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낙태문제가 생명문제로 비화되어 논란이 뜨겁다. 가톨릭이나 개신교회나 할 것 없이 낙태문제는 곧잘 태아의 생명권 담론으로 이어지고 있고 대항담론으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등장해 힘겨루기를 하는 모양새다. 이 와중에 기독교 쪽에서 낙태문제를 추상적인 생명 이슈 보다 현실적인 섹스문제로 살펴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얼마 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좋은나무'에 '낙태, 허락된 생명과 허락된 사랑 사이의 난제: 첫 번째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양혜원 교수(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는 낙태 이슈가 생명 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것에 현실 적합성이 떨어진다며 낙태 이슈의 본질을 섹스로 봐야 한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낙태에 대한 한국 기독교인의 태도는 일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어느 교회 장로님의 딸이 연애를 통해 혼외 임신을 했다고 하자. 이때, 생명 입장에 충실하게 낙태를 시키지 않고 공개적으로 싱글맘으로 낳아 기르게 해주고, 그것을 신앙 양심에 따른 선택으로 여길 확률이 얼마나 될까. 배운 바가 있어서 '낙태는 살인입니다'라고 말은 해도, 그 일이 자기 딸에게 일어나면 일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역시 이야기는 정치나 윤리나 당위가 아닌 현실에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본문 중)
양 교수는 그 여성의 현실을 섹스의 문제로 봤다. 그는 "임신도 낙태도 모두 결혼한 여성의 특권이 되는 상황은, 우리가 낙태를 생각할 때 섹스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어떤 여자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은밀하게 이 여자의 임신은 누구와의 섹스의 결과이고, 이 여자는 임신으로 이어지는 섹스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한다.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는 심리의 메커니즘이다"라고 했다.
"낙태이슈, 기독교 쪽에서 섹스문제 너무 무시해"
양 교수는 이어 "기독교인이 낙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생명 입장부터 제시하며 들어가지 않고 이처럼 섹스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낙태는 사실 생명 문제만큼이나 섹스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라며 "그 부분에서 페미니즘의 관찰은 정확하다. 하지만, 페미니즘 진영이 지나치게 섹스 문제로 낙태 이슈를 끌고 간다면, 기독교 쪽에서는 섹스 문제를 너무 무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래서 그 두 진영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현재와 같은 법의 공백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성문화를 잘 보여주는 박완서의 단편 「그 가을의 사흘 동안」(1980)을 인용해 "페미니스트 관점에서는, 이 소설의 궁극적 메시지를 가부장제의 억압으로 해석하고 낙태 행위를 옹호하는 기반으로 삼는데, 나는 좀 다르게 본다"며 "혼외 임신을 비난하는 사회에 맞서기 위해서 낙태 행위를 옹호하는 것은, 결국 계속해서 혼외 임신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 뿐이다"라고 했다.
또 "그 비난에 맞서기 위해서 당당하게 임신한 배를 내밀고 다니는 여자들이 많아지는 게 오히려 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까? 그러면 여자가 알아서 낙태를 해주어서 홀가분했던 남자들이 제법 당황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 가려졌던 남자들의 역할이 비로소 수면 위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기로 남자 없이 임신이 된 경우는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양 교수는 마지막으로 "하지만 섹스 이야기 없이 추상적인 생명 논의만 되풀이하는 낙태 논쟁은 육체 없는 영혼의 논쟁에 머물고 만다. 임신이 얼마나 육체적인 사건인가를 생각하면 매우 이상한 일이다"라며 "이제는 좀 더 뼈와 살의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하는 이유이다"라며 글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