 '정결한' 것이고 무엇이 '부정한' 것인지 확실히 구별할 줄 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수건이 그 마음을 덮[은]"(고린도후서 3:15)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가복음 8:15, 마태복음 16:6, 누가복음 12:1) 경고하셨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에 나오는 누룩을 좋은 것으로 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쁜 뜻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태복음 13:33, 누가복음 13:21)라는 말씀 때문에 우리는 누룩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좋지 못한 성향'을 가리키실 때 이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좋지 못한 성향'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예수님이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실히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그 나라를 받아들이기라도 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구한 표적이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다든지, 눈앞에 천사가 나타난다든지 하는 식의 것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요구한 건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을 자기들의 눈에, 즉 자기들의 전통과 해석에 익숙한 것으로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낯선 것은 자기에게 익숙한 것으로 번역되어야 받아들이겠다는 태도,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경고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이었습니다. 왜 누룩입니까? 그런 태도는 누룩처럼 사람들에게 맹렬히 퍼져나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에서 뇌는 아주 특별한 기관입니다. 전체 체중의 약 2%밖에 안 되지만 사용하는 에너지는 20%나 됩니다. 뇌는 고에너지 소비 장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필요한 것만 빠르게 처리하고 불필요한 것은 과감히 생략하는 방식으로 일합니다. 복잡한 세계를 단순화하고 패턴화해서 인식합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다 보면 뇌가 과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뇌는 '이건 전에 봤던 거야!', '이건 위험해!', '이건 중요하지 않아!'와 같은 필터를 사용해 세상을 축약해서 봅니다. 우리는 보통 눈은 카메라고 뇌는 재생 장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뇌는 '편집자'(editor)입니다. 눈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자르고, 붙이고, 강조하고, 때론 무시하면서 이야기를 편집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인간은 언제나 '프레임'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지 않고, 어떤 틀(범주, 개념, 언어, 기억)을 통해서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인간의 언제나 부분적이고 편협합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전지적 시점이란 게 없습니다.

이렇듯 '눈으로 보되 보지 못하고, 귀로 듣되 듣지 못하는 인간'을 성서가 끊임없이 고발합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애굽기 33:20)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인식은 제한되어 있고 유한합니다.

이사야 6장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9절) 인간의 뇌는 자신이 이미 아는 정보, 또는 기대하는 정보만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새로운 것, 불편한 진실은 무의식적으로 거부합니다. 이를 '인지적 편향'(cognitive bias)이라 합니다. 또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의 신념, 자기의 이익, 자기의 프레임에 갇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17-18절) 이 장면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난 이후에도 제자들이 여전히 '떡의 문제'로 걱정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베푸신 은총의 기적을 온몸으로 체험하고도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의 프레임(결핍, 걱정, 계산)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은혜 앞에서도 걱정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바울 시대의 거울은 오늘 우리의 거울처럼 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동기를 닦아 만들었으니, 거기에 얼굴을 비추면 희미하게 보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인식이 그와 같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의 하나님 이해는 불완전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에베소서 4:13, 새번역) 될 때까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자라나고, 쉬지 않고 달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자기 '을 심판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성경에 정통했고,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 힘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눈앞에 두고서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죄는 '확신의 죄'였습니다. 불신의 죄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시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죄는 그들의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심판하러 오셨다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판'은 물리적인 형벌이 아닙니다. 진짜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를 드러내는 구별입니다. '못 보는 사람', 곧 자신이 보지 못하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오히려 보게 되는 은총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 곧 자신이 본다고 믿는 사람은 눈먼 사람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연약하고 한계가 많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참된 인식은 내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열립니다. 내가 '눈먼 사람'임을 겸손히 고백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실로암 맑은 연못에서 두 눈을 씻겨주십니다. 바울처럼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사도행전 9:18) 될 것입니다.

주중에 영화 <콘클라베>를 보았습니다. 아시지만, 콘클라베(Conclave)란 로마가톨릭교회에서 교황을 뽑는 전 세계 추기경들의 모임입니다. 교황이 사망하거나 물러나면 16~19일 사이에 교황청의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 새 교황을 선출합니다. 영화 <콘클라베>는 한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바티칸에 모인 133명의 추기경이 새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초반에는 조용한 대화와 기도, 엄숙한 분위기가 이어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각 인물의 욕망과 감춰진 권력의 암투가 서서히 드러납니다. 교회 정치, 알고 보면 무섭습니다.

영화에서 제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콘클라베를 시작하기 직전에 드린 미사에서 새 교황 선출 과정 전체를 관리하는 한 추기경의 강론이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133명의 추기경이 성의(聖衣)를 입고 근엄한 얼굴로 앉아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추기경이라 하면 누구보다 가장 큰 믿음과 신앙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처음에 느릿느릿 라틴어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를 하던 그 추기경은 잠시 침묵 후 원고를 접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편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선물은 다양성입니다. 다양한 사람과 견해가 교회의 힘입니다. 내가 교회를 섬기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죄는 '확신이라는 죄'입니다. 확신은 통합의 큰 적입니다. 확신은 포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살아 있는 까닭은 정확히 의심과 손을 잡고 함께 걷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오로지 확신만 있다면, 그리고 의심은 조금도 없다면, 신비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비가 없다면, 신앙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사람을 믿어라. 그러나 진리를 발견하는 사람은 의심하라." 이런 말도 있습니다. "가짜 지식을 조심하라. 그것은 무지보다 더 위험하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무지가 과오보다 낫다. 그릇된 것을 믿는 자보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자가 진리에 더 가깝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이해한 하나님이 전부가 아님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문화, 전통, 해석을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관점을 통해 더 풍성히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양성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그리고 세상을 하나 되게 만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18:31b-32) 너무도 자주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우리 학교 사범대학 교육관 A동에 헬라어(그리스어) 원문으로 붙어 있습니다. 이 유명한 말씀의 다른 번역은 이 말씀의 깊은 뜻을 더 잘 알게 해줍니다. "너희가 내 말대로 살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다'라는 말의 뜻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다'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살면'(실천하면) 진리를 알게 되고 바로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진리는 머리로 아는 게 아닙니다. 진리는 새로운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진리는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보려는 마음입니다. 들으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누가복음 17:21)라고 물리적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 인식되는 실재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통해 체험하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한1서 4:8)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성서가 증언하는 가장 짧은 한 구절입니다. 사랑하면 보입니다. 사랑하면 들립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나태주 시인)라고 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자기 확신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언제나 '다시' 듣고, 언제나 '다시' 보며, 언제나 '다시' 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확신이 아닙니다. 사랑은 열린 것입니다. 사랑은 희망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사랑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의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4-7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앞에서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진리 앞에서도 진리를 보지 못했습니다. 진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상태는, 진리를 완전히 안다고 여기는 자기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짜로 보려면 우리는 자기 확신의 눈을 감아야 합니다. 그 눈을 감아야 보입니다. 이 말씀이 불편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자기도 모르게 그런 자기 확신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판단하고, 해석하고, 단정합니다. 그 단정들 속에는 나의 오랜 경험과 상처 그리고 배움과 신념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단정이 '진리'가 되는 순간 그 진리를 벗어난 사람은 틀렸다고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결국 어느 순간 우리는 그런 '자기 확신'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우상입니다. 우상 숭배가 무엇입니까? 우상 숭배란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자기를 스스로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불길 중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 어떤 형상도 보이지 않으시고 오직 음성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신명기 4:16)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금송아지도, 목각 신상도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그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더욱 가까이에 있으며,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도 함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옳다'는 자기 확신의 우상입니다. '내 생각'이 진리인 줄 착각하게 만드는 확신의 덫입니다.

교우 여러분, 만일 언제부턴가 우리가 듣기보다 말하기를 더 좋아하고, 배우기보다 가르치기를 더 좋아하며, 함께 울기보다 정죄하기를 더 좋아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조용히 세워진 자기 확신의 우상은 없는지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Veritas liberabit vos!" 진리는 우리를 가두지 않습니다. 진리는 정죄하지 않습니다. 억압하지 않습니다. 속박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 했습니다. 무엇이 자유입니까? 성서가 말하는 자유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안정과 평안을 붙잡고 축복만 받으려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종교가 '진리를 명분으로 붙들고 있는 자기 확신이라는 우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진리의 이름으로 남을 억누르고 자기 자신도 억누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독실한 신앙이라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입니다. 그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모든 기만과 거짓과 불완전한 것들에게 해방하시는 분입니다.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로 부임했습니다. 험한 정글을 오가며 부락을 찾아다녀야 하는데 도무지 불안하여 현지인 한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안내인에게 도무지 믿음이 가질 않습니다. 아무리 따라가도 길이 아닌 곳만 골라 가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 정말 길을 아는 거요 모르는 거요?' 그러자 안내인이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허허, 선교사님 정글에는 길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곧 길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 이 세상에 정해진 길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길입니다. 그가 우리의 진리요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를 따라가십시오. "진리의 예수 붙잡고 길 잃지 않게"(찬송가 187장) 그를 따라가십시오.

기도합시다. "주님, 혹시 내가 내 생각에 무릎 꿇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때문에 누군가를 틀렸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리의 이름으로 사랑 없이 누군가를 찌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눈을 열어주십시오. 내가 보게 해주십시오. 어두운 내 눈 밝혀서 진리를 보게 해주십시오. 막혔던 내 귀를 열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차가운 내 마음 녹여서 다시 사랑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해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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