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취재에 앞서
1970~80년대의 20여 년간 개신교 진보진영의 적극적인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한국 기독교의 이미지는 ‘진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척되기 시작한 90년대 이후 개신교 보수진영이 한국 사회의 다양한 관심사와 쟁점사안에 대해 보수주의적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의 이미지는 ‘보수’로 격변해갔다.
그러나 개발독재정권에 대한 침묵 속에서 성장제일주의를 고수해왔던 개신교 보수진영이 뒤늦게 내놓기 시작한 목소리에 담긴 수구적(守舊的) 메시지와 민주화 이후 달라진 한국적 현실에 대한 새로운 분석과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개신교 진보진영의 진부함이 한데 어울린 데서 오는 공통감각은 격변보다는 상실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상실해가고 있는가. 방향을, 대안을, 본질을 상실해가고 있다. 대신 세상으로부터, 심지어 그리스도인으로부터도 외면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성경이 말하고 있는바 중 ‘교회’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무엇에 앞서 차라리 심중을 내비치는 것이 인터넷식의 요즘 기획 대세에 충실할 듯하다. 모호하게 말할 것 없이 이 성경 읽기의 주체를 본지라고 분명히 해두자면, 본지가 교회론을 뒤적거리거나 신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요식을 제쳐두고 다시 본래(本來)의 성경을 뒤져보는 이유는 기사의 운(韻)을 떼는 일을 넘어서는 데 있다. 교회는 본래(本來)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교회는 ‘공동체’였다. 그것은 이념이나 틀이 아닌, ‘교회다움’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본지가 공동체는 무엇이다라고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적 현실 가운데 나타난 기독교의 다채로운 스펙트럼 속에서 내가 맞다, 네가 맞다 또는 교회 일치가 필요하다 등의 목소리와 무관한 듯이 이 교회다움에 대한 추구를 먼저, 그리고 묵묵히 해왔던 공동체교회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하여, 그들을 통해 그들의 존재 자체가 현재의 한국 기독교와 세상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가급적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은 신학적 정리를 통해서만 드러날 소재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현장감 있는 언론의 보도가 호소력 있으리라 예상해 본다.
따라서 본 기획은 내레이션(Narration)보다는 대사(speech)에 충실하고자 한다. 잉크냄새 보다는 땀냄새가 나는 기획으로 공감(共感)을 얻고자 한다. 개신교 공동체교회에 대해 많은 기성언론들이 다루어왔다. 본지도 그들 가운데 하나일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본 기획은 차별화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호흡이 긴 인터뷰
공동체교회라는, 한국 개신교 교회 가운데 독특한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지는 독자들의 관심이 그들에 대한 본지의 목소리보다는 그들의 목소리 자체에 있다고 본다. 또한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공동체교회들이 자신들의 시도와 업적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았던 이유와, 그들이 실제로 말할 수 있고 이제는 말해야만 하는 바는 반비례한다고 본다. 따라서 호흡이 긴 인터뷰 기사를 통해 그들의 육성을 최대한 살리고자 한다. 이는 스크롤의 압박(?)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리라 예상한다. 그러나 스크롤이 내려갈수록 더해 가리라 예상되는 흥미로움은 인터넷 언론으로서 스크롤의 압박에 대한 본지의 본능적인 두려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현장을 담아내는 체험수기
새겨들은 목소리가, 내뱉은 목소리가 삶으로 빚어져가는 교회, 삶이 된 신앙의 면면이 두드러지는 교회가 공동체교회가 아닐까. 공동체교회의 특성상 이른바 썬데이 크리스천과는 삶의 모습을 달리하는 바가 많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동체교회의 참모습을 취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에 동참해보는 방식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한다. 현장사진과 인터뷰를 통한 육"성"(肉聲)을 넘어 본지의 기획담당 기자의 체험 삶의 현장(?)을 통한 "육"성이 더해진다면 비로소 본 기획이 의도하는 바에 맞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