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북리뷰] 쉼 없이 아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헨리 나우엔, 『탕자의 귀향』(포이에마 刊)

입력 Aug 05, 2015 11:53 AM KST
▲헨리 나우웬의 『탕자의 귀향』 겉 표지.
“탕자의 비유는 나를 만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찾아다니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헨리 나우엔 
예수 그리스도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냈다. ‘탕자의 비유’도 그 중 하나다. 사실 탕자의 비유만큼 설교의 단골소재가 된 비유를 찾기 힘들다. 네덜란드 출신 가톨릭 사제이자 작가인 헨리 나우엔(1932~1996)의 대표작 『탕자의 귀향』(원제 :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의 주제도 탕자의 비유다. 
이 책을 읽고 난 느낌부터 적어보자면, 그저 놀랍다. 저자가 지닌 영성의 깊이에 한 번 놀랐고, 빛의 화가 램브란트의 생을 조명하는 저자의 통찰에 또 한 번 놀랐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보자. 『탕자의 비유』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한 지점에서 만난다. 탕자의 비유, 그리고 이 비유에서 영감을 얻은 램브란트의 역작 <탕자의 귀향>에 얽힌 사연이다. 헨리 나우엔은 램브란트의 작품을 통해 탕자의 비유를 곱씹는다. 동시에 램브란트의 생애도 재조명한다. 
램브란트가 <탕자의 귀향>을 완성하기까지 그의 인생역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자녀들의 잇따른 죽음, 경제적 어려움 등등. 그러나 이런 어려움들은 오히려 램브란트의 예술혼을 풍부하게 해주는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램브란트가 평생 겪은 불행을 간추려보면 누구라도 입이 딱 벌어지고 말 겁니다. 탕자에 견주어도 결코 밀리지 않을 만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중략) .... 오십 줄에 들어서면서부터 램브란트는 그럭저럭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그 무렵에 나온 작품들에서 따듯한 느낌과 내면의 성찰이 감지되는 걸 보면 작가가 쓰라린 환멸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뼈아픈 경험들은 세상을 보는 눈을 투명하게 만들었습니다.”- 본문 59~62쪽 
램브란트의 생은 “예술은 슬픔과 고통의 산물”이라는 피카소의 경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헨리 나우엔은 램브란트의 인생역정에서 집 나간 둘째 아들을 본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그 품에 얼굴을 파묻은 탕자를 처음 대하는 순간, 한때는 두려울 것 없을 만큼 당당했으며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그토록 애써 끌어 모은 온갖 영화가 모두 헛것이었음을 아프게 깨달은 한 예술가의 초상이 어쩔 수 없이 겹쳐 보였습니다.”- 본문 62쪽
‘탕자’ 아닌 ‘탕자들’의 귀향 
흔히 탕자의 비유는 되먹지 못한 둘째 아들, 그리고 이런 아들조차 살갑게 맞이하는 아버지의 훈훈한 이야기 정도로 이해된다. 이런 면이 없지는 않지만, 이런 이해는 겉핥기일 뿐이다. 
헨리 나우엔은 둘째 아들 말고도 아버지 곁에 있는 큰 아들의 존재에 주목한다. 성서 기자는 큰 아들의 존재에 크게 주목하지는 않는다. 헨리 나우엔은 이런 큰 아들의 존재를 끄집어낸다. 그러면서 큰 아들이 정말 아버지와 함께 거하고 있는지 묻는다. 
“큰 아들은 멀찍이 물러서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몸짓을 지켜볼 따름입니다. 아직까지는 분노와 원망을 떨쳐버리고 아버지가 베푸는 치유의 손길에 자신을 내어 맡기지 못합니다.”- 본문 142쪽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진짜 집을 나가버린 둘째 아들,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집에 살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큰 아들 모두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취하는 두 가지 ‘인간적인’ 선택일지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성서 기자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겨 집을 나가는 장면을 무뚝뚝하게 묘사한다. 당시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둘째 아들의 행태는 패륜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후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그 순간 아버지가 생각나 머슴 노릇이라도 하고자 집으로 돌아간다.  
큰 아들은 어떨까? 큰 아들은 아버지가 온갖 무례를 저지른 동생을 보고 기뻐하는 게 못마땅하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지내지만 진정으로 아버지의 마음과 합하지는 않은 셈이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누린다고 고백 하면서도 원망에 사로잡혀 정죄를 일삼는 율법주의자들의 전형이다. 이런 원망으로 인해 큰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도 자유함을 잃어버린다. 
“자유와 행복을 찾아 집을 떠났다가 먼 지방에서 길을 잃은 작은 아들뿐만 아니라 고향에 머물던 아들 역시 방황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겉으로는 어른이 시키는 일을 성실하게 잘해낸 착한 아들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부친을 잘 섬기고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며 주어진 책임을 다했지만 큰 아들은 날이 갈수록 불행하고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본문 126쪽 
“... 큰 아들의 탈선은 분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우선 그르다고 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분고분했고, 효도를 다 했고, 규율을 잘 지키고 열심히 했습니다. 다들 큰 아들을 존중하고 높이 평가했으며, 칭찬하고, 모범적인 아들의 전형으로 여겼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작은 아들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암흑의 기운이 중심에서 솟구쳐 표면으로 떠올랐습니다. (중략) ‘바르고 착하게’ 사는 이들 가운데 분노가 넘칩니다. 이른바 ‘성도’라는 이들 사이에 판단과 정죄, 편견이 횡행합니다. ‘죄’를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이들이 분노에 사로잡혀 냉랭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일쑤입니다.”- 본문 130쪽 
아버지는 집 나간 작은 아들과 마음 문이 닫힌 큰 아들을 동시에 품는다. 이 대목에서 헨리 나우엔은 “탕자의 비유에서 선한 이는 오직 아버지뿐”이라고 일깨운다. 
이제 결론이다.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가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신비의 한 자락이다. 그리고 램브란트의 <탕자의 비유>는 탕자와도 같은 인생을 산 작가의 예술혼이 담긴 역작이다. 
예수께서는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일깨웠다.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파우스트』 맨 마지막 ‘천상의 합창’에서 “일체의 무상한 것들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는 인간의 무상을 뛰어넘는 하늘 아버지의 신비를 담고 있다. 헨리 나우엔은 이런 신비를 쉽게 풀어준다. 
헨리 나우엔은 영성의 여정을 끝맺으면서 아버지의 신앙을 가지라고 당부한다. 즉, 편협한 신앙에서 벗어나 집 나간 아들도, 집에 있지만 자유함을 잃은 아들도 동시에 끌어안으라고 권면한다는 의미다.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는 우리는 너무 비유를 쉽게 여기는 것 같다. 탕자의 비유도 얼핏 이해가 쉬워 보인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 비유는 그동안 익숙하게 들었던 해피엔딩 스토리로 풀 수 없는 신비가 담겨져 있다. 불행하게도 겉핥기 수준이나마 예수의 비유가 회자되는 게 다행스럽다. 젊은 여성도가 목사 앞에서 거리낌 없이 속옷을 벗어 던져야 좋은 믿음이라고 설파하는 자가 버젓이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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