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물질은 결코 주변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흙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이 되어 세상에 왔다. 교회는 물과 빵과 포도주를 통해 세례와 성찬을 거행하며, 궁극적인 구원 역시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몸의 부활로 고백한다. 그러나 정작 물질 자체가 어떤 신학적 의미와 존엄을 지니는지에 대한 질문은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전철 한신대학교 교수(조직신학)는 「신학사상」 2026년 가을호(제214집)에 발표한 연구논문 「물질의 신학-물질은 어떻게 거룩함을 잃었는가」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논문은 물질을 다른 무엇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나 초월적 실재를 가리키는 상징으로만 이해해 온 서구 신학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창조세계 전체가 지닌 신학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했다.
전 교수는 서구 신학에서 물질이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돼 왔다고 분석했다. 하나는 물질을 형상이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재료로 보는 도구적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을 자신을 넘어선 초월적 실재를 가리키는 표지로 보는 상징적 이해다. 두 관점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물질 자체의 고유한 존재와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지 않고 다른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는 공통된 한계를 지닌다.
그렇다고 물질이 은총을 매개하는 기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례전에서 물과 빵이 은총을 매개한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전통이다. 문제는 물질의 고유한 존재와 작용, 창조세계와 맺는 관계를 외면한 채 그 가치가 특정한 효과나 외부 목적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데 있다. 논문은 이를 물질의 '도구화'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논문은 먼저 플라톤의 참여 존재론과 그리스도교의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비교했다. 플라톤의 사유에서 감각적 세계는 초월적 형상에 참여함으로써 의미를 얻지만, 물질은 여전히 형상을 받아들이는 조건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반면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는 물질이 하나님과 함께 처음부터 존재했던 독립적인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창조 행위로 존재하게 된 피조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물질의 존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전환이다. 물질의 가치는 외부에서 부여된 형상이나 효용에 달린 것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 자체에 근거한다. 전 교수는 무로부터의 창조가 물질을 낮추는 교리가 아니라 오히려 물질의 선함을 근본적으로 긍정하는 신학적 선언이라고 설명했다. 세계는 인간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에 앞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논문은 이어 서구 성례전 신학의 발전 과정에서 물질의 매개적 의미가 어떻게 도구적 인과성의 언어로 좁혀졌는지를 추적했다. 중세 스콜라 신학의 질료형상론과 성례전의 객관성을 둘러싼 논의는 성례전에서 물질이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는지 설명하는 데 집중하는 경향을 낳았다.
그러나 저자는 토마스 아퀴나스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단순히 물질 도구화의 원인으로 지목하지 않았다. 아퀴나스에게 물질은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하는 피조물이며, 아우구스티누스가 성례의 유효성을 집례자의 도덕적 자격과 분리한 것 역시 성례의 확실성을 보호하려는 신학적 의도에서 비롯됐다. 문제는 이러한 언어가 본래의 존재론적·교회론적 맥락에서 분리돼 독립적으로 작동하면서 물질의 가치가 효과 중심으로 이해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는 데 있다.
전 교수는 이러한 흐름에 대한 대안적 신학의 가능성을 교부와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찾았다. 이레나이우스는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통해 창조세계의 선함을 변호했고, 위-디오니시우스는 벌레와 돌처럼 비천하게 여겨지는 물질조차 하나님의 초월성을 드러내는 매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8세기 성상 파괴 논쟁에서도 성육신은 물질적 형상이 신적 실재를 가리키고 매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신학적 근거로 제시됐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세계라는 성례전'이라는 관점으로 확장된다.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자리가 교회의 제도적 성례전이나 성별된 장소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장소, 인간의 몸과 감각, 일상의 물질세계에도 열려 있다는 것이다. 특히 현대 신학에서 논의되는 '심층 성육신'은 말씀이 취한 육신을 고립된 인간의 신체로만 보지 않고, 생물학적 진화와 물질세계의 긴 역사 안에 놓인 피조물의 현실과 연결해 이해한다.
논문은 종교개혁기의 성찬 논쟁도 이러한 관점에서 재검토했다. 루터는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가 실제로 현존한다고 주장했고, 칼뱅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교제를 강조했다. 반면 성찬을 주로 기억과 표징의 차원에서 이해한 특정한 계보에서는 물질적 표징과 신적 현존 사이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 있었다. 저자는 종교개혁 전체를 물질의 매개 능력을 축소한 역사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도, 근대의 탈주술화 과정에서 기독교 내부의 신학적 변화 역시 물질세계의 의미를 주변화하는 데 일정 부분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논의는 오늘날 생태 위기와도 직접 연결된다. 세례의 물이 생명과 정결을 상징하고 성찬의 빵이 창조의 선물이라면, 그 물과 빵을 가능하게 한 강과 토양, 햇빛과 비, 인간의 노동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강이 오염되고 바다가 파괴되는 현실 앞에서 세례의 물만 생명의 상징으로 온전히 남을 수 있는가. 토양이 훼손되는 상황에서 성찬의 빵을 아무런 긴장 없이 창조의 선물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전 교수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물질세계의 위기가 단순히 환경 문제에 그치지 않고 신학 언어 자체의 위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성찬의 빵은 세계와 분리된 종교적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땅의 소산이며 인간 노동의 열매다. 따라서 창조세계를 파괴하는 일은 성찬의 의미를 떠받치는 물질적 조건을 훼손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저자는 세계 전체가 성례전적이라는 주장이 모든 물질에 신성이 내재한다거나 모든 물질이 자동으로 은총을 전달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물질의 성례전적 열림은 물질이 독립적으로 소유한 신적 속성이 아니라 창조주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가능성이며, 그 관계를 현실화하는 것은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이다. 이러한 성령론적 이해를 통해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별을 유지하면서도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현존에 열려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 지점에서 논문은 현대의 신물질론과도 대화를 시도했다. 신물질론은 물질을 수동적이고 비활성적인 대상으로 취급해 온 근대적 관점을 비판하며 물질의 생동성과 행위성, 관계적 역량에 주목한다. 그리스도교 창조 신앙 역시 물질을 인간의 의지에 종속된 재료나 수동적 배경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접점을 지닌다. 다만 신물질론이 물질의 능동성을 물질 내부의 관계와 생성 능력에서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면, 창조 신앙은 그러한 능력을 창조주와의 관계 안에서 받은 피조물의 역량으로 이해한다는 차이가 있다.
논문이 제안하는 '물질의 신학'은 물질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거나 물질 자체를 은총의 자동적인 생산 장치로 만드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딛고 선 흙과 마시는 물, 매일 나누는 빵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지를 다시 묻는 작업이다.
전 교수는 물질의 신학이 새로운 거룩함을 물질에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익숙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물질을 창조의 빛 아래에서 다시 바라보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창세기가 창조세계를 향해 반복해서 선언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처럼, 물질의 존재 자체가 지닌 선함과 경이를 신학의 언어로 회복하는 것이 이 연구의 핵심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