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TV+에서 방영 중인 <파친코>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이 작품은 2017년에 발표된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동명의 장편소설을 드라마로 제작한 것이다.
원작을 그대로 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드라마 <파친코>에 이삭, 노아, 솔로몬 등 등장인물의 이름을 비롯해 중요 장면에 종교적 요소가 스며들어 있다는 분석이 있어서인지 이 작품을 두고 벌써부터 "<파친코>에 숨겨진 기독교 코드" "나라 위기 속 기독교 역할 제대로 드러낸 드라마" 등의 반응이 나오고 있다.
드라마 속 주인공 선자가 당대 사회에서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아야 하는 미혼모로 전락할 위기에서 폐질환이 있던 병약한 전도사 이삭을 만나 결혼해 그가 믿고 있던 종교인 기독교에 귀의함으로써 소위, 사회로부터 구원 받는 장면은 이런 반응을 부추기고 있는 하이라이트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적 요소는 드라마 속 주인공에게는 삶을 구성하는 재료일 뿐 삶을 떠나 그 자체로 특별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이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작가가 소설 <파친코>에서 애착을 갖고 있는 첫 문장 "역사는 우리를 실망시켰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말 뜻은 그것이 역사가 되었건 종교가 되었건 특별한 그 무엇이 삶 속에 내동댕이 쳐진 나를 실망시키더라도 그래도 삶은 살아진다는 것을 가리킨다. 삶에 대한 범인들의 평범한 애착을 응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어떠한 삶의 부조리도 살아지는 나를 막을 수는 없기에 상관없는 것이다.
이처럼 특정 종교의 관점에서가 아닌 삶의 지평에서 바라보면 실제로 선자를 구원한 것은 선자나 선자 엄마가 믿었던 신이 아니라 선자 자신 또는 선자 엄마 자기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살았음에도 결과로서 세 아이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맞이했던 선자 엄마는 절망 속에 신음하며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깊은 산 속 무당집을 찾아가 속사정을 털어놓고는 조상신 앞에 절박한 심정으로 두손으로 빌고 또 빌며 간절하게 기도를 올린다. 이내 대를 이을 것이라는 자기 믿음이 "아이를 임신할 것이다"라는 응답으로 나타난다.
선자 엄마는 또 미혼모로 낙인찍혀 사회적으로 매장될 위기에 처한 선자가 지하 교회에서 하객 없는 결혼식을 올릴 당시 선자가 죄사함을 받고 주님을 믿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을 때 자기의 분신이자 자기 확장인 선자의 손을 놓아주며 무속으로부터의 단절을 선언하고 새로운 종교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을 암시한다. 주님이 딸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자기 믿음 때문이다.
<파친코>의 선자 엄마에게서 나타난 이러한 종교관은 인간의 원초적 종교성과 맞닿는다.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미래 속에서 자기 생존과 안정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이 찾는 삶의 한 방편으로서 기능하는 종교 말이다. 삶의 맥락에 따라서 그 모양은 무속으로 또 기독교로 달라졌지만 관통하는 흐름은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삶의 안정성 추구요. 삶의 연장이요. 생존이었다.
이는 무속 신앙의 모양으로 새로운 종교를 믿게 된 선자나 선자 엄마를 나무라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이들이 조금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마치 무속 신앙을 하듯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무속적인 기복신앙이 문제인 것은 이러한 종교적 이기주의에 자기 정당성을 부여하는 한편 이를 부추기면서 종교 장사를 하는 까닭이다. 장사가 더 잘 되어야 하기 때문에 어떠한 반성과 성찰도 불신앙으로 몰아 붙이며 맹목적인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원초적 종교성 자체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삶에서 안정성을 추구하는 자기 보존 본능 자체는 가치 판단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적 이기주의에 신앙을 국한시키거나 자기 정당성을 부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기 믿음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해 자기 안에 갇혀 자기 안에서 멤도는 자아도취적 우상숭배를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믿음에서 자기로부터의 탈출은 불가능하다.
신앙은 관계라고 하는데 절대자와의 관계 없이 그저 자기 좋은대로 자기가 믿고 싶은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은 원초적인 종교성에 머물러 있다고 밖에 볼수 없기에 그저 자기 믿음을, 자기를 믿고 있을지언정 절대자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었다거나 조우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면에서 <파친코>는 오히려 인간의 원초적 종교성에 해당하는 자기 보존 욕구 충족이라는 종교의 기능적 한계를 선언하면서 그것을 넘어설 가능성이 종교 안에 있는지를 묻게 하는 문제작으로 읽어야 마땅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