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화목제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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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출애굽기 20:22-24, 로마서 5:8-11, 요한복음 6:35

설교문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했는데, 정말 민족 최대의 명절은 추석인 것 같습니다. 오늘 부른 찬송대로,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시니] 여기가 우리의 낙원"(559장, 3절)입니다. 식구(食口)란 '한집에 같이 살면서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한국인들은 가족(家族)이라는 말보다 이 말에 더욱 친근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번 명절에 우리 식구는 한 상에 둘러앉아 무얼 먹고 마셨나요? 이문재 시인의 <식탁은 지구다>를 읽어봅니다. "중국서 자란 고추 / 미국 농부가 키운 콩 / 이란 땅에서 영근 석류 / 포르투갈에서 선적한 토마토 / 적도를 날아온 호주산 쇠고기 / 식탁은 지구다 // 어머니 아버지 / 아직 젊으셨을 때 / 고추며 콩 / 석류와 토마토 / 모두 어디에서 나는 줄 알고 있었다 / 닭과 돼지도 앞마당서 잡았다 / 삼십여 년 전 / 우리 집 둥근 밥상은 / 우리 마을이었다 // 이 음식 어디서 오셨는가 / 식탁 위에 문명의 전부가 올라오는 지금 / 나는 식구들과 기도 올리지 못한다 / 이 먹을거리들 / 누가 어디서 어떻게 키웠는지 /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 누가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 / 도무지 알 수 없기 탓이다..."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차린 밥상은 생명의 밥상이었습니다. 그 들이 먹었던 음식은 텃밭을 만들고, 물을 주고, 흙을 북돋워 싱싱하게 잘 자라게 한, 온전하고도 완전한 음식이었습니다. 그 밥상에는 트랜스 지방도 없었고, 환경호르몬으로부터도 자유로웠으며, 각종 항생제와 성장 호르몬이 범벅 된 사료만 먹고 자란 동물로부터도 자유로웠습니다. 그래서 그 밥상은 하나님의 신비한 창조의 섭리를 맛보고 음미하며 감사하는 은총의 식탁이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영어에도 "You are what you eat"이라 했습니다. "철없이 먹으면 철이 없어지고 / 제철 먹을거리를 먹으면 싱싱해지[니]... 먹는 게 바로 그 사람"(장영란)입니다. 사람은 또 누구와 함께 먹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혼자 먹으면 혼자가 되고 / 여럿이 나누어 먹으면 더불어 사니 / 먹는 게 바로 그 사람"(장영란)입니다. 이번 명절, 교우 여러분은 무엇을 드셨습니까? 누구와 드셨습니까? 그 음식은 에덴의 밥상이었습니까? 그 식사는 기쁘고 즐겁고 사랑이 넘치는 화목한 자리였습니까?

성서에는 화목제(和睦祭)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공동식사 전통 중 하나입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에는 모두 세 가지의 공동식사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출애굽 이전의 '유목민 식사'이고, 둘째는 출애굽 당시의 '유월절 식사'이며, 마지막으로는 출애굽 이후의 '시내산 계약식사'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히브리어로 '제바흐'(zebhah), 즉 화목제와 연관돼 있습니다. 화목제란 희생제물 전체를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燔祭)와 달리, 동물의 지방 부분만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린 후 나머지는 가족 혹은 공동체의 식사를 위해 내어주는 제사입니다. 화목제의 기본 목적은 친교입니다. 하나는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친교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친교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한 이후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으로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출애굽기 20:12-14) 은으로나 금으로 만든 화려한 신상(神像)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건 겸허히 흙으로 제단을 쌓고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며 함께 둘러앉아 기쁘게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곳에 임하여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신명기 27:7) 했습니다. 이번 명절, 우리의 식사는, 우리 가족의 공동식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화목제였습니까? 아니면 홀로 먹는 눈물의 식탁이었습니까? 혼자는 아니어도, 오히려 미움만 쌓인 밥상이었습니까?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매우 놀라운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구약성서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화목제를 드리라고 했다면, 신약성서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 화목제의 제물이 되어 우리의 밥상에 오르신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복음 6:33) 이런 예수를 신약성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보내신] 화목제물"(요한1서 4:10), 혹은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마서 3:25)이라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떤 사람의 책장에 읽지 않은 책이 한 권 있다고 합시다. 그가 그 책을 샀으나 책꽂이에 그냥 두고 있는 한 그 책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책은 아직 그의 외부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그 책을 내려서 읽었습니다. 그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책의 이야기가 너무도 감동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문장이 그의 기억에 영원히 남았습니다. 이제 그는 원하기만 하면 그 문장을 기억해낼 수 있고 그것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을 지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그 책은 그냥 책장 위에 꽂혀 있어 그의 외부에만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책은 그의 내면에 들어와 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하시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느니라]"(요한 6:56)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살을 먹고 자기의 피를 마시라 하셨을 때 그 뜻은 우리의 온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그의 생명으로 채우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흠뻑 젖어 영원한 생명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 6:35)

오늘 요한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료합니다. '너희가 주님의 식탁에 앉지 아니하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놀라게 됩니다.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관해 이야기하되 그것을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최후의 만찬 이야기로 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이 이야기를 갈릴리 푸른 바닷가 디베랴 건너편에 있는 한 산 위의 야외 식사(요한 6:1-15) 이후의 이야기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초대 교회 안에서는 성찬 예식을 너무도 중요시한 나머지 그 의미와 효력을 다분히 마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교회 안의 예식으로만 국한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요한은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모든 식사는 다 성찬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 1:3) 이것이 요한의 고백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다]"(골로새서 3:11)는 뜻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편재(遍在), 즉 두루 퍼져 있는 세계에서는 교회의 성찬대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서든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맛보려 모이는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계십니다.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요한1서 2:2)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정에, 이 세계 어디나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고 마실 때 그 밥상 위에 계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요한 6:54) 하십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 6:53) 하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죽어서 "생피로 쏟아 피운 / 한 그루 / 꽃나무"입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 김소엽 시인의 <꽃나무>입니다. "당신이 / 해맑게 웃으시면 / 나는 한 송이 / 꽃으로 핍니다 // 당신의 화안한 미소마다 / 꽃망울 맺히고 / 당신의 결 고운 눈매 / 닿는 자리마다 / 잎이 돋습니다 // 사랑은 / 마른나무에 꽃을 / 피우는 일 // 나는 당신이 죽어서 / 생피로 쏟아 피운 / 한 그루 / 꽃나무입니다"

이번 명절에 우리가 먹어야 할 떡은 송편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 "생명의 떡", "세상의 생명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우리의 한가위는 이 생명을 먹고 마시는 거룩한 화목제가 되어야 합니다.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하나님 앞에서]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고백할 수 있는 은총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로마서 5:11)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로마서 3:25),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토단(土壇)을 쌓고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신명기 27:7)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우리에게] 임하여 복을 주[실]"(출애굽기 20:14)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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