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향린의 신앙고백"

2025년 6월 29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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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렘 31:31-34, 계 21:1-8, 눅 4:16-21)

[내란 시기 성찰]

하나님께서 우리 향린교회를 매우 어여쁘게 보아주셔서, 지난 72년을 지내면서 당신의 뜻을 이 땅에 펼치게 하셨고, 지난 7개월 동안 이 나라가 위태로울 때, 함께 하나님 나라 사역을 감당하라고 많은 새 교우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고 하더라도,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그 빛들이 모이면 더 많은 어둠을 몰아낼 수 있고, 그늘져 음습한 곳을 따뜻하고 보송보송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일대 법학 교수로 40년 넘게 재직하였던 프레드 로델(Fred Rodell, 1907. 3. 1. ~ 1980. 6. 4.)은 1939년, 30대 초반에 누가복음서 11장 52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 법률가들아!"라는 책(Woe Unto You, Lawyers!)을 냅니다. 그 책의 1장 제목을 근대의 주술사(Modern medicine-Man)라고 달았는데, 찰스 맥클린(Charles Macklin)의 문장을 하나 인용합니다. "법은 일종의 주술 과학이다." 원래 문장은 "법은 일종의 주술 과학이라서 얼굴에는 미소를 띠면서 주머니를 털어간다.(The law is a sort of hocus-pocus science, that smiles in yer face while it picks yer pocket.)"인데, 이 문장을 인용하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부족 시대에는 주술사가 있었다. 중세에는 사제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법률가가 있다. 곧 어느 시대에나 자신들이 갈고 닦은 특수한 지식을 내세워, 남들이 다 부러워하면서 따르도록 하기 위해, 자기들의 기술 능력에다 뻔뻔하고 그럴듯한 말장난을 버무려서, 추종자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는 약삭빠른 무리가 있었다. 모든 시대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이들을 적절하게 다루는 비법을 방패 삼아 자기들만의 방식대로 문명을 이끄는 사이비 지식인 독재 정권이 있었다."(In Tribal times, there were the medicine-men. In the Middle Ages, there were the priests. Today there are the lawyers. For every age, a group of bright boys, learned in their trade and jealous of their learning, who blend technical competence with plain and fancy hocus-pocus to make themselves masters of their fellow men. For every age, a pseudo-intellectual autocracy, guarding the tricks of its trade from the uninitiated, and running, after its own pattern, the civilization of its day.)

지난 정권의 내란 사태는 수 천 년의 시공간을 훌쩍 넘어서 주술사와 사이비 목사와 법률가들이 합작해서 만든 것인데, 문제의 핵심은 지난 정권을 둘러싼 모든 실세가 비합리적 주술, 사이비 지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대선 결과가 보여 주듯이, 우리 국민의 40%는 여전히 거짓 뉴스에 속고, 왜곡된 역사를 사실로 알고 있으며, 탐욕을 부추기는 저질의 자본주의 문화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입니다. 차분히 성찰하여 따져보는 비판적이고도 합리적인 사유에 미숙한 이들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우려했듯이 너무나 쉽게 여러 우상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앎보다 믿음을 강조했던 한국교회의 분위기는 교인들에게 반지성주의와 맹목적 신념을 강화하였고, 그 신념들이 삶의 특수한 경험과 연결되면서 우격다짐으로 자기주장만을 내세우기에 교인들은 상종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너 아직도 교회 다니냐?"라는 조롱의 말이 유행하고, 어느 자리에서든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밝히기가 부끄럽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종교의 원래 가치, 즉 숭고한 높은 도덕성을 회복하고, 그것을 삶으로 묵묵히 살아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종교의 고매한 가치가 말 잔치가 되지 않으려면, 개인의 실존적 삶에서 성숙한 인격을 길러내고, 공동체적 실천의 지속을 담보하는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인류의 지혜 유산인 성서와 2000년 넘는 교회 전통이라는 신앙의 위대한 토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방대하기에 그것을 짧게 요약하여 교리를 만들었는데, 그 교리의 뿌리에는 바로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과 같은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들은 전 세계 교회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너무 오래전의 것이라 새로운 재해석과 충분한 설명이 없으면 의미 없이 되뇌는 주문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각 교단은 저마다 시대에 맞는 신앙고백들을 새로 만들기도 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향린교회에는 우리 신앙 공동체 모두가 함께 고백하는 향린교회만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지난 반년의 시간 동안 새로 향린의 식구가 되신 분들이 많고, 또 가치 혼란의 시대에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기에, 오늘 하늘뜻펴기는 향린의 신앙고백을 되짚어 보려고 합니다.

[향린 문서들과 이원론적 신앙의 타파]

교회 홈페이지 향린의 문서에 들어가 보면, 15개의 문서가 있습니다. 그중 다섯 개가 향린의 신앙고백과 연관됩니다. 이 중 모든 신앙고백문의 기초가 된 문서는 바로 1993년 5월 9일 창립 40주년을 맞이하며 만들어낸 "향린교회 신앙고백 선언"입니다. 이것을 토대로 이후에 50주년에는 "향린교회 희년 신앙고백"을 만들어 지금의 국악찬송가 254장 "이 땅의 향기로운 이웃"이 되었고, 매년 새해주일에 십자가를 달면서 고백하는 "향린 십자가 신앙고백 또는 신앙실천 고백"과 60주년 섬돌향린교회를 분가하며 만든 "향린-섬돌향린 공동신앙고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향린교회 신앙고백문들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이원론적 신앙의 타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도 그렇고, 1919년 삼일 독립 만세운동의 실패 뒤의 한국교회도 그렇고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신앙인들이 이 세상과 저 세상, 하나님과 세계, 하늘과 땅, 교회와 세속,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신과 인간 등 둘로 나누고 한쪽을 우위에 두고 다른 쪽을 소홀하게 여기거나 죄악시 해 왔습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고, 세상은 타락한 죄의 소굴이어서 많은 사람을 교회로 불러오는 것이 전도라고 가르치는 것, 믿는 사람들의 소망은 죽어서 가는 천국에 있고, 이 세상의 삶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죄인이라는 규정 등 한국의 교인들은 대체로 이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이원론적 신앙도 나름의 역할을 해 온 것은 분명합니다.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나라 잃고 땅도 잃고 주권도 빼앗긴 백성에게, 한국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천국의 소망은 바로 그 하루를 버텨주는 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하루지만 교회에 나와서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자신의 잘못들을 회개하고 돌아보며, 한 믿음을 가지고 한 공동체에서 함께 하는 이들과의 연대와 지지 속에서 세상의 힘겨운 나날들을 견딜 수 있었지요.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존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온갖 속임수와 술수가 난무하는 세상 죄악에 물들지 않는 거룩함과 순결함을 지켜낸다는 측면에서는 이원론적 신앙이 상당히 유효했습니다. 저 세상의 소망으로 이 세상의 죄에 물들지 않고, 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철저한 종교 생활을 통해 일반인들보다 더 나은 도덕성을 확보하였기에, 한동안 이원론적 신앙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인들도 본받을 만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별로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는 대형 교회, 보수교회에 출석하는 이들 중에는 사적으로 만나면 매우 인품이 훌륭하고 따듯하고 교양이 넘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 이 땅이 아닌 다른 어느 곳에 있다는 플라톤적 사유에 기반한 이원론적 신앙은 내세지향적이고, 교회중심적이고, 세상과 불통하는 신앙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원론적 신앙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의 뜻, 즉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려고 하는 그 뜻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포로된 사람에게 해방이 선포되고, 눈 먼 사람들이 눈을 뜨고 억눌린 사람들이 풀려나는 일이 바로 오늘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바로 이 부분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세상과 이 세상을 나누었던 것을 하나로 만든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조용기 목사입니다. 조 목사는 요한 3서 1장 2절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으로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은 저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가능하다는 삼박자 구원론을 들고 나옵니다. 즉 예수를 믿으면 '영혼의 구원'과 '생활의 복', '건강의 복'을 모두 받는다고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사실 요한 3서 1장 2절의 말씀은 이런 식으로 해석되서는 안되는 구절인데, 완벽하게 한국 교인들의 욕망과 일치하는 문자적 해석과 설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내세의 소망으로 현실을 견디는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생활도 나아지고 건강도 좋아진다고 하니, 금상첨화이고, 마침 한국 경제가 날로 좋아지던 때라, 실제로 물질적 축복을 얻게 되었으니,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은 인간의 종교적 욕망에다 세속적 성공의 욕망을 덧씌워 결국 탐욕의 수렁으로 사람들을 몰고 가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모든 종교를 비롯해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핵심 중 하나는 탐심을 조심하라는 것이고, 탐욕이야말로 가장 큰 죄악 중에 하나인데, 한국교회는 순복음교회의 성공을 보면서 탐욕에 물든 곳이 되고 맙니다. 여기에 '재앙은 피하고 복을 받으려는'(除災招福) 무속적 세계관과 입신양명하여 출세하는 것이 자랑인 유교의 현실주의가 겹쳐서 한국교회는 급기야 권력과 야합하고, 자기 성공에만 눈이 먼 종교가 됩니다.

내세지향적 종교를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종교로 바꾸는 방식은 조용기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의 사적인 탐욕을 부추기는 대신, 서로 협력하는 방식, 더 어렵고 힘들고 낮은 자를 찾아가는 방식, 그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향린교회의 신앙고백문은 바로 여기에 집중합니다.

[향린의 신앙고백]

향린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피조세계의 완전한 구원과 해방을 위하여 온 우주와 생명을 새롭게 거듭 창조해 가시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자주·자유·자치 민족으로 살게 하시고, 그의 세계 구원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르십니다."

향린교인들이 믿는 예수님은 "억압과 차별로 인해 소외된 민중의 운명을 스스로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자유와 평등, 평화의 희년을 선포하시고, 우리를 해방하시며 동시에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향린교인들이 믿는 거룩한 영은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예수가 가르쳐 주신 해방의 진리를 깨우쳐 주시는 분"으로서, 우리가 세상과 역사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구현하고, 세상과 역사를 변혁하도록 의지와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향린교회 교인들은 "목회자와 평신도,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구성원들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평등하고 서로 함께 조화를 이루어 평화롭게 살며,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를 위하고 봉사하며,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만들어가며, 교회는 예수처럼 이웃과 세계를 위한 존재로서 아직도 죄와 죽음의 세력 아래 신음하고 있는 이웃을 해방해야 할 메시야적 선교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향린교회 교인들은 우리 교회가 한민족의 구원과 섬김을 위해 부름 받고 보냄 받은 민족교회임을 자각하면서, 교회의 자기 변혁과 세계 변혁을 위해 악하고 불의한 세력에 대항하여 언제나 예수께서 당하신 수치를 걸머지고 영문 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가는 일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본회퍼 목사는 감옥에 있을 때, 제자이자 친구, 조카 사위였던 베트게(E. Bethge)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종교적 행위가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게 아니네. 세상살이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만드네. 이것이 바로 '회개'일세, 회개는 자신의 곤경들, 자신의 물음들, 자신의 죄들, 자신의 불안들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길, 곧 메시아의 사건에 동참하여, 이사야 53장이 성취되게 하는 것이네!"(본회퍼, <옥중서신 - 저항과 복종> 복있는 사람, 345)

그렇습니다. 향린교회의 신앙고백은 본회퍼 목사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곤궁에 처해 계실 때 그곳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자기 욕망을 이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남은 고난을 채우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순종하려고 애쓴 사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본주의 생활방식에 넘어갑니다.

심장이 약한 톰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매우 조심하라는 의사의 주의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한 친척이 죽으면서 엄청난 유산을 물려주게 됩니다. 가족들은 이 사실을 당사자에게는 알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뜻밖의 엄청난 소식에 심장병이 도질까 봐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고민하다가 마을의 본당 주임 사제인 머피 신부를 찾아가서 목회적 돌봄을 통해 좋은 방법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신부님은 흔쾌히 허락을 했고, 톰 아저씨에게 넌지시 물었습니다. "여보게 톰, 혹시 하나님이 자네에게 자비를 주셔서 십억 달러나 되는 돈을 보내주신다고 하세. 자네라면 그 돈으로 무얼 하겠나?" 톰 아저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선뜻 말했습니다. "돈의 반은 성당을 위해 신부님께 드리지요." 이 말을 듣자마자 머피 신부가 심장마비를 일으켰습니다.(엔소니 드 멜로, <종교박람회> 174-175. 각색)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세속적 생활양식에 익숙하고,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을 쓰려고 합니다. 향린의 신앙고백이 우리 개인의 삶에서, 그리고 공동체적 결정과 활동에서 이뤄지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자기에게 먼저 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변명하고 싶은데도, 부당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남들은 오히려 나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도 남을 용서해 준 적이 있는가.

우리는 순종하지 않으면 불쾌한 일을 당할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그 뜻이라고 부르는 저 신비롭고 소리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분 때문에 순종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내적인 만족마저 못 느끼면서도 희생을 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전적으로 고독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순전히 양심의 내적인 명령에 따라, 아무에게도 말 못할, 아무에게도 이해 못 시킬 결단을, 완전히 혼자서, 아무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음을 알면서, 자신이 영영 책임져야 할 결단인 줄 알면서 내린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격의 물결도 더는 나를 떠받쳐 주지 않고, 자기와 자기 삶의 충동을 더는 하나님과 혼동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면 죽을 것만 같은데도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 사랑이 죽음 같고 절대적 부정 같아 보일 때, 아무도 전혀 들어주지 않는 허무를 향해 부르짖고 있는 듯할 때, 모든 게 못 알아들을 노릇이고 무의미해지는 듯할 때,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의무를 행하면 자기 자신을 참으로 거역하고 말살한다는 안타까움을 어찌할 수 없는데도,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는 기막힌 바보짓을 않고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의무를 행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이해도 메아리치지 않고, 자기 자신 "몰아적"이라든가 떳떳하다든가 하는 느낌의 보상마저도 없이 누구에게 친절을 베푼 적이 있는가. - 카알 라너 지음/장익 옮김, <일상>, (분도출판사, 2012. 10. 15) 41-43.

이런 질문을 늘 하면서 향린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동료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는 예수의 몸과 맘, 이 땅의 향기로운 이웃입니다.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는 생명의 숨결로 살아가십시오.

성문 밖으로, 낮은 자리로,

새 하늘 새 땅으로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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