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생은 모름과 앎으로 둘러싸여 있다. 모름의 영역이 더 클까? 앎의 영역이 더 클까? 앎과 모름의 생리를 알고 있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모름의 영역이 더 크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앎과 모름은 평면적 땅따먹기의 관계가 아니라 알면알수록 모름도 늘어가는 이중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앎과 모름의 생리를 차치하고서라도 솔직하게 말해보자. 나는 삶을 알고 사는가? 아니면 모르면서도 그냥 살고 있는가? 어떤 신학자는 무지의 지를 말했다. 내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는 말이다. 하지만 심지어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모르는지조차도 모를 때가 많지 않는가?
연세대 종교철학 주임 정재현 교수의 신간 『인생의 마지막 질문』(추수밭)은 '앎'에 대한 강박 때문에 '모름'을 줄이고 없애며 '앎'을 늘려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달려온 우리 인생에 있어서 '모름'을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모름'이야말로 지혜의 원천이라는 가치 전복적 사고를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앎'에 대한 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도모하는 기획이 오롯이 담겨있다.
알면알수록 모름이 늘어나는 '앎'과 '모름'의 이중관계는 결과적으로 삶에서 모름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삶에서 '모름'을 떼어놓을 수 없다면 '모름'과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가 필요함을 웅변해주기까지 한다.
"지혜는 '앎'이라기 보다는 모름이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일에서 나아가 얼마나 모르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박학다식이 지혜를 주지는 않는다. 박학다식은 사실상 지식의 기억이다. 지식이 기억을 필요로 하는 것과 달리 지혜는 오히려 망각에 의해 촉발되기도 한다."(본문 중에서)
지식은 축적된 정보를 기반으로 하기에 기억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은 반면 지혜는 단순한 '앎'의 축적에서 산출되는 산술적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모름'으로 둘러싸인 '삶'의 도상에서 어떤 사건과의 우연한 마주침에서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지식이 '앎'의 습득이라면 지혜는 '삶'의 체험인 것이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인 제4장 '기도의 얼'에서는 종교철학자답게 저자의 기도에 대한 독창적 해설이 돋보인다. 이미 제목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기도의 얼이란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 자기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항상 자기에게 그 의지가 관철되는 일방성을 띠고 있지는 않았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저자는 궁극적으로 신을 자기 의지에 가두지 말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에 갇힌 신은 이미 신이 아니며 그것은 인간 자기자신의 믿음일 뿐이고 결국 인간 자신을 우상으로 삼는 우상숭배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의 믿음을 역전시키는 행동을 가능케 하는 것,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긴 예수의 성상을 밟는 불경건한 행동이 오히려 신의 뜻이 될 수 있음까지 수용하는 것. 신에 대한 무지를 고백하는 것, 형상화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신에게로 자신을 놓아버리는 것(거꾸로 새긴다면 형상화된 신을 놓아버리는 것) 등의 통찰을 새길 수 있는 장이다.
저자는 특히 나우웬의 '기도는 하느님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많은 종교인들이 기도를 하되 실용성의 이념에 사로잡혀 있는 점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실용성을 거부하는 듯한 나우웬의 기도의 가르침을 키에르케고르의 '믿음은 객관적 불확실성에 대한 내면적 결단'이라는 명제에 잇대어 흥미로운 분석도 전개한다.
나우웬과 키에르케고르를 관통하는 키워드 역시 모름, 즉 불확실성으로 꼽은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불확실성과 마주하는 우리 삶의 마땅한 꼴"이라고 했으며 "불확실성은 제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무용한 시간을 가치 있게 해주는 삶의 깊이이니 결국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기도로 바뀌는 것이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미리 예상한 저자는 그런 물음이야말로 "여전히 실용주의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라며 "확실하다고 규정하는 것이 대부분 거짓인 것은 내가 만든 것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라고 일침을 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