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부활주일 설교] 디베랴 해변에서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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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40:9-11, 로마서 6:5-9, 요한복음 21:1-14

설교문

요한복음 20장의 마지막 두 구절을 읽고 나면 요한복음이 여기서 끝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0-31절) 얼마나 훌륭한 마무리입니까?

그런데 마지막인 줄 알았던 그때 아직 한 가지 이야기가 더 나옵니다. 이건 마치 연극이 끝나고 막이 내려오는데 갑자가 한 배우가 무대 앞으로 뛰어나와 좀 전에 본 연극에 무언가 첨가하여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학자들 대부분은 요한복음 21장이 원저자가 아니라 이후의 편집자(editor)에 의해 추가된 결말(epilogue)로 봅니다. 왜 에필로그가 더해졌을까요?

아마도 편집자는 독자들이 요한복음 맨 처음부터 보고 들은 모든 것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우려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더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추가합니다. 이 편집자가 누구인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이건 간에 에필로그를 세심히 읽어보면 그는 요한의 복음서를 충분히 읽고 소화했으며 전체적인 이야기의 주제와 관점을 잘 알고 이를 반복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에필로그 이야기는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 제자들을 생선과 빵으로 먹이신 이야기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는 도마 그리고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 등 모두 일곱 명의 제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고 나서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으나 그날 밤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밝아 올 무렵,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 계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또다시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기를 좀 잡았느냐?' 물으시자 그들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대로 했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가 깨닫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 하고 말하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그 말에 즉시 겉옷을 두르고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역시 성질 급하고 과단성 있는 베드로입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배를 저어 육지로 나왔습니다.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고 빵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손수 차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 잡아 온 고기를 좀 가져오너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끌어올려 놓고 보니 큼직한 고기가 153마리나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야 제자들은 그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았고 때문에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빵을 집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시고 생선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에필로그를 쓴 사람은 이 일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부활하신 예수께서 해변에 나타나 그들을 부르실 때 제자 중 어느 누구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요한복음 바로 앞장에서 마리아가 빈 무덤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처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동산지기로 착각했다는 이야기(요한 20:15)를 기억하게 됩니다. '자, 그건 마리아의 문제야. 너무 슬퍼서 분간을 못했을 거야'라고 우리가 서둘러 결론지으려 할 때 에필로그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다른 일도 기억하게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증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 문을 완전히 걸어 잠그고 꼭꼭 숨어 있었는데 홀연히 그 집 안으로 들어온 예수께서 평화의 인사를 했을 때에도(요한 20:19-23), 또 이날로부터 여드레를 지나 '의심 많은 도마'에게 다시 나타났을 때에도(20:24-29)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요한은 기록했습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그분의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 기이한 이야기들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저 유명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이 그들과 친히 동행하셨으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분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고 전합니다.(누가 24:15-16) 요한과 누가가 이렇게 공통적으로 다른 사람들도 아닌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요한복음 에필로그 편집자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다시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을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독자들이 요한의 복음서를 다 읽고 '나는 마리아나 다른 제자들처럼 그렇게 둔감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요한의 드라마를 떠나려는 순간, 에필로그 편집자는 그렇게 장담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막달라 마리아나 다른 제자들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요한복음의 에필로그는 우리에게 또 한 가지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어떤 생각이 났습니까?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아침식사에 초대하시고 떡과 생선으로 그들을 먹이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요한복음 6장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기적을 떠올리게 됩니다.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자 "예수께서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셨다]"(요한 6:11) 했습니다. 예수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빵을 집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시고 생선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편집자는 굶주린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언제나 하늘의 풍성한 음식으로 배불리 먹이셨던 주님의 부지런한 손과 발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풍성한 자비는 다 지나간 옛이야기이지 현재는 아니라고 그릇된 판단을 내릴 때 편집자는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쉬지 않고 우리를 돌보시고 축복하시고 먹이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디베랴 해변의 이 이른 아침식사 이야기는 마태(26:26-30)와 마가(14:22-26)와 누가(22:14-20)에 나오는 그 최후의 만찬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제자들과 함께했던 마지막 식사가 결코 아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한 6:51)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지금 이 순간도 지치고 굶주린 사람들을 사랑과 은총의 식탁에 초대하셔서 친히 먹이시고 돌보시고 감싸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올해 사순절 기간에 <디트리히 본회퍼 40일 묵상>을 온 교인이 함께 읽으며 수난의 깊은 의미를 묵상한 건 참으로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부활절 예배의 공동기도문으로 이 묵상집에 나오는 본푀허 목사의 옥중시를 함께 읽은 것도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1944년 7월 8일에 옥중에서 쓴 "그리스도인과 이방인"이라는 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나아가서 / 그분의 도움을 간청하며 행복과 빵을 달라고, / 질병과 죄, 죽음에서 구원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 그리스도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들 그렇게 하지요. // 사람들은 고난당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 거할 곳도 먹을 빵도 없이 / 가난과 멸시 속에 있는 그분을 발견하며, / 죄와 연약함, 죽음에 삼킨 바 된 그분을 바라봅니다. / 그리스도인은 고통당하는 그분 곁에 머물지요. // 하나님은 고난 속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찾아가시어, / 그분의 빵으로 육체와 영혼을 배불리 먹이시며, / 그리스도인과 이방인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십니다. / 그리고 그들 모두를 용서하시지요."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사람은 누구나 신에게 가서 빵과 행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에게 나아가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고난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을 찾아가 자신의 몸으로 육체와 영혼을 배불리 먹이시고 돌보시고 구원하신다 했습니다. 이 옥중시에 나오는 하나님이 바로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의 에필로그 편집자가 힘주어 다시 말하려는 게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부활은 단순히 하나의 절기(season)가 아닙니다. 일년에 한 번 오는 특별한 날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 이곳에서 우리가 계속 경험하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은혜 그리고 보살핌이라는 현실(reality)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믿고 웃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고진하 목사의 기도시 <부활하는 소>를 읽어봅니다. 농사짓는 순박한 농부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지요.

"이런 얘기하면 웃겠지만 / 웃을 테면 웃으라죠 / 킥킥대며 비웃어도 좋아요 // 금년 사월 어느 날이었어요 / 일요일이라 공동예배를 다녀오니 / 글쎄 우리집 소가 / 아침에 쒀주고 간 / 쇠죽을 먹지 않고 누워 있었어요 / 설악장으로 쟁기를 고치러 간 영감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 내일은 널미재 중턱에 있는 논을 갈기로 했는데 / 누워 있는 소 코뚜레 밑을 자세히 살펴보니 / 허연 거품을 죽죽 흘리고 / 아마도 단단히 탈난 게 분명했어요 / 설악에 가면 수의원이 있단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 터무니없이 돈 받아 먹는다 하니 / 봄철 양식 팔아 쇠병 고칠 수는 없는 노릇이요 / 에라! 이놈도 / 우리 하느님 지으신 생명인데 / 우리집 큰 일 도맡아 하는 한식군데 / 전지전능한 하느님께 기도하면 / 우리 하느님 쇠병 따위 못 고치실까 싶어 / 가만히 다가가서 누워 있는 소의 두 뿔을 잡았지요 / 뿔을 잡아도 / 소는 그냥 얌전히 누워 있었어요 /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죠 생명의 근원이신 / 하느님! / 우리 농사 큰 일꾼인 이 순하고 착한 생명 / 어여삐 어여삐 여기셔서 / 병 낫게 해달라고 / 죽 잘 먹고 내일 쟁기 끌게 해달라고 / 떼를 쓰듯 간곡히 기도했조 / 아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죠 / 바로 그날 저녁 때 / 퍼드러져 누웠던 소가 벌떡 일어나더니 / 여물통의 식은 죽을 퍽퍽 먹더라구요 / 물론 그 이튿날 널미재 논도 거뜬히 갈아치우구요 / 정말 정말 감사했어요 / 사람들이 우습게 여기는 짐승의 생명조차 / 돌보시는 하느님의 은혜! / 그 후론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도 / 하느님이 돌보심을 믿게 됐지요 // 역시 웃으시는군요 / 하긴 우리 교회 목사님도 / 처음엔 날 이상한 눈으로 보시더라구요 / 허허...... 웃으시면서 말이죠 / 웃을 테면 웃으라죠"

요한복음 21장은 요한이 아닌 누군가가 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누가 누구인진 모르겠습니다. 원본에 가필을 했다고 뭐라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지닌 생명력이 약해지는 건 아닙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 일곱 제자를 먹이시고 이후에 특별히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당부하신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이야기를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먼 옛날 이야기로 여기지 말라는 극적인 호소입니다. 드라마가 다 끝나고 무대가 내려올 때 에필로그 편집자가 갑자기 튀어 나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요한의 이야기는 막이 내렸는지 모르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와 돌보심의 이야기는 살아있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고 먹이시고 능력 주신다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그렇게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고 섬기신 주님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주님은 살아계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아계신 주'입니다. 찬송가 171장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습니다]. 내 모든 죄 사하시려고 십자가 지셨으나 다시 사셨[습니다].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이 되시니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합니다]." 이 노래를 찬양대와 함께 즐겁게, 소리 높여 부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음악예배입니다. 부활의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이 다 알아듣게 힘차게 부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주님께서 정말로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를 따라 다시 살 것입니다. Happy E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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