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회장) ⓒ베리타스 DB |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닷가에 가셔서 베드로가 그물로 잡아온 생선을 제자들에게 먹이기 위해 숯불을 피워두셨다가 그와 그의 형제들에게 그 고기를 숯불에 구워 먹이셨다. 베드로는 예상치 못한 숯불고기를 먹었는데 그가 잡은 고기 그대로는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을 미리 부탁하셨으나 그가 낚아 올린 고기를 그대로는 먹을 수 없었듯이 베드로나 그 누구도 낚은 사람(물고기)을 그대로 두면 상하거나 썩어버릴 것이다.
목사나 전도사 혹은 신자들이 전도해서 교회에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 일정기간 후 물세례를 주어 신자의 자격을 부여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으로 족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성령의 숯불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고 세례요한은 그것을 미리 말해주었다.
목사들이 전도되어온 사람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내가 세례를 주노라”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목사 자신이 주는 세례가 아니고 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주는 물세례이고 (성령의) 불세례를 주는 것은 예수님께 달린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크고 작은 교회의 목사들이 자기 교회의 교인수를 가지고 자랑도 하고 자족감을 갖지만 그들 중 얼마의 신도가 예수의 숯불에 구워진 진짜 신도인지는 자기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큰 교회라고 자랑할 일이 못된다.
초대교회에서 세례를 주던 과정에 비하면 요즘 한국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주는 과정은 신자들에게는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쉬운 일이다. 초대교회는 적어도 3년간 세례준비자를 가르치고 또 감시자를 두어 그의 일상생활을 살펴본 뒤 하자가 없다고 판단될 때 세례를 주었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만으로 3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게 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로 그들이 성령을 받아서 믿게 된 것이었다. 한국의 군 선교나 경찰 선교나 학원 선교에서 그물이 찢어지듯이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자랑하는데, 그것도 자랑할 만 하지만 그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예수의 숯불에 달려 있다. 교회 안에는 이름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없지 않고 목사나 장로나 권사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교계가 이렇게 비판거리가 된 것도 예수의 숯불에 제대로 구워지지 않은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논밭에 자라는 가라지와도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쉽게 판단해서 뽑으려 할 것이 아니고 두고 볼 일이다. 예수의 숯불에 구워지는 사람들도 빠르게 또는 천천히 느리게 구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숯불에 급하게 또는 뜻밖에 빨리 구워진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베드로나 스데반의 설교를 엿들을 기회가 있었을 것이고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육로 한 주간의 여정에서 그들의 설교와 예수의 교훈과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거나 고민하면서 서서히 예수의 숯불에 구워져 가던 중이 아니었을까도 생각된다. 반면,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사람은 상당히 오랫동안 서서히 예수의 숯불에 구워져 갔다.
교회 또는 교파에 따라 세례를 주는 형식 또는 의식이 다르다. 침례교와 그 밖의 몇 교파는 침례, 곧 물속에 잠기게 해서 세례를 주고 그 밖의 교회들도 각각 다른 형식으로 세례식을 거행하면서 각자가 자파교회의 세례의식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러한 생각은 인간적인 것이고 어떤 물세례이든 예수의 숯불세례가 아니다. 천주교는 신부가 세례를 주면 그 의식 자체가 숯불 노릇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에, 개신교에서는 세례 받는 사람의 믿음이 세례의 효과를 낸다고 생각하는데 그 어느 세례든지 예수의 숯불 자체는 아니다.
요즘 천주교 신부나 주교 가운데도 성범죄가 있다고 교황이 분노하고 있는데, 개신교의 목사나 신자 혹은 천주교의 신부나 신자나 모두 어떤 형식의 세례를 받고 성직도 받았지만 베드로가 낚은 생고기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예수의 말씀대로 “주여 주여”한다고 해서 다 구원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름뿐인 목사, 신부, 장로, 권사, 또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교회의 위상이 추락하고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며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