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65장 17-25절, 마태복음서 4장 12-17절
[다시 생각해 보는 하나님 나라]
지지난 주(2월 5일)에 저는 마가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첫 선포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날에 저는 "하나님 나라"가 "하늘나라" 즉 "천국"과 "천당"으로 이해되는 과정에서 한국 교인들이 잘못된 구원이해를 갖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께서 이뤄 가시는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천당의 개념으로만 축소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내세에 천당을 가기 위한 조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면 미래에도 영원의 세계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지속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늘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집니다.
지난 주(2월 12일)에는 육성한 전도사님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첫 선포를 하신 이후에 갈릴리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으로 설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이해하는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말씀에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는 일을 기대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우주적 변화를 가져 오는 엄청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는 아주 일상적인 삶에서의 변화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의 말씀은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같은 본문인 마가복음에서도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때와 장소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활동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을 온 천하에 알리기 위해 쓰인 문서입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요한이 잡힌 뒤, 갈릴리라는 곳에서 시작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올 한 해 동안 예수님의 구체적인 가르침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이어 하나님 나라를 일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지난 주에 이어 오늘 다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이상향]
예수님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저 갈릴리 땅에서 요한의 뒤를 이어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실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이어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일구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는 매 시대마다 그 깊이와 넓이와 폭에 있어서 다르겠지만 매우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알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인류에게 하나의 이상향으로 늘 묘사되어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의 말씀은 그 이상향 중에 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 절인 25절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구절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이것 말고도 19절부터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고, 다시는 울음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어린아이나 노인들이 모두 자신이 받은 수명을 온전히 채우고, 나무처럼 오래오래 살고, 자기가 수고하여 번 것들을 자기가 누리며, 대대손손 주님께 복을 받을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상향을 말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이 이상향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노래에는 언제나 현실의 괴로움과 비참함이 역설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뒤집어 읽어 보면 지금 사람들의 형편은 매우 열악합니다.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있고, 노인도 제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며, 자기가 지은 집에 남이 버젓이 들어와 살고, 내가 수고하고 땀 흘려 지은 것을 남들이 다 먹어 버리는 형국입니다. 열심히 애써 수고하는 것은 남의 차지가 되기 때문에 삶이 허무하고, 가족들과 후손들은 도리어 재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목 놓아 불러도 별 응답이 없는 듯 하고, 사방에 이리와 사자들이 가득해서 늘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제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 이가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추할 수 있습니다. 목숨 부지 하며 살긴 살지만 매일 매일이 괴로움의 연속이요, 마치 지옥에라도 온 것 같습니다.
이런 삶들이 계속 되어 왔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우리들도 삶의 고난과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께 매달리고 붙들고 우리의 서러움과 아픔들을 눈물로 호소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저 하늘의 나라, 영적으로만 충만한 나라가 아니라 우리의 육신이 이 땅에서 울음을 그치고 웃고 즐길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죽음의 그늘진 땅]
오늘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시려고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서는 갈릴리를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라고 말하고 있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유대교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 제외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로 가신다는 뜻은 구원의 소식이 이방에게도 전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은총에서 제외되는 지역이나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지 않는 이상,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의 빛을 받아 따듯한 온기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두 번째 갈릴리 땅과 그 곳 사람들을 죽음의 그늘진 땅이라, 어둠에 앉은 백성이라 표현합니다. 마태복음서에서 '땅'은 하나님의 소유이자 발등상이며, 하나님은 그 '땅'의 일에 관심을 가지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발등상인 땅에 어둠이 깔리고, 죽음의 그늘이 덮였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두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세력은 이방 통치자들이고, 다른 한 세력은 그들에게 동조하고 부역하며 하나님을 무력한 부재지주 즉 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힘 없는 땅주인 정도로 간주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입니다.
마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방 통치자들을 '땅의 임금들'(17:25)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구약성서와 묵시문학 등에서 '하늘의 임금'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상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수 12:1, 스 9:1, 시 2:2, 76:12, 89:27-28, 102:15, 애 4:12, 겔 27:33, 제4에스라 15:20). 마태복음에서 땅의 임금은 하나님에게 적대적인 로마황제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서가 쓰이던 시점에 로마전역을 다스렸던 도미티안 황제는 유대-로마 전쟁의 배상금 격인 유대인 세를 강력하게 거두었습니다. 땅의 임금들은 땅에서 자신의 강압적인 통치를 시행하였고(20:25), 이 통치는 하나님의 땅, 특별히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준 땅을 고통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사야를 인용하여 땅의 임금의 통치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게 하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늘'은 전통적으로 이집트(출 10:21, 22, 14:20), 앗시리아(사 8:22), 바빌론(사 42:7, 47:5, 49:9) 등의 이방 제국의 통치와 그로 비롯된 참담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쓰인 단어입니다. 로마 제국의 통치 때문에 갈릴리는 '죽음의 그늘진 땅'이 되었고, 땅의 임금인 로마의 권력자들 때문에 또 또한 그에 동조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은 때문에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을 침범한 사람들은 자기식대로 마을 이름을 지었습니다. 헬라 시대부터 로마에 이르기까지 '가이사랴,' '가이사랴 빌립보,' '디베랴 바다,' '프톨레마이스,' '아폴로니아'라는 이름이 유대의 본래 지명을 대체하였고, 그 새로 붙여진 땅의 이름은 그 땅을 현실적으로 지배하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과시했습니다. 우리는 울릉도 옆 섬을 독도라고 부르지만 일본놈들은 마치 자기네 땅인양 다케시마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 땅을 계속 하나님이 이스라엘 지파에게 주신 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마태는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땅을 지파별로 골고루 분배했습니다. 이들은 이집트 제국에서와 같이 절대권력이 노예를 부리는 나라가 아니라, 지파들 사이에 평등한 공동체를 꿈꾸었습니다. 모세가 받았던 율법들은 약자를 보호하고, 서로서로 도우며 사는 마을 공동체를 꾸리는 기준들이 되었습니다. 갈릴리가 속해 있던 북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왕의 궁전이 있었던 남유다보다도 이러한 평등 정신이 보존되어 있었던 곳입니다. 특히 갈릴리 호수라는 천혜의 자원과 지중해성 기후 덕분에 농사도 잘되고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동네에 외국 군대가 침략했고, 약탈했고, 민중을 지켜야 할 유대의 지도자들은 그런 틈을 타서 자기의 기득권을 더욱 누렸으니, 갈릴리 백성에게 어둔 그늘이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살려내는 것이었고, 이런 사람들이 살맛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헤롯을 비판한 이유도 권력의 확대를 위한 정략결혼과 관련이 있습니다. 율법에 형이나 동생이 죽었을 때, 그의 아내를 형제가 대신 아내로 삼는 것은 땅의 이동을 막아 원래 평등하게 세운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서로 정략결혼을 통해 땅을 차지하고 평등한 공동체의 이상을 무너트렸습니다. 헤롯은 자기 권력으로 자기 동생의 아내를 빼앗습니다. 세례요한은 마지막 예언자로서 이런 지점들을 비판했고, 예수님도 세례요한의 입장을 지지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권력]
지난 주 금요일 오전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되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아픈 가운데 이재용 부회장은 실질적 회장이고, 삼성가 79년의 역사 속에서 삼성재벌의 총수가 구속된 것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1966년 5월 2일 삼성이 경남 울산시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포대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가 들통이 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깡패 출신 김두한 의원은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 도중 국무위원석에 앉아 있는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 수명의 각료들을 향해 인분을 투척하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1993년 이건희 씨의 형인 이맹희 씨의 증언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 기관들이 함께 벌인 조직적인 밀수사건이었음이 낱낱이 밝혀졌습니다. 그 때도 삼성의 이병철은 한국비료의 국가 헌납과 경영 은퇴를 선언하여 위기를 모면합니다.
그렇게 재벌의 불의를 눈감아 주다 보니, 이 사회는 열심히 일한 노동자에게 마땅한 대가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재벌만 정치권력과 합작하여 배를 불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되고, 재벌들의 불법적 행동은 점점 과감해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2100만 명의 노후를 보장해야 하는 국민연금에까지 손을 뻗쳤던 것입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인해 이런 사실들이 들통 나고 국민들의 촛불 여론에 밀려 처음으로 삼성 그룹의 실질적 총수가 구속되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자기가 지은 집에서 들어가 살고, 자기가 기른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먹을 수 있도록 하려면, 이리가 양을 잡아먹지 못하도록 힘으로 약한 이들을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노동이 기쁨이 되고, 권력자의 횡포가 사라지고, 공의가 베풀어지는 세상을 이사야 예언자는 하나님의 새로 창조하실 새 하늘 새 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부나 정치적 힘, 문화적 권력을 소수가 독점하면 대다수의 서민들이 제 명에 살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나라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로 권력을 나누었습니다. 또 이들이 서로 견제하며 국가를 위해 잘 봉사하도록 언론이라는 감시의 눈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미처 국가가 하지 못하는 것들은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진국으로 가면 갈수록 비정부기구들이 다양한 활동을 합니다. 이런 모든 장치들이 제대로 운영되면 우리 사회가 하나님 나라에 훨씬 더 가까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사회를 건설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는 사회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손발을 가진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일은 계속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사회를 좋게 만들어도 사람이 자기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면 늘 불안과 두려움, 삶의 무의미, 허무에 빠져 살기 쉽기 때문입니다. 혼자 밥을 먹고, 그것이 편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식단은 가정식 백반이라고 합니다. 경쟁 사회에서 뒤처질까 하는 불안과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하는 치열한 싸움 속에서 현대인들은 정말 자기마음 둘 곳 하나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입니다. 작은 일에도 흔들리는 마음, 쉽게 상처받고, 자주 무너지는 나약한 마음이 담대한 심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께 나아와 그에게 배워야 합니다.
[이미 시작된 나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그래서 언젠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온전히 이루실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완성될 그날을 앞당겨서 지금 여기서 이루어가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성가대가 부른 찬양은 제가 부탁한 찬양입니다. 이 찬양의 제목이 바로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기다림에 지쳐서 잠든 새벽녘
밤새도록 내리는 새벽이슬 같은
아직 오직 않았다고 절망할 때에
이미 내 삶 한복판에 꿈틀대는 나라
그의 나라, 그의 나라, 이미 시작된 그의 나라!
그의 나라, 그의 나라, 이미 시작된 그의 나라!
아름다운 꽃무리 보고 싶거든
여린 새싹 소중하게 보듬는 일부터
그의 나라 나로부터 시작되는 나라
이미 내 삶 한복판에 꿈틀대는 나라"
이 노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의 삶 한복판에서 시작되었다고 노래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손만 내밀면 잡을 만큼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는 이미 온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언제 어디서든 맛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정 그런 나라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 대신 돈을 원하거나, 흥분되는 어떤 일을 원하거나, 드라마 주인공처럼 살기 원합니다. 슬픔과 두려움은 놓아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붙들면 되는데, 오히려 하나님 나라가 아닌 것들을 꽉 붙잡고는 힘들어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의 변화 없이도 있는 그대로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전쟁터 한 복판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하나님 나라가 이미 여러분의 곁에 와 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붙드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그 어떤 삶에도 만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십시오. 여러분 마음 안에 하나님을 모시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을 진실로 모시면 여러분 가정이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나의 고집이나 편견, 오해나 욕망, 집착을 하나님 나라보다 앞세워선 안 됩니다. 혹 지금까지 그랬다면 회개하십시오. 이리와 어린 양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성립되려면 이리가 풀을 뜯어야지, 어린 양에게 이리의 명령에 순종하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독을 품지 말고 흙을 먹이로 삼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려면,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독소를 빼어내고, 서로 상하거나 해치지 않도록, 피를 보지 않도록 진리의 말씀에 우뚝 서야 합니다. 촛불을 통한 여론의 형성이 지금 한국의 많은 면들을 바꾸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하나님 나라를 가꾸기 시작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더 눈부시게 달라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최선을 다합시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이고,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갈릴리로 가신 주님, 오늘 우리도 주님 따라 오늘의 갈릴리로 가게 하소서.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 죽음의 그늘진 땅에서 고생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참된 복음의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그로 인해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때문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줄 아는 비결을 누리게 하시고, 주님 예수님의 명령 따라 오늘 자신들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계속 일구어 나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