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에서 '말'은 중요하다. 성경에서 신은 인간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 그 자신을 드러내신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였고, 복음서에서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타종교에서도 말은 중요하다. 고등종교들에는 경전이 확립되어 있고, 경전의 해석과 실천이 신앙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는 '말이 곧 하나님'(요1:1)이라고 한다. 이 부분이 타종교와의 결정적 차이다.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형성하는가? 양명수 교수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논문에서 그 뜻을 밝히는 작업을 했다.
양명수 교수는 성서의 '태초'에 대한 기록에 주목한다. 성경에 태초에 관한 기록은 창세기 1장과 요한복음 1장인데, 두 군데 모두에서 '말'이 강조되어 있다. 이 가운데 창세기는 하나님이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보도한다. 양 교수는 여기서 '태초'에 천착한다. 그에 따르면 이 태초는 시간적인 과거가 아니라, 원래의 것이다. '말'과 '태초'와 '원래의 것'을 양 교수는 '폭력성'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낸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는 바빌로니아의 에누마 엘리시 창조 이야기가 전하는 세계관에 전면 맞서는 이야기라고 양명수 교수는 전한다. 바빌로니아 창조 이야기의 기원에는 폭력과 싸움이 있다. 신들의 우주적인 전쟁이 마르둑의 승리로 끝났는데, 패배한 신의 시체 조각들을 물질로 하여 이 세상이 생겨났다. 이와 같은 세계관에서는 어떤 새로운 것이 창조될 때 폭력이 필요하다.
이에 반해 성서가 전하는 창조에는 폭력성이 없다. 창세기는 '말씀으로 창조했다'고 보도한다. 양명수 교수는 "(그리스도교에서의) 창조란 언제나 사랑과 힘의 긴장 관계에서 이루어"짐을 밝히는데, 여기에서의 힘은 폭력적인 힘이 아니다. 그것은 말씀, 즉 말의 힘이다. 말의 힘으로 창조된 세계에는 폭력성이 없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 가운데서 성경은, 세계의 기원에는 폭력성이 없음을 정면으로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창조에는 싸움이, 폭력이, 악이 없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인간들만의 역사의 시작을 보도하는 창세기 4장은, 폭력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이야기로 인간사 이야기가 시작된다. 폭력적 힘이 없는 '말씀의 힘'으로 창조된 창세기 1장 이야기에서, 형제들 사이의 폭력 이야기로 화제가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사가 폭력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것은, 인간 안의 뿌리 깊은 폭력성을 꿰뚫어 본 것이다. 폭력 없는 창조의 이야기와 폭력으로 시작된 인간사 이야기의 대비 가운데, 우리는 폭력적인 인간사가 '원래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양명수 교수는 "사회적 관습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 원래 이 세상에는 폭력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성서의 얘기다"라고 밝힌다.
우리의 언어에도 인간 안의 폭력성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있음을 양명수 교수는 소개한다. 우리 말에서 '말로 하라'는 말은 폭력을 쓰지 말라는 것을 함의한다. 여기서 '말'과 '폭력'은 대비된다. 한편 자신을 가리키는 한자 아(我)는 손(手,수)이 창(戈,과)을 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후손으로서 원초적으로 폭력성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폭력적인 사회를 만들고, 폭력적인 사회는 다시 인간을 폭력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인간 세상 가운데 이같은 폭력은 원래적인 것이 아니고, 또 인간의 기원이 폭력적인 것에 있지도 않음을 창세기 창조 기사는 전한다. "폭력은 칸트의 근본악처럼 뿌리 깊지만 세상이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닌" 것이다.
폭력성을 안고 있는 인간이 향해야 할 곳은 창세기 1장이 전하는 '말씀으로 창조된' '원래'의 창조의 세계이다. 이 '원래'가 '태초'다. 따라서 태초는 시간적인 과거를 말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태초는) 미래의 희망을 찾기 위한 근거"라고 양명수 교수는 밝힌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곳은 창세기 1장이 전하는 태초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아까 '폭력의 힘'과 대비되었던 '말의 힘'은 어떤 것일까? 양명수 교수는 그리스 언어에 '생산'을 '말'로 생각한 흔적이 나타난다고 밝힌다. 그리스어에서 '포이에시스'(poiesis)는 생산인데, 이것은 오늘날 '시'(poem, 詩)를 뜻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분명 그 말에는 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도 인간이 말로 만드는 세상이 있다. 인간이 물론 손으로 건물과 용품과 같은 것들을 만들긴 하지만, 말로 만드는 세상도 있다. "자연과학 언어는 사물 이후지만, 시 언어로 대표되는 상징 언어는 사물 이전에 사물을 만들어내는 언어다." 가깝고 쉬운 예로 우리는 인간의 말이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고 이끄는 것을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한다. 전쟁 후 폐허가 된 나라에서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말했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만약 전쟁 후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더 나은 사회'가 아닌 '외국 원조를 더 많이 받는 사회'를 목적으로 한 구호가 만들어졌다면 국가발전은 다른 노선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이같이 인간의 말에도 힘이 있다. 하물며 신의 말에 있는 힘이랴. 신의 말에 있는 힘을 서술하기에는 필자의 능력이 부족하기에, 인간의 말에 있는 힘을 말함으로 그것을 대신하며 글을 맺는다.
*논문 원본에서 그대로 가져온 문장은 따옴표(")로 처리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