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향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권영진 목사를 만났다. ⓒ베리타스 DB |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성공을 향해 매진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향하는 성공이란 성도수와 교회 건물 규모로 평가된다. 이런 흐름에서 볼 때 정언향 교회를 담임하는 권영진 목사는 괴짜다. 약 4년 전, 수도권 변두리인 양주에 교회를 개척했다. 성공을 꿈꾸는 목회자들이 몫 좋은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교회를 개척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신도수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오로지 말씀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에만 힘쓴다.
권 목사는 한편으로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행태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그의 이러한 ‘소셜 목회’ 활동이 새삼스럽지만은 않다. 그는 정언향 교회를 개척하기 앞서 <딴지일보>에 한국 교회 현실을 비판하는 칼럼을 꾸준히 기고했고, 이 기고문을 모아 책을 펴냈다. 그 책이 『진정 회개할 곳은 교회다』는 책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한국교회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지는 모든 활동들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의문을 던졌다. 4년여가 지난 지금, 이 책을 다시 꺼내들어도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선지자적이다.
책 출간과 교회 개척을 시작한지 4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4년이면 반쯤은 변했을 시간이다. 그동안 그가 일침을 가했던 한국교회 현실이 얼마만큼 변했을까? 그리고 4년 동안 목회활동을 어떻게 회고하고 있을까?
그는 먼저 지난 시간이 부끄럽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4년의 시간이 이른바 ‘정언향 스타일’을 만들어 가는데 최선을 다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자평은 항상 부끄럽죠. 솔직히 스스로 생각해볼 때 불만족스럽고, 민망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제 자존심과 명예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지난 4년 동안 함께 신앙 생활한 성도님들께서 정언향 스타일이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성도님께서 말씀하신 정언향 스타일이란 정의, 공평, 인내, 진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스타일은 사실 교회의 문화가 아니라 성경이야기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네 가지 덕목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그대로 율법의 핵심이기 때문이죠. 돌이켜 생각해보면 4년 동안 설교에서든 목회활동에서든 이 네 가지 덕목들을 가장 강조했다고 봅니다.
아모스나 미가 선지자가 예언했듯 정의와 공평이 회복회지 않은 사회는 하나님의 사회가 아닙니다. 한편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처럼 인내와 진실이 바탕에 깔려있지 않다면 이 또한 의미 없는 것이죠. 종합해 볼 때 정의, 공평, 인내, 진실이 결국 율법의 핵심이고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바탕인 셈입니다. 전 설교나 강의를 통해, 그리고 실제 목회 현장에서 이를 표현하고자 굉장히 애를 많이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감 넘친 어조로 정언향 스타일을 이야기했다. 그의 자신감은 다른 목회자들처럼 자신만의 아성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는 데서 비롯된 자신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공동체 의식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에서 비롯된 자신감이었다.
“전 제 개인의 교회가 아니라, ‘정언향 스타일’로 요약되는 교회 기풍이 어느 정도 형성된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저는 언젠가 은퇴하잖아요. 그러면 후임 목회자가 세워져 교회를 이끌어 갈 텐데, 담임목사에 의해서 움직이는 교회는 목사가 바뀔 때마다 교회가 위태로워진다고 생각해요. 대표적인 예가 사랑의 교회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전임이 잘 했어도 후임이 한 번 잘못 들어와 버리면 금방 무너지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중요한 점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바닥이죠.
성도들의 정신이 건강하면 목회자가 설령 부족한 사람이 오더라도 함께 세워갈 수 있어요. 그러나 성도들의 의식이 전무하다면 금방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볼 때 바울교회, 베드로교회는 없었어요.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는 존재했습니다. 이는 목회자가 아니라 교회가 가진 정신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전통은 교구시대까지 이어졌어요. 안디옥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정신,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정신, 예루살렘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어떤 독특한 관점들 등등. 독자적으로 그 교회들마다 다 스피릿이 형성됐는데 교회가 가톨릭으로 제국화되면서 모든 특색들이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즉 황제의 명령에 따라 교회들이 지녔던 독특한 사역과 가치관들이 다 없어져 버리고 죄다 평준화됐단 말입니다.
전 이런 흐름이 성경에 부합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지역교회를 주시는 이유가 그 지역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어서라고 생각해요. 서울의 강남에 있는 교회와 시골에 있는 교회가 같을 수는 없어요.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선호도가 다르고 문화관도 다르고 의식도 다른데 일괄적으로 똑같이 한다? 전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스스로 정언향 교회가 가진 독특한 의식들이 자연스럽게 의식화돼 성도들 사이에 목사님의 교회가 아니라 우리의 교회라는 공동체 의식이 형성된 것만으로도 후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최근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목회자들의 망언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기독교 전체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됐다. 이 점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우선 ‘사람다움의 회복’이 시급하다고 답했다.
“저는 교회가 좀 사람다움을 회복했으면 좋겠어요. 인지상정이란 말처럼 어떤 사람이든 고통스럽고 불편한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워하는 측은지심이 들고, 반대로 나쁘고 악한 것을 보면 화가 나는 게 정상적인 반응 아니겠어요? 그런데 한국 교회는 감정의 장애를 겪고 있는 것 같아요. 슬퍼하는 사람을 보고 슬퍼할 줄 모르고, 분노해야 될 지점에 분노를 못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은 탐욕에만 몰입해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이 고스란히 묻어 있습니다. 즉,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갖다 보니까 다른 사람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죠.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회 속에서 살다보니까 교회도 배우는 거예요.
타인의 슬픔에 무관심하고, 심지어 일각에서는 한 달이나 지났으니까 이제 다 잊고 우린 또 우리의 삶을 살아야 되지 않느냐라고 합니다. 만약 세월호 참사가 모두 종결됐으면 이해를 해요. 사실 세월호 참사는 엄밀히 말하면 시작도 안 했어요. 책임소재가 분명히 가려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벌써 덮자는 얘기가 나온단 말이죠. 저는 이런 현상들이 소통, 감각 장애에서 비롯됐다고 봅니다.
꼭 세월호 문제만 아니라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사는 지역에 큰 문제가 생기거나, 슬픔을 당한 이웃에게 함께 아파해주고 함께 울어주고 슬퍼해주는 일은 인간다움의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즉 세월호 참사가 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주고, 응원해주고, 슬퍼해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움 줄 수 있는 일에 도움 주는 일, 정말 기본중의 기본 아니겠어요?”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