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신학연구소 소장 이장식 박사(본지 회장)는 6일 오후 기독교학술원 제25회 영성포럼 개회예배에서 설교를 전했다. 아래는 이 박사의 설교문 전문.
요즘 한국 교계에서 교회의 부흥이나 개혁을 위해서 인지 영성을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효성(workable)있는 영성이라야 하겠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과 경건을 모범으로 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됩니다. 영성이란 말은 철학적이 아닌 종교적 용어이므로 추상적으로나 사변적으로 논할 수없고 오직 구체적으로 즉 실천적으로 다루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과 경건의 생애의 클라이맥스이니 그의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나타내실 그의 영성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드릴 때에 잘 나타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인류구원의 계획을 위해서라지만 자기는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은 필수였으며 피하고자 하는데 아버지여 무슨 차선의 길, 또는 편법이 없습니까? 이렇게 고민하다가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원한 뜻을 헤아려 보고는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라면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즉 아버지의 거룩한 뜻에 순종한 것이 그의 영성, 곧 순종의 영성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그가 십자가에 달려서 숨을 거두기 직전에 "아버지, 저의 영혼을 부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죽은 후 어떻게 될 것인지는 자기의 영혼의 불별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전능한 능력에 맡기고 의지하겠다는 것이 그의 의지의 영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의지한 대로 하나님이 그를 자기의 능력으로 부활시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순종과 의지의 영성은 그의 공생활 시초부터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40일동안 광야에서 기도하였을 때 자기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필요한 것을 여러 가지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첫째로, 자기가 전개할 운동의 대상인 가난한 갈릴리지방 사람들의 빵문제를 먼저 해결할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있으면 효과적일텐데 비록 자연의 도리에 어긋나지만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줄 수 있는 편법이라도 있으면 하는 생각을 했으나 그는 빵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영혼의 양식으로 먹여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할 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높은데서 뛰어내려도 상하지 않게 하실만한 하나님의 뒷받침(backing up)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고, 또 자기도 그것을 알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를 시험해 볼 생각을 물리쳤습니다. 다음으로 자기가 일으키는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고 강력해지면 다윗의 왕국처럼 되어서 세상의 권세들을 복종시킬 수 있고 그리고 자기가 권세를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보기도 했으나 하나님 아버지가 만왕의 왕이신 줄 알고 그만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모두가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하고, 그의 영원불변한 구원의 계획과 능력을 믿고 의지하겠다는 그의 영생과 경건의 test였고, 확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이 영성과 경건을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 가르쳤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 속에 떨어져서 자연의 법칙에 순종하여 썩어져야 거기서 새 생명이 돋아나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많은 밀알로 부활하는 것은 다른 편법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창조의 자연법칙에 순종하고 의지하는 길 밖에 없다는 진리입니다. 이 비유가 자기가 인간 구원의 대업을 성취시킨 순종과 의지의 영성을 설명하는 것도 됩니다.
지금 우리가 16세기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에 두고 한국교계는 많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의 교훈을 되새겨보아야 압니다. 그들은 중세교회의 영성과 경건을 개혁해서 초대교회 사도들과 신도들의 영성의 회복을 가르쳤고 또 따랐습니다. 루터의 신학은 십자가 신학입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영성을 예수 그리스도가 지시고 돌아가신 십자가 죽음의 순종과 의지의 영성이라고 가르치고 설교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영성과 경건은 십자가의 영성과 경건이었습니다. 사도들과 신도들은 예수의 분부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이를 따랐습니다. 사도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초대신도들은 대게 다 가난하고 병약하고 억압받던 계층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믿고 교회에 나오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만을 전하고 신앙생활의 모범만 보여주었지 다른 수단이나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어서 자기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어떤 큰 능력이나 자랑할 만한 자기네 신앙도 과시하지 않고 힘없는 신자들로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순교해갔습니다.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순교를 그들의 최상의 미덕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수가 조금 늘어났을 때 겨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나 단체명으로 알려졌을 뿐이지 큰 교파나 교구를 만들고 감독이나 목사나 장로라는 명예를 누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나 베드로가 전도여행으로 각지에 가기 이 전에 오순절 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소수의 교인을 얻어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했지 무리하게 헌금하거나 빚내어서 교회당을 지을 생각도 못했고 100년이나 지나서 겨우 지상에 처음으로 안디옥에서 100km 떨어진 에뎃사(Edessa)란 곳, 오늘날 울피아(Urfa)란 곳에 교회당이 자그마하게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교인들은 순종과 의지의 그리스도의 영성과 경건으로 믿어가다가 300년이 지나서 그 결과로 신천신지의 꿈과도 같은 복음과 선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개혁과 부흥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개혁과 부흥을 열망하지만 어떠한 방법으로 할지 실천적인 상법을 별로 논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영성과 경건의 모범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순종하고 의지하고 전하고 고난 받던 초대교회 교인들의 영성과 경건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자료제공: 기독교학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