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34)
▲팜플로나 시청사 앞 광장 골목사이로 산 산투르니뇨교회가 보인다. |
▲팜플로나 시청사 앞 광장 |
피난처가 되어 준 팜플로나 알베르게의 환대와 풍성함의 은택은 우리를 새롭게 하였다. 씻음의 정결함과 채움의 풍족함이 우리에게 내적인 안식과 친절한 위로를 베풀어준다. 오후 6시가 다 되어 팜플로나 골목길에 나섰다. 아직도 날씨는 후끈하다. 저녁 먹을거리도 그렇고 내일 여정 중에 공급할 일용양식을 준비해야 했다. 부를라다 도로 끝에서 올려다 보이던 산타마리아교회가 바로 옆 골목에 있다. 아름답다. 14세기 나바라의 군주였던 카를로스 엘 노블레와 그의 아내 레오노르가 영원히 기도하는 모습의 석조상으로 산타마리아교회 내부에 누워 있다고 한다.
산타마리아교회를 등지고 쿠리아거리를 지나가면 팜플로나 시청사 광장이 있고, 시청사 오른쪽 계단으로 내려가면 대형 메르카도(상점)가 있다. 산 페르민 축제 때 ‘엔시에로(encierro소몰이)’의 절정에 이르는 광장이다. 빨간 머플러와 황소의 거친 숨소리, 골목골목 발코니에서 소리 지르며 물과 열정을 거침없이 뿌려대는 광경이 눈앞에서 재구성된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쿵덕거린다. 오래전 신심 가득한 순례자들도 이런 세상의 축제에 가슴 뛰었었을까?
▲팜플로나 시청사 1층 정문 |
▲헤밍웨이와 산 페르민 축제를 이용한 상품들을 전시한 상점 |
세빈이는 계속 투우에 대한 호기심으로 산 페르민 소몰이 축제 기념품 가게 앞에서 머뭇거린다. 큰 맘 먹고 상점에 들어섰다. 나그네 길에서 물건이 늘어나는 것은 세상 정욕의 짐을 더하는 것이다. 버리면서 부인하면서 가벼이 가야 할 길인데, 짐이 더하여진다. 세빈이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너의 짐이다.’ 빨간색 가슴에 검은 황소가 있는 셔츠 한 장을 사 주었다. 세빈이는 까미노 여정 내내 알베르게에 도착하기만 하면 이 옷을 입었다.
산 페르민 축제San Fermin Fiesta ‘소몰이’ 달리기의 종착지, 헤밍웨이의 흉상이 있는 투우광장이 로마 콜로세움 원형경기장 모양을 하고, 축제의 함성을 간직한 채 고즈넉하다. 투우장을 뒤로 하고 카스티요 광장으로 들어섰다. 한 때 나바라를 통치했던 왕, ‘카를로스 3세 엘 노블레(귀족왕)’ 조각상이 카스티요 광장을 바라보고 서 있다. 카를로스 3세는 주변국이었던 카스티야와 프랑스와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평화정책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긴장과 갈등이 지속되면 경직과 조급함으로 고통 받게 된다. 하지만 평화가 형성되면 즐거움과 풍요함, 여유와 행복으로 충만해진다.
나바라 왕, 카를로스 3세는 어려운 시기에 평화적 관계 형성을 위해 부단히도 애썼던 것 같다. 때로는 욕심도 내려놓고, 자신을 낮추기도 하면서 말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마태복음5:9)’이라고 주님께서 가르치셨다. 산타마리아 교회 안에 있는 카를로스 3세 부부의 모습은 두 손을 모은 채 겸손히 기도하고 있는 형상이다. 아마도 온 땅의 평화를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팜플로나 카스티요 광장에 있는 카를로스 3세 귀족왕 동상 |
▲팜플로나 시청사 1층 정문 |
▲팜플로나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의 내부 모습 |
광장은 널찍하게 탁 트여 있고, 광장 주변으로는 회랑이 있는 건물들과 흥겨운 카페들이 즐비하다. 화창한 하늘 아래, 광장 안으로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저녁 시간을 즐기고 있다. 광장 저 편에 작가 헤밍웨이가 자주 묵었던 호텔 라 페를라Gran Hotel La Perla가 보이고, 그 왼쪽에 그의 문학적 감수성이 창조되었을 공간, 카페 이루냐Café Iruña가 하얀 색 차양막을 펼치고 있어서 한 눈에 들어온다. 도시 그늘이 광장에 짙어지는데, 하늘은 아직도 퍼렇다. 팜플로나 시내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렸더니 허기와 피곤이 몰려온다. 시청사 아래 메르카도에서 구입한 돼지고기 삼겹살 몇 덩어리를 그대로 프라이팬에 구워 소금에 찍어 먹었다. 꿀맛이긴 한데 금방 배가 부른다. 며칠 동안 차 한 잔, 빵 한 조각 정도로 끼니를 해결했더니 식사량이 줄어든 모양이다.
알베르게 안마당에서 묵상의 시간을 통해, 욥기 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그리고 욥기 2:5을 읽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단이 욥을 청구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를 정죄하며 내놓으라고 청구한다. 삶의 여정이 힘들고 어려우면 우리의 입술이 죄를 지을 것을 사단은 잘 알고 있다. 아내의 다리가 걱정이고, 나의 무릎이 염려이고, 발바닥 물집에 붙여 놓은 밴드가 근심이며, 가슴 쪽에 일어난 좁쌀 같은 땀띠가 또 문제이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 속에 일어날 어려움과 곤란함이 있어도 담대히 이겨야 할 것이다. 밤9시, 이제야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린다. 바람과 함께 팜플로나가 잠이 든다.(사진제공= 이대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