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 사람들은 오늘의 성공회대를 있게 한 주역으로 이재정 전 총장을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1988년 성공회대의 전신인 성공회신학교 5대 교장으로 취임한 이후 종합대학으로 승격될 때까지 교장, 학장, 총장 등 주요 직책을 두루 거치며 이 학교를 진보학파의 산실로 키워냈다. 그런 그가 13일 정년 퇴임식을 갖고 수많은 이들의 증거 속에 학교를 떠났다.
▲이재정 성공회대 전 총장이 퇴임사를 전하고 있다. ⓒ이지수 기자 |
1988년 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20년간 복역했던 신영복 교수(사회과학부)를 임용한 것. 복권도 되지 않아 당국의 감시대상에 올라 있던 그를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데리고 온 이유는 “역사의 희생양이 되어 옥살이 한 사람에게 뭔가 보상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 교수에 이어 두 번째로 영입한 교수는 조희연 교수(사회과학부). 1980년대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의 정점에 서 있던 소장파 신학자였으나 유신시절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던 탓에 학계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던 그를 또 데려와 앉혔다.
이어 손규태(기독교윤리학), 최영실(성서해석학), 권진관(조직신학) 교수 등을 잇따라 영입했다. 대부분 주류 지식인사회에서 열외될 수 밖에 없는 아웃사이더들이었다.
이 전 총장이 이들을 ‘사회적 보상’ 차원에서 데려온 것만은 아니었다. 성공회대를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진보적 학파의 산실’로 만들려는 의지였다. 그는 퇴임식에서 “성공회대가 ‘진보학파’라는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여, 진보적 학문과 정체성의 힘을 역사 가운데 드러내는 학교이기를 바랐다”고 밝혔다.
신학교를 4년제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면서 과도 종교사회학과(현 사회과학부), 선교영어학과(현 영어학과), 컴퓨터정보공학부, 일어학과, 신문방송학과 순으로 차근차근 늘려갔다. 이 때도 이 전 총장의 바람은 하나였다. “IT를 다루는 학과까지도 ‘진보적 가치’라는 하나의 공통된 가치를 지향하기를 바랐다.”
퇴임식에서 권진관 교수는 이 전 총장이 자신의 인생을 구해준 은인이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민청련 사건으로 인해 학부를 졸업하지 못하고 유학을 갔다 와 아무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는데, 이재정 신부님이 나를 받아줬다”고. 그는 시간 강사로 채용됐다가 후에 서울대에서 졸업장을 받고 정식 교수가 됐다.
퇴임식이 열린 대학성당은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 교수들, 교직원들로 꽉 찼다. 밝은 얼굴로 단상 위에 오른 이 전 총장은 “진보의 꿈을 이뤄나가는 대학이 되길 바란다”고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또 성공회대의 ‘남북화해와평화연구소’ 설립을 제의하며, 만약 연구소가 설립된다면 자신이 어떻게든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떠나는 길에 김근상 성공회 주교는 “이재정 신부님은 성공회대는 물론 한국 성공회와 세계 성공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양권석 총장은 “성공회대는 신부님과 함께 시작하여 영원히 신부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권진관 교수는 “신학교육과 학교교육, 나아가 이 나라의 개혁에 앞장서신 분이신데 벌써 은퇴하신다니 너무 아쉽지만, 앞으로도 우리는 신부님과 함께 일해 나가겠다”고 송공의 말을 전했다.
이 전 총장은 총장 임기를 1년 남겨 둔 2000년 정치권에 진출해 제 16대 국회의원, 제 33대 통일부 장관 등을 지내다 지난해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로 돌아왔다. 그는 퇴임 후 성공회대 명예교수로서 활동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