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파편들』 겉 표지. |
도널드 피니 그레그(Donald Phinney Gregg)는 일본, 베트남, 미얀마, 한국 등 주로 아시아에서 근무한 CIA요원이었다. 그는 특히 한국과 인연이 깊어 1973년부터 1975년까지 CIA서울지부장을, 그리고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주한 미 대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의 인상은 냉혹한 암살자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주한 미 대사를 지내면서 고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화해 정책을 측면지원한 능수능란한 외교관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그는 올해 5월 『역사의 파편들』(원제: Pot Shards)이란 제목의 회고록을 펴냈다. 회고록을 읽고 난 뒤, 다시금 그를 떠올리니 친근한 옆집 아저씨 같아만 보인다.
그의 회고록은 말 그대로 그의 지나온 삶을 회고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저널리스트를 방불케 하는 치밀한 문장, 진솔한 태도 등은 독자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평생의 반려자 멕을 만나는 대목은 흡사 단편 로맨스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이 책의 미덕은 또 있다. 무엇보다 회고록을 써내려가면서 자신의 생에 그 어떤 미사여구도 더하거나 빼려고 하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자신의 치적은 한껏 부풀리고, 논란이 첨예한 쟁점은 언급을 피하는 우리의 전직 대통령과 너무나도 달라 보인다.
이 책은 모두 5부 31장으로 구성돼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게 순서겠지만 14장 김대중 납치사건 / 15장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 / 18장 부시와 함께한 외교순방 / 22장 주한 미국대사로 서울에 / 28장 여섯 번의 평양여행 등 저자가 한국에서의 경험을 다룬 대목부터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장(章)들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미국의 개입을 다룬 중요한 장이기 때문이다. 또 현재 교착된 남북 관계의 물꼬를 트고 분단체제를 극복할 근본적인 방안을 제시해 주고 있기에 허투루 지나쳐서는 안 된다.
몇 가지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자. 한국 현대정치에서 가장 위기였던 순간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었다. 1971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 후보에게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다. 이후 박 대통령은 김대중의 존재에 불편함을 느껴 많은 박해를 가했다. 무엇보다 김대중이 미국, 일본을 오가며 유신체제를 반대하는데 큰 부담을 느꼈다. 이에 당시 중앙정보부(KCIA)는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해 수장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했다.
당시 주한 미 대사였던 필립 하비브는 이 같은 음모를 즉각 간파했다. 도널드 그레그는 당시 CIA서울 지부장이었고 김대중 납치 사실을 하비브에게 보고했다. 하비브는 신속하고도 현명한 대처로 김대중을 구해냈다. 도널드 그레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하비브는 그보다는 영리했다. 대사는 박(박정희 대통령)이 성미가 급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그 납치에는 남한 권력의 제2인자급 인물이자 박이 가장 가까이 두고 신뢰하는 이후락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직접 대면해서 부딪히게 되면 자칫 파열음만 낼 뿐 결과는 확실치 않을 수 있었다. 하비브는 현명하게도 박에게 긴급 메시지를 보내 자기는 김대중 납치에 대해 알고 있으며 김이 죽는다면 미국과 서울의 관계가 끝장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하비브 대사는 박에게 김을 살릴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고 압박했다. 이런 접근은 박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대면해서 직접 당혹스러운 일을 당하는 걸 피하게 해줄 시간을 주었다.” (본문 217~218쪽)
만약 도널드 그레그의 신속한 정보 전달, 그리고 하비브 대사의 기민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김대중은 곧장 수장됐을 것이고, 박정희의 유신 체제는 또 다른 운명을 맞이했을지 모른다. 또 훗날 김대중이 대통령이 돼 대북 화해정책인 ‘햇볕정책’을 펼치는 광경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에서 미국의 역할은 어디까지?
사실 도널드 그레그가 주한 미 대사로 부임할 당시 뒷말이 많았었다. 전직 CIA요원이 대사로 임명된데 대해 일정 수준 거부감이 일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납치사건에서 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또 한국 부임 이전 아시아에 주로 근무했기에 아시아 지역 이해도도 높았다. 특히 도널드 그레그는 한국인들이 지닌 ‘한(恨)’이란 감정을 잘 이해했고, 그래서 1980년 광주민주항쟁 이후 한국 국민 사이에 고조된 반미 감정 해소에 앞장서기도 했다.
광주민주항쟁에서 가장 논란이 이는 대목은 미국의 역할이 어디까지였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런 의문은 진영논리에 따라 해석이 엇갈리는데, 미국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사주해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이런 해석은 전두환이 대통령에 등극하자마자 미국이 그를 불러 환대한 사실로 인해 상당한 설득력을 얻었다. 이에 대해 그레그는 “사실이 아니다”고 선을 긋는다. 또 실제 사실이 아니다. 미국이 사주했다기보다,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이른바 신군부가 독단적으로 작전을 벌였고, 미국은 이를 방조했다는 게 사실에 가깝다.
미국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에 대해 손쓸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권력은 카터에서 레이건으로 넘어가는 와중이었다. 이에 미국은 신군부가 사형선고를 내린 김대중을 구명하기로 하고, 전두환과 막후 협상을 벌였다. 도널그 그레그의 회고다. 당시 그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 있었다.
“나의 첫 번째 주요 임무는 남한의 전두환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하는 계획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그 방문은 1981년 2월1일에 이루어졌다. 한국정부는 전두환이 자기 나라에서 무게를 인정받게 하려고 레이건 대통령과 되도록 빠른 회담 개최를 압박해왔다. 레이건의 첫 번째 주요 외국 빈객으로 환영받는 대가로 전두환은 김대중의 안전과 석방을 보증했다
그러나 백악관 쪽에서는 솔직히 잔혹한 독재자 전두환을 형편없이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가 김대중의 생명을 손아귀에 쥐고 있지만 않았다면 백악관에 초대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의 미국 방문을 대단치 않은 일로 깎아 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본문 264쪽)
이 책의 가치는 마지막 장에서 빛난다. 그레그는 미국이 “싫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 지도자나 집단을 무조건 악마화하려드는 경향이 우리를 끊임없이 곤경에 몰아넣는 원인”이라고 꼬집는다. 그는 베트남, 이라크는 미국이 스스로 불러들인 곤경이나 다름없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북한에 대해서 ‘접근을 통한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불행하게도 부시 집권 이후 북-미 대화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남북관계는 더 말할 나위 없다. 이런 탓에 그레그의 주장은 한미 양국에서 푸대접 당하기 일쑤다. 그럼에도 그는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거침없이 “2016년 대통령직을 떠나기 전에 대통령으로서 북한과 접촉하기 바란다”고 적는다.
도널드 그레그의 조언이 원론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정보에 해박했고, 독재정권 시절 CIA책임자로, 그리고 남북 해빙무드가 조성되던 시절 외교관으로 서울에 주재하면서 많은 일들을 해냈다. 1992년 남한 정부가 추진하던 북방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한미 합동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을 취소시킨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레그의 조언은 비단 한미 양국의 고위 정책결정자뿐만 아니라 일반 한국인들도 반드시 새겨야 할 소중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1970년대 중반, 동북아시아에 있는 어떤 나라는 국민들 가운데 국가의 강압적인 정책에 두드러지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체포하고 고문했다. 그 국가는 비밀 핵무기 개발계획을 시작했고, 소형 잠수함을 포함한 하이테크 무기들을 비밀리에 외국에 주문했다. 한국이 바로 그런 나라였다. 그런데 오늘날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을 아시아에서 가장 믿고 의지할 만한 동맹국으로 보고 있다.
우리 미국과 서울의 관계에서 나타난 변화의 모습은, 기복은 있었어도 30년 이상 유지된 지속적인 대화와 개입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 상당 부분은 감정적으로 되거나 격한 논쟁을 초래하기도 했다. 북한과도 그 비슷한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 일이겠지만, 우리가 북한과 다시 전쟁을 할 준비를 하지 않는 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본문 458~4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