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공적 책임을 위한 신학연구소’(Institute of the Public Theology, 이하 연구소)는 개신교의 사회참여를 촉구하며 시작했다. 연구소는 제1회 정기논문발표회에서 공공신학을 들고 나와 개신교 신학자들이 이제는 대사회적인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암묵적인 합의에 도달했다. 다음은 이형기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가 말하는 연구소 창립 취지. <편집자 주>
전문(a preamble)
이 스페이스(e-Space)의 목적은 한국교회에게 공적 책임을 일깨우고, 한국교회를 향하여 공적 책임에 대한 신학적인 비판과 검토와 방향을 제시하며, 나아가서 가르침과 글과 행동을 통하여 공적 책임을 교회와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데에 있다. 이 모든 활동은 교회와 세상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하나님의 나라)와 이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와 창조세게 속에서 구현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trinitatis)에 동참하기 위한 것이다.
1. 한국개신교의 공적 책임수행의 역사
한국개신교는 그 동안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일터인 이 세상에서 공적인 책임들을 많이 수행해 왔다. 일찍이 한국의 기독교는 계몽차원에서 민족의 희망이었고, 한글을 보급하였으며,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세웠고, 평등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교육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해 왔다. 그리고 일부일처제와 여권신장에 힘써 왔고, 3•1운동과 같은 나라 살리기 운동에도 동참하였으며, 신사참배운동도 일으켰다. 나아가서 1970년대의 반독제운동과 1980년 남북평화통일운동에도 앞장섰고, 장기기증운동과 태안 앞바다 기름제거 운동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한국교회의 공적책임의 예는 허다하다.
2. 에큐메니즘과 공적 책임수행에 역행하는 요소들
하지만 우리 한국교회는 세상에 대한 적대관계, 영혼과 몸의 이분법, 개인구원과 영혼구원, 개 교회주의와 교회 성장주의, 그리고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사유(私有)화로 인하여 하나님의 드넓은 작업장인 이 세상에서의 교회의 공적책임 수행에는 너무나도 미흡하였다. 이와 같은 요소들은 에큐메니칼 운동과 교회의 공적책임 수행에 대한 저해요인들이다.
1) 교회와 세상의 적대관계: 우리 한국개신교는 이 세상을, 죄와 죽음의 세상이요, 사단과 마귀가 들끓는 세상이요, 최후심판과 지옥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는 세상으로 보고,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본다(요 7:7; 요 8:23; 요 17:16;).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노아의 방주 유형 혹은 구명(救命)선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세상”이라고 하는 바다에서 외딴 섬으로 만들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신 동시에 창조의 중보자시요, 온 인류와 우주만물의 화해자시요, 인류와 우주만물의 재 창조자이시요, 따라서 역사와 우주만물의 주님이시다.
2) 영혼과 몸의 이분법: 한국 개신교는 영혼구원을 강조한 나머지, 복음전도를 “구령사업”이라고 까지 말한다. 우리는 영혼과 영적인 것의 가치가 몸과 몸을 통한 모든 역사적이고, 사회 문화적인 가치들보다 훨씬 높다고 보는 경향이다. 전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혼만의 구원을 말한다. 그런 즉, 이와 같은 영혼과 몸의 이분법은 이 세상을 육체로 보고, 하나님의 일터인 이 세상에서의 공적인 책임 수행을 소홀히 여긴다.
3) 개인구원과 영혼구원, 개 교회주의와 교회 성장주의, 그리고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사유화: 한국 개신교는 개인구원과 영혼구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개인적인 복을 강조하는 샤머니즘으로 인하여 그리고 이미 지적한 대로 영혼과 육체 이분법 때문에, 개인구원과 영혼구원을 강조한다. 한국 개신교는 개 교회주의와 교파주의와 교회성장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는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사유화하는 경향 때문에, 하나님의 작업장에서의 교회의 공적 책임 수행에 약하다.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결코 사유 화 될 수 없다. “의의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 예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작은 자들에 대한 긍휼(compassion), 예언자들이 선포한 공의와 정의의 나라, 레위기 25장의 희년에 대한 비전과 누가복음 4장의 은혜의 해는 결코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 어떤 사유화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 모든 앞 당겨진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공적인 일(public affairs)에 해당한다. 사랑과 공의와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샬롬 공동체 형성은 전적으로 공적인 일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공공성 차원에서의 샬롬 공동체 형성을 우리의 선교(missio Dei)의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3.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선포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셨고,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시고 약속하시기 위해서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으며,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이 땅위에 성령을 파송하셨다. 그리하여 교회는 성령 충만한 사도들에 의해서 선포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서 기원하였다.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의 중심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 예수는 역사와 우주만물의 주님으로서 이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더 보편적이게 하셨다. 죄와 죽음과 흑암의 권세를 묵시적으로 계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이 모든 부정성을 부정하는 그의 부활(the negation of the negative)은 개인에게 부활의 몸을, 역사에게 하나님 나라를, 그리고 우주만물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계시하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름 아닌 영생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계시하시고 약속하셨다. 이는 역사와 창조세계 속에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치일 뿐만 아니라 새 창조의 세계(creatio nova)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새 인류와 새롭게 된 우주만물이 함께 어우러지는 샬롬의 “생명의 공동체”이다. 교회와 세상은 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한다.
1) 생명공동체인 하나님 나라와 교회 및 세상: 그런 즉, 교회는 위와 같은 “생명의 공동체”를 미리 보여주는 “생명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그와 같은 “생명공동체”의 미리 맛봄이요, 징표요, 도구이다. 그리고 “새 창조”에 대한 희망 속에서 이 세상과 창조세계 역시 “생명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미리 맛봄이요, 징표요, 도구이다. 교회와 세상의 존재이유는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와 창조세계에 대한 통치와 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구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데 있다.
2)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표지: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에서 교회는 공교회(ecclesia catholica)로서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될 하나 됨과 거룩함과 보편성을 희망하는 가운데, 그것을 역사의 지평 속에서 구현시켜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생명공동체인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봄과 그 징표요 도구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한, 교회는 공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인류와 창조세계 모두를 아우르는 전 생명공동체 안에서 공적 책임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사도적 복음을 바르게 설교하고 성례전(세례와 성만찬)을 바르게 집례 해야 하는 교회가 바른 교회이고, 교회는 이 설교와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축하하고, 선포하며, 증거 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생명공동체인 교회의 표지(4+2)는 하나님 나라 구현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추구해야 한다.
3) ‘이미’와 ‘아직 아님’ 사이에 자리 매김한 교회: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사에 실존하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면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할 때까지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사도적 직무(the apostolate)를 수행해야 한다. 사도적인 직무란 설교, 세례와 성만찬, 코이노니아, 교육, 사회봉사, 복음전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의 보전, 그리고 교회의 일치추구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공동체인 교회의 사도직 수행은 교회 내의 책임수행뿐만 아니라 일치와 연합을 추구하고,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보전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공교회의 공적 책임 수행이다.
4)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본질적 기능: 교회는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아야 하고, 기독교 교육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교육해야 하며, 사회봉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해야 하고,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선교와 JPIC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널리 증거하고 구현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교회 안과 밖에서의 교회의 공적 책임수행에 공적으로 참여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5) 하나님 나라와 모이는, 든든히 서가는, 그리고 파송 받는 교회: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이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교회(ekklesia)는 예배를 위해서 모이고, 세례와 성만찬과 기독교 교육과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든든히 세움을 받으며, 복음 전도와 하나님의 선교와 사회봉사를 위해서 세상 속으로 파송 받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장인 이 세상 속으로 파송 받아, 하나님 나라의 공적인 일들을 책임적으로 수행해야 할 생명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6) 하나님 나라와 교역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의 직제에는 일반 교역직(세례 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교역)과 특수 교역직(an ordained ministry)이 있다. 특수 교역직은 일반 교역직을 훈련시키고, 교육시키어 모든 공적 영역들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교역직은 구심력적 운동과 원심력적 운동의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일에 있어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7) 창조세계와 세상과 국가와 교회는 하나의 ‘생명공동체’: 창조세계와, 세상과, 국가와, 교회는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망 혹은 그물망 속에 있다. 이와 같은 관계망의 파괴는 인간과 세계와 창조세계를 생명이 아니라 죽음으로 몰아간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론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되고 약속된 종말론은 이와 같은 관계망 혹은 그물망의 근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류뿐만 아니라 창조세계 까지도 하나님께 화해케한 사건이요, 특히 그의 십자가는 종말론적인 죽음과 흑암의 권세에 대한 승리요, 그의 부활은 새 창조(개인의 완성으로서 영생, 역사의 완성으로서 하나님 나라, 창조세계의 완성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를 계시하고 약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하나님 나라야 말로 샬롬의 생명공동체로서, 이 땅위의 교회와 국가와 세상과 창조세계가 추구해야 할 희망의 나라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교회 공동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전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과 국가와는 질적으로 다른 ‘대조사회’(a contrast society)요 ‘대안 공동체’(a alternative community)이다. 따라서 교회와 세상(+국가)은 질적으로 달라야 하고, 구별되어야 한다. 하지만 창조세계와 세상과 국가는 결코 흑암의 권세나 사단마귀의 도구와 같은 그 무엇이 아니다. 하지만 국가가 교회를 박해하든가, 헌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실정법을 어겨, 백성을 억압하든가(교회는 국가의 법을 끊임없이 개정해 나가야 하지만), 직무유기를 하여 백성에 대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경우 등에 있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 나라의 이름으로 이와 같은 정부에 대하여 항의하고 항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국가와 정부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을 때에 우리는 그것이 교회와 뗄 수 없는 생명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하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적이고 예언자적이며 왕적인 직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화해를 선포하고 화해된 공동체로서 공적 차원에서 화해를 위하여 힘써야 하고, 미래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이에 비추어서 우리의 현 시대를 예언자적으로 비판해야 하고, 모든 공적인 영역들에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4. 포스트모더니즘과 시장경제의 지구화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비추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지구화의 21세기 상황에서 이 세상을 예언자적으로 해석하고,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이 세상을 새롭게 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선교가 인류의 보편사와 창조세계 속에서도 진행되고 있다고 믿는 한, 교회는 이 세상이 주는 메시지를 깨달아 알아야 하고, 나아가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징표들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분명히 하면서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 보전에 관한 한, 타 종교들과 엔지오(NGO)등 비기독교 단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우려야 하고, 이들과 연대하여 하나님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5. 공공신학(a public theology)의 목적과 기능
모든 교회들의 다양한 신학들은 통일성과 코이노니아를 추구하면서 샬롬의 생명공동체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신학의 목적과 기능은 교회와 세상으로 하여금 샬롬의 생명공동체를 추구하게 하고, 그와 같은 추구를 반성케 하며, 그와 같은 추구를 다시 준비시키는 것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신학은 교회의 일들만을 위해서 기능(機能)하는 것(칼 바르트)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그리고 구현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능한다. 몰트만은 이렇게 말한다.
"신학은 또한 하나님 나라의 기능으로서 사회 안에 있는 삶의 정치적, 문화적, 교육적, 경제적 및 생태학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정치신학과 문화신학, 생태신학과 자연의 신학에서 보여 질 수 있다. 이 모든 영역들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사회의 공적인 일들(res publica)에 참여하는 공적인 신학(public theology)이다. 바로 이 신학은 공적인 일들을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시각에서 보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그리고 예언자적으로 참여한다." 1)
그리하여 몰트만은 “모든 삶의 영역들을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로 정위시키고, 나아가서 이 모든 영역들을 이 하나님 나라에 상응하도록 변혁시킬 것”2)을 강조한다. 그래서 몰트만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여건들 속에서 “모든 삶의 영역들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義)에 모순되는 조건들도 포함하고, 그것에 상응하는 조건들도 포함 한다.”3) 몰트만은 하나님 나라에 상응하여 변혁되어야 할 “공적인 영역”(public sphere)의 초점을 “한 주어진 사회의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및 약한 자들”에 두면서, “유치원들, 학교들, 종합대학들, 신문들, TV, 교육기관들과 서비스 기관들”의 변혁도 언급하였다. 그런 즉, 몰트만에게 있어서 공적 신학의 궁극적인 표준은 하나님 나라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리고 몰트만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은 역사 차원의 생명과 우주 차원의 생명 모두를 아우른다.
따라서 공공신학의 목적과 기능은 말씀의 삼중성과 화해의 복음을 표준으로 교회의 말과 행동을 반성하고 그것이 그것 되도록 하기 위한 것(칼 바르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의 창조세계와 세상과 국가에 대한 공적 책임수행을 반성하고 그것이 그것 되게 하는 신학인 것이다. 그래서 본 이정표는 칼 바르트가 말하는 신학의 교회적 기능과 목적에서 한 걸음 더 나간 몰트만의 공공 영역에서의 신학의 기능과 목적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입장은 시카고학파(코프만, 팔리, 오던, 거스탑슨, 트레이시 등)4)가 추구하는바 19세기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을 어느 정도로 수용하는 변증적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와 공공의 영역을 연결시켜주는 “공동도덕”5)을 인정할 경우에도 예언자 전통과 산상수훈과 사도적인 훈령들의 계시성과 탁월성을 선행시키는 입장이다.
하지만 후기 바르트의 경우, “신앙의 유추”를 선행시키는 “존재의 유추”를 허용하고, 그의 화해론이 화해된 공동체(교회)의 화해사역을 공공의 차원에서 수행할 것을 요청하며, 신예일대학파의 내러티브 신학 역시 내러티브의 특수한 신앙내용을 안경(칼뱅)으로 하는 인류 보편사 혹은 공공의 영역들의 이야기를 읽어내고 해석하기 때문에 이들 역시 공공신학의 차원을 나름대로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내러티브 신학에서, 예컨대 출애굽 사건과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그것의 완성을 지향하는 희년에 대한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이를 안경으로 하여 보편사 속에서의 출애굽과 희년의 징표들과 파편들과 도구들을 발견하게 하고, 그것들과 연대하여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끝으로 역시 내러티브 신학자인 티먼(Ronald Thiemann)은 “공공신학을 구축하기 : 다원문화 속에서의 교회”에서 교회 밖을 향하여 열려 있는 교회를 언급함으로써, 교회가 교회다울 때에 사회를 변혁시킨다고 하는 입장을 제시하였고, 캠벨(Charles Campbell)도 이와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분리주의 입장에서는 하이워와쓰(Stanely Hauerwas)와 한스 요더(Hans Yoder) 역시 교회가 교회다울 때에 공공의 영역과 접촉되어 있는 그 하부구조의 변혁이 가능하다고 하는 입장을 말하고 있는데,1) 우리 ‘이 스페스’(e-Space) 역시 교회의 정체성을 이들의 주장만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도, 이들의 입장들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공교회가 자기 울타리를 넘어서서 역사와 창조세계를 통치하시고 새 하늘과 새 창조를 가져오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 있고 동참해야 한다고 하는 입장을 추구할 것이다.
1) Ibid., Juergen Moltmann, "Theology for Christ's Church and the Kingdom of God in Modern Society", in A Passion for God's Reign, ed. by Moroslav Volf(Grand Rapids, Michigan : Eerdmans, 1998), pp. 51-52.
2) Ibid., p. 54.
3) Ibid., p. 54.
4) 노영상, “교회와 신학에 대한 공공성에 대한 연구: 공공신학의 이해와 수용에 대하여”, 발표된 소논문(미간행물), p. 1.
5) Ibid., p. 5.
6) Ibid., pp. 6-7.
이형기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아폴로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