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가 손현보 목사의 설교에 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를 '참고'로 받기로 결의한 이후, 교단 안팎의 논쟁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는 보고서의 신학적 내용만이 아니라 박영돈 전 고려신학대학원 교수의 표현을 둘러싼 논란까지 겹쳤다.
박 전 교수는 총회 결의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총회의 판단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뇌가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이라는 표현이 문제가 됐다. 일부에서는 이를 총대들을 사실상 '무뇌아'로 취급한 모욕적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박 전 교수는 최근 다시 글을 올려 자신의 표현은 총대들의 지적 능력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오히려 총대들이 충분한 지적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기에 해당 사안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명만으로 논란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는다. 문제의 표현은 듣는 사람에게 충분히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회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것과 공회의 구성원들이 판단할 능력 자체를 의심하는 듯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표현의 문제만으로 박 전 교수가 제기한 본질적인 질문까지 덮어버리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불편하지만 두 질문을 동시에 붙드는 일이다. 박영돈 교수의 표현은 적절했는가. 그리고 그 표현 때문에 우리가 정작 논의해야 할 신학적 문제까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81 대 69, 고신 총회는 무엇을 결정했나
먼저 이번 논란의 사실관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장고신 제76회 총회는 지난 16일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손현보 목사 설교 네 편에 대한 총회 신학부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를 교단의 공식적인 신학적 판단으로 채택하지 않고 '참고'하기로 결정했다.
표결 결과는 찬성 281표, 반대 69표였다. 해당 보고서는 지난해 제75회 총회의 위임에 따라 약 1년간 연구된 것으로 알려졌다. 교수회는 손 목사의 설교 네 편을 분석한 뒤, 해당 설교가 고신총회가 채택한 신앙고백 문서의 설교 이해와 구조적으로 충돌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보고서는 특히 성경이 설교의 중심이라기보다 정치적 판단을 뒷받침하는 수단처럼 사용될 우려가 있으며, 설교의 목적 역시 회심과 성화보다 정치적 각성과 행동 촉구에 치우쳐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강단이 정치적 목적에 종속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권면했다.
그러나 총회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나왔다. 손현보 목사는 직접 총회 석상에 나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수천 편의 설교 가운데 네 편만을 분석해 자신의 전체 설교와 목회를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취지로 항변했다. 신사참배에 맞섰던 고신의 역사와 국가 권력에 맞선 교단의 전통 역시 언급했다. 결국 총회는 보고서를 폐기하거나 공식적으로 채택하는 대신 '참고'라는 제3의 선택을 했다. 바로 이 결정이 지금의 논란을 낳은 출발점이다.
'참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번 사안에서 중요한 것은 '참고'라는 결의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따져보는 일이다. 총회는 교수회의 연구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든 것은 아니다. 1년간 진행된 연구보고서를 참고자료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보고서를 고신총회 전체의 공식적인 신학적 판단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CBS 역시 이를 두고 "교단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하지 않은 것"이라고 보도했다. 따라서 이번 결의를 두고 한쪽에서는 신학대학원 교수회의 연구 권위를 사실상 무력화한 결정이라고 비판할 수 있고, 다른 쪽에서는 총회가 교수회의 연구를 존중하면서도 최종적인 판단 권한을 행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느 쪽 해석을 받아들이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번 결의가 손현보 목사의 설교에 대한 모든 신학적 논쟁을 종결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총회가 '참고'라고 결정함으로써 논쟁의 판단을 공식적으로 유보한 측면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상대방의 지적 능력을 문제 삼는 일이 아니라, 총회가 왜 교수회의 보고서를 공식 판단으로 채택하지 않았는지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일이다.
박영돈 전 교수의 문제 제기는 어디까지 유효한가
박영돈 전 교수의 문제 제기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박 전 교수는 총대들이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인데도 판단을 교수회에 떠넘겼다고 비판한다. 교수회의 연구 결과가 총회에 제출됐다면 총대들이 그 내용을 토대로 분명한 판단을 내려야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신학 교수와 총대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으며, 교회의 강단이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판단될 경우 신학자와 총대가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 박 전 교수의 비판은 단순히 '손현보 목사를 징계해야 한다'는 차원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그가 제기하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교단의 신학적 연구와 공회의 최종 판단은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다. 신학대학원 교수회의 연구가 총회의 위임을 받아 작성됐다면 총회는 그 연구를 어떤 방식으로 평가하고 수용할 것인지 설명할 책임이 있다.
반대로 총대들이 교수회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지 역시 신학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면 '참고'라는 결정은 갈등을 봉합하는 절충안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뇌가 있는 사람이라면'은 다른 문제다
그렇다고 박 전 교수의 표현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뇌가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이라는 표현은 의도와 무관하게 총대들의 판단 능력을 낮춰 보는 말로 읽힐 수 있다. 박 전 교수는 자신이 총대들을 무뇌아로 지칭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총대들이 충분한 지적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공적인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발언자의 의도만이 아니라 그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이기도 하다. 총회라는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수의 총대가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을 비판하면서 '뇌가 있는 사람이라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논쟁의 수위를 높인다.
더욱이 신학적 논쟁에서 상대방의 지적 능력을 암시적으로라도 문제 삼기 시작하면, 정작 논의해야 할 내용보다 말의 감정적 충돌이 앞서게 된다. 지금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교수회의 보고서가 무엇을 지적했는지, 총회는 왜 그것을 공식 채택하지 않았는지보다 '박영돈 교수가 총대를 무뇌아라고 했느냐'가 논쟁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것은 양쪽 모두에게 손해다. 총대들의 판단도, 교수회의 연구도 존중해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총대들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총회는 교단의 공적인 의사결정기구이며, 이번 표결에 참여한 350명의 총대 가운데 281명이 '참고'안을 선택했다. 이를 단순히 '생각 없는 사람들의 결정'으로 치부하는 것은 공회의 의미 자체를 훼손할 수 있다.
동시에 교수회의 연구도 존중해야 한다. 총회가 스스로 신학적 연구를 위임했고, 교수들이 1년 동안 연구해 보고서를 제출했다면 그 내용은 총회가 쉽게 흘려보낼 수 있는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다. 교수회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를 신학적으로 반박하면 된다. 바로 그것이 신학적 논쟁의 방식이다.
총대는 교수보다 지적으로 열등하지 않으며, 교수는 총대보다 교회 현실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다. 교수와 총대는 서로 다른 위치에서 교회를 섬긴다. 교수는 신학적 연구와 성찰을 통해 교회를 섬기고, 총대는 교단의 공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교회를 섬긴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판단을 자동으로 우위에 두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질문은 '강단과 정치'다
이번 논쟁에서 놓쳐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 그것은 손현보 목사의 설교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한국교회에서 강단과 정치의 관계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고신총회 교수회의 보고서가 제기한 핵심 문제 가운데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교수회는 해당 설교들이 성경을 정치적 판단을 보조하는 수단처럼 사용할 우려가 있고, 설교의 목적이 정치적 각성과 행동 촉구에 치우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손 목사 측에서는 국가 권력과 사회의 부당함에 대해 교회가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특히 국가의 예배 제한 등에 맞섰던 고신의 역사적 전통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여기에는 어느 한 문장으로 답하기 어려운 긴장이 존재한다. 교회는 정치적 현실을 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있다면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가. 성경의 예언자적 메시지를 오늘의 정치 현실에 적용하는 것과 특정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도록 성도들을 동원하는 것은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정치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설교를 정치설교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반대로 '예언자적 외침'이라는 이름으로 강단이 특정 정치세력의 논리를 전달하는 공간이 되는 것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번 논쟁의 핵심은 바로 이런 질문에 있다.
고신이 넘어야 할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논쟁의 방식이다. 이번 사안을 손현보 목사 한 사람에 대한 평가로 끝내는 것은 아쉽다. 고신총회가 이번 결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판단을 유보했다면 이제 오히려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강단의 정치적 발언에 대한 고신의 신학적 기준은 무엇인가. 정치적 현실에 대한 설교와 정치적 선동의 경계는 어디인가. 교단이 신학적 연구를 위임했을 때 그 연구 결과는 총회 의사결정에서 어떤 지위를 갖는가. 총대가 교수회의 연구에 동의하지 않을 때 어떤 방식으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가. 그리고 서로 다른 판단을 가진 사람들을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함께 세워갈 것인가.
이 질문들이 논의되지 않는다면 이번 총회의 '참고' 결정은 단지 한 사건을 잠시 덮어둔 것에 그칠 수 있다. 반대로 이 질문들을 진지하게 논의한다면 이번 갈등은 고신교단이 강단과 정치, 신학과 공회, 학문과 목회 현장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신학적 논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니다
박영돈 전 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신학 교수와 총대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다고 강조했다. 이 말은 이번 논쟁을 바라보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교수도 말씀 아래 있고 총대도 말씀 아래 있다. 목회자도, 교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누구도 자신의 직위나 학문적 권위, 공회에서 얻은 다수의 표를 절대적인 권위로 내세울 수 없다. 교수회 보고서도 성찰과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총회의 결의 역시 신학적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비판은 상대를 무지하거나 악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왜 그 판단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이번 논쟁에서 아쉬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뇌가 있는 사람이라면'이라는 표현과 '지적 오만'이라는 맞대응이 서로의 주장을 압도하면서, 정작 교회가 답해야 할 질문들이 뒤로 밀려나고 있다.
고신 총회가 보여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선택
총회의 결정은 이미 내려졌다. 그러나 결정이 내려졌다고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총회가 교수회의 보고서를 공식 채택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를 신학적으로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교수회 역시 자신의 연구가 총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단순한 권위의 훼손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총대들이 제기한 반론 가운데 신학적으로 검토할 부분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손현보 목사 역시 자신의 설교가 제기한 신학적·목회적 우려에 대해 방어만 하기보다, 강단이 정치적 목적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문제 제기에 응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총대들 역시 교수회의 연구를 '참고'로만 남겨두는 것으로 논쟁을 끝낼 것이 아니라, 왜 그 연구를 공식적인 판단으로 채택하지 않았는지 교단 구성원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이번 결의는 단순한 갈등의 봉합을 넘어선다. 공회의 권위와 신학의 권위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서로를 검증하고 섬기는 관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