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하태영 칼럼] 하나님 없는 시대의 그리스도인

하태영 목사·삼일교회(기장)

▲하태영 목사 ⓒ베리타스 DB
출애굽과 같은 불가능한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암울한 현실에서 가져볼만한 질문입니다. 출애굽기는 그 배경을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이라든지, 그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등 신화적인 방식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출 3:1-8). 이는 고대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저 불가사의한 이야기들 속에는 고대 사람들이 겪은 일들에 대한 상징체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상징들을 통해서 고대의 이야기들이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재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출애굽의 중심에는 모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은, 성경은 출애굽을 ‘모세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세가 출애굽의 소명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 출애굽은 모세의 자각과 의지에 의해서가 아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에 의해 이뤄졌다는 게 핵심입니다. 물론 모세는 미래의 지도자로서 준비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불타는 열정은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좌절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두려움을 피해 도피자가 됩니다. 피신지 미디안 광야에서 그곳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안정된 삶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의식의 밑바닥에 잠복된 불안은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뜻밖의 신비한 징조를 접하게 됩니다.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네가 선 곳”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땅을 지칭하기도 하고,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 자체가 그만큼 신성한 일임을 강조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재로 여기는 땅이 실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땅임을 모세가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타지 않는 떨기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너를 보내겠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모세는 비로소 하나님께 의지하여 일어섭니다. 이전에 ‘내가 해보겠다’고 나섰을 때 돌아온 것은 좌절과 두려움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것 같은 땅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입니다.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시대 역시 참과 거짓을 분별하기 어려운 질곡의 시대였습니다. 잠시 후면 요한 자신이 처형당하게 될 살벌한 시대입니다. 그럴 때 세례 요한은 예수에 대해 궁금해 하는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자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요 3:31)고 증언합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는 그가 하는 말이 하늘의 말인지 땅의 말인지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언표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세례 요한은 땅의 소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의 소리를 두려워한 사람입니다. 시대가 어둡고, 내 삶이 비참하다 해서 하나님께서 ‘부재중’이신 게 아닙니다. 땅의 소리에 겁에 질려 있으면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땅의 소리가 아닌 하늘의 소리에 응답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으신 분들”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전시에 짐승 같은 자들에게 육체는 걸레취급을 당했을지라도 영혼까지 쓰레기가 된 건 아니라는 뜻으로 한 말일 것입니다. 정치와 사회가 도덕적으로 미성숙하고, 인간의 심성이 거칠어지면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을 위로는커녕 모욕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세월호 참사로 가족과 자녀를 잃은 유가족들을 모욕하고, 도덕적으로 매도하는 것도 결국은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집권세력과 굴지의 언론들까지 희생자들을 모욕하고 외면하는 걸 보면 우리 정치와 사회가 그만큼 미개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게 오늘의 대한민국입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 5:13-16)고 말씀하신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 권력은 치졸하고, 종교는 썩고 냄새나고 추하고, 언론은 돈밖에 모르기에,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실 것 같지 않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주목하는 이유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 글은 공동체성서연구원(원장 김영운 목사)의 월간지 『햇순』 제232호(2015년 6월호)에 실렸으며, 저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한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해 창조 신앙 무력화돼"

창조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교회가 개인 구원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신앙이 사사화 되면서 연대 책임을 물어오는 기후 위기라는 시대적 현실 앞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마가복음 묵상(2): 기독교를 능력 종교로 만들려는 번영복음

"기독교는 도덕 종교, 윤리 종교도 아니지만 능력 종교도 아님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실존적 현실이 때때로 젖과 꿀이 흐르는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특별기고] 니체의 시각에서 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