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시편 42:1-5, 히브리서 11:13-16, 요한복음 14:1-3
설교문
가을이 깊어 갑니다. 저는 가을이 오면 이상하게 그리워집니다. 무언가 그렇게 그립습니다. 무엇이 그리운지 저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만도 아닙니다. 특별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만도 아닙니다. 그런데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조금 차가워지고, 해가 조금 일찍 지고, 나뭇잎의 빛깔이 하나둘 달라지기 시작하면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려옵니다. 무엇이 그리운 것일까? 생각해 보면 젊었을 때보다 지금 더 많은 것이 그립습니다. 사람이 그립고, 지나간 시간이 그립고, 다시 갈 수 없는 장소가 그립습니다. 아마 인생의 시간이 쌓일수록 그리운 것도 쌓이나 봅니다. 혹시 갱년기일까요? 아니면 그 모든 그리움의 더 깊은 곳에는 내가 아직 제대로 이름 붙이지 못한 또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일까요?
영국 시인 존 키츠는 「가을에게」라는 시에서 가을을 "안개와 무르익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가을 햇살 아래 포도가 익어가고, 사과나무에는 열매가 가득하며, 벌집에는 꿀이 넘칩니다. 키츠에게 가을은 죽어가는 계절이기 전에 무르익는 계절입니다. 여름 내내 자라온 생명이 마침내 가장 충만해지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합니다. 무르익었다는 것은 더 이상 익어갈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완성과 사라짐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가장 충만한 순간에 이미 떠남이 시작됩니다.
시의 마지막 연에서 키츠는 묻습니다. "봄의 노래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곧 답합니다. "그것들을 생각하지 말라. 너에게도 너의 음악이 있으니." 참 멋진 말입니다. 키츠는 가을에게 봄처럼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나간 봄을 되찾으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가을에는 가을의 음악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시를 읽다가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인생의 가을이 힘든 것은 가을이 왔기 때문만이 아니라, 가을이 왔는데도 계속 봄의 노래를 찾기 때문은 아닐까? 젊었던 나, 건강했던 나, 부모님이 살아 계시던 때의 나, 자녀들이 어렸던 때의 나, 무엇이든 아직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때의 나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 "내 봄은 어디로 갔을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키츠는 말합니다. "가을에도 당신의 음악이 있습니다." 참 위로가 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에서 다시 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을의 음악에는 왜 이렇게 진한 그리움이 배어 있는 것일까요?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유명한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 날 주인공이 마들렌이라는 작은 과자를 차에 적셔 먹는 순간,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세계가 갑자기 돌아옵니다. 집이 돌아오고, 길이 돌아오고, 사람들이 돌아오고, 그 시절의 자기 자신이 돌아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마들렌이 있습니다. 어떤 냄새 하나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데려오고, 오래된 찬송가 한 곡이 어린 시절의 교회학교를 데려옵니다. 어떤 음식 하나가 할머니의 부엌을 눈앞에 되살려놓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깨닫습니다. 지나간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을.
저는 이번 가을에 그리움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주 단순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지나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그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날들이 지나갔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고, 얼마나 많은 장소를 스쳐 갔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날이 다 그립지는 않습니다. 그 모든 사람이 다 그립지도 않습니다. 퍼뜩 깨달았습니다. 사랑했던 것이 그립습니다.
내가 아꼈던 사람이 그립습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울었던 사람이 그립습니다. 내 시간과 정성을 기꺼이 쏟았던 일들이 그립습니다. 그때는 힘들다고 투덜거렸지만 온 마음을 다해 살아냈던 그 시간이 그립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리움이란 단순히 시간이 지나간 흔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움은 사랑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동안은 그리운 것이 많아질수록 내가 잃어버린 것이 많아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리운 것이 많아졌다는 것은 내가 사랑한 것이 많았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가을, 저처럼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면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잃어버리기만 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사랑한 사람입니다. 많이 그립다면 그만큼 많이 사랑한 것입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어 눈물이 난다면 그만큼 그때를 진실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가을마다 감기처럼 찾아오는 그리움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왜 나는 자꾸 옛날 생각만 하지?" 하며 자신을 나무라지도 마십시오.
물론 그리움에는 상실의 아픔이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후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움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상실과 후회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인생의 가을이 되어 우리가 하나둘 세어보는 것들은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사랑했던 것들의 목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리움에는 나이가 없습니다. 스무 살의 그리움이 있고, 마흔 살의 그리움이 있고, 일흔 살의 그리움이 있습니다. 계절의 가을만 가을이 아닙니다. 정들었던 학교를 떠날 때에도 가을은 옵니다. 오래 몸담았던 직장을 떠날 때에도 가을은 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낼 때, 그때에도 가을은 옵니다. 인생에는 수많은 가을들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무언가를 그리워합니다. 그리움에 울기도 합니다. 잃어버렸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독일 시인 릴케의 「가을날」은 이런 기도로 시작합니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릴케는 여름이 끝났다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뜨거웠고, 충분히 푸르렀고, 충분히 아름다웠던 여름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시의 마지막은 쓸쓸합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홀로인 사람은 오래도록 홀로 남을 것입니다." 언뜻 앞뒤에 안맞는 시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의 처음과 마지막이 이상하게도 하나로 들렸습니다. 여름이 참으로 위대했기 때문에 가을이 쓸쓸한 것입니다. 진실로 사랑했기 때문에 떠난 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함께했던 시간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혼자가 된 저녁이 더 외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을의 쓸쓸함은 여름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여름이 참으로 위대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그리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내 그리움의 뿌리가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오히려 더 아픈 질문이 생겼습니다. 왜 사랑하는 것들은 다 지나가는가?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 사람은 왜 떠나야 했는가? 그토록 소중한 시간이었는데 왜 이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둘 수 없는가?
지나가는 것이, 소멸하는 것이 사무쳐 때때로 우리는 고향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오래전에 살던 동네에 가보면 골목은 생각보다 좁고, 집은 생각보다 작습니다. 저도 어릴 적 다니던 초등학교에 다시 가본 적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넓어 보이던 운동장이 어른이 되어 다시 가보니 조그만 공터처럼 보였습니다. 운동장이 작아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운동장을 바라보는 내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제야 깨닫습니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그 장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계셨던 부모님이었고, 그 골목을 뛰어다니던 어린 나였으며, 그곳에서 살았던 나의 삶 전체였습니다. 아직 많은 것이 시작되지 않았고, 그래서 아직 많은 것이 끝나지도 않았던 나의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서도 고향을 찾지 못합니다. 그리웠던 장소에는 돌아갈 수 있지만, 그리웠던 시간으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집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집이 그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지으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까지 안식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당신을 향하여"(ad te)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 있으면서도 집을 그리워하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온전한 안식을 얻지 못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고백록』 제10권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기억 속으로 깊이 들어갑니다. 그는 인간의 기억을 광활한 궁전처럼 묘사합니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이 있고, 기뻐했던 순간과 슬퍼했던 순간, 사랑했던 사람들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기억은 부르자마자 나오고, 어떤 기억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불쑥 나타납니다. 마치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기억의 궁전을 걷다가 기억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고백에 이릅니다. 오늘 우리가 공동의 기도로 함께 읽었던 말씀입니다. "너무 늦게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토록 오래되고 이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너무 늦게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보소서, 당신은 내 안에 계셨는데 나는 밖에 있었고, 거기서 당신을 찾아 헤맸습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계셨으나 나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오랫동안 무언가를 그렇게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그리움이 향하는 곳을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에는 참 이상한 성질이 있습니다. 사랑은 영원을 원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내 곁에 앞으로 10년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래오래 함께 있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부모님의 손을 잡으면 조금만 더 계셨으면 좋겠고, 아이들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그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행복한 순간에는 누구나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은 그렇게 영원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시간 속에 있습니다. 사람은 떠나고, 꽃은 지며, 아이들은 자랍니다. 부모님은 늙으시고, 나도 늙어갑니다. 아무리 간절히 붙들어도 시간은 지나갑니다. 그리움은 바로 여기에서 태어납니다. 그리움이란 영원하길 원하는 사랑과, 모든 것이 지나가 버리는 시간 사이에서 태어나는 인간의 정서(情緖)입니다. 그리움은 시간 속에서 영원을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소멸하는 것들 속에서 불멸을 희망하는 마음입니다. 내 안에, 나와 함께 계시는 영원한 "당신을 향하여"(ad te) 손을 뻗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편 42:1-2) 영원을 바라보는 시편 기자의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말하듯이, 우리는 "본향 찾는 자"(히브리서 11:14)입니다. 그리고 그 본향을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히브리서 11:16)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나간 고향만 그리워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본향을 그리워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본향에 대해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한복음 14:2) 그리고 약속하십니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3)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 걱정도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떠나실 것을 예고하신 밤, 사랑하는 스승과 헤어져야 한다는 두려움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함께했던 시간이 곧 끝나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예수께서는 그리움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집을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도착하지 못한 본향에 우리를 위한 자리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약속하시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집 한 채가 아닙니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집을 집 되게 하는 것은 벽과 지붕만이 아닙니다. 그곳에 나를 사랑하는,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집이 비로소 집이 됩니다. 집은 단지 돌아갈 장소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 자리, 그곳이 집입니다. 그곳이 고향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향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가을이 깊어 갑니다. 이 가을에 여러분은 무엇이 그리우십니까? 누가 그리우십니까? 어떤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만약 이 가을에 감기처럼 그리움이 찾아오거든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리움은 상실의 증거이기 전에 사랑의 증거입니다. 지나갔기 때문에 그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그립습니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말해주십시오. "그래, 나는 사랑하며 살았구나. 나의 여름은 참으로 뜨겁고 푸르렀구나."
그러나 이제 지나간 봄의 노래만 찾지 마십시오. 가을에는 가을의 음악이 있습니다. 가을에는 가을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영원을 향한 그리움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가을은 "하늘 향한 그리움에 / 눈이 맑아지고 / 사랑 향한 그리움에 / 마음이 깊어지는 계절"(이해안, <가을편지 1>)입니다. 목마른 사슴처럼 여러분의 영혼이 하늘을 향하여, 사랑을 향하여 깊은 그리움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영원을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그리움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그리움은 소망이 됩니다. 우리는 소멸하는 시간 안에 살지만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사랑에 잇대어 살 수 있습니다. 이 가을, 바로 이 소망 안에서 여러분의 가을이 풍요롭고 형형색색 아름다운 단품으로 깊이 물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