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미학적 자기됨''이라는 이 글에서 신 박사는 키에르케고어의 미학적 실존을 분석한 뒤 그 한계로 "가능성이 현실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신 박사는 "키에르케고어는 주구장창 '실존하라'고 외치며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우리를 일상 밖으로 이끌어낸다"라며 "그리고는 '자기(self) 자신이 되라'고 말한다. 현대철학에서 '자기'는 굉장히 흥미로운 새로운 자아 개념이다. 아까 일상에서의 정체성이 밖으로 나가면 다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때 하나님과 관계하면서 비로소 새롭게 또 다른 나의 정체성이 생기는데, 그게 바로 '자기'다. '자기'는 말하자면 본래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던 모습인데 일상에서는 그것을 잊고 사는 것이다. 죄 때문이다. 이는 개인의 죄를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악 때문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키에르케고어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구원의 길을 찾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며 "종교적인 용어이지만, 철학에서는 '자기'가 구원에 상응하는 용어가 된다. 그런데 자기가 된다는 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일차적인 존재가 아니라 매우 복합적인 존재여서 인간 내면에는 완전히 대립하는 성질이 두 축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대립하는 두 축으로는 무한과 유한, 시간과 영원, 가능과 필연 등을 듦 이것들이 "내 안에서 서로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다. 그럼에도 우리의 내면에는 또 무한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이 갈등의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온전한 인간이 된다고 보는데, 이를 가리켜 '종합'(synthesis)이라고 부른다"며 "종합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관계할 때 유한한 인간은 무한성과 관계하며 종합을 이루고 자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되는 것은 나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라고 신 박사는 전했다.
신 박사는 키에르케고어가 감각을 단지 이성의 보조 수단 정도로 보던 사조 속에서 "기독교를 끌어들이며 감각에 독립적인 위상을 부여했다"고 평가하며 "그는(키에르케고어) 기독교야말로 감각론을 하나의 독립적인 영역으로 세상에 처음 들여온 종교라고 말하며 이것을 그리스 사상에 대한 기독교 종교의 "역전"이라고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키에르케고어가 이처럼 주장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는 "성육신 섭리 때문이었다"고 진단한 그는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체'(體)가 어느 종교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감각을 결코 간과할 수 없었고 이 관점에서 키에르케고어는 미학적 실존을 부각시킨 것이다"라고 부연했다.
아울러 "감각은 정신과 대립하지만 정신과 비등한 위치에서 독립적 위상을 지니게 된 것이다"라며 "이처럼 감각에 새로운 위상을 부여한 키에르케고어를 통해 미학이 진리와 연결되고 미학적 실존이 하나님과 관계하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어 미학적 실존이 자각하는 것들로 "불안, 절망, 권태, 허무, 우울 등의 실존 감정"을 꼽은 신 박사는 이런 것들을 키에르케고어가 비존재로 분류한 것에 주목했다. 그는 "이성의 시각에서 보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며 "그런데 비존재가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사상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바로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불안이나 절망은 부정적이고 우울한 감정이지만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현실의 가능성이 된다고 키에르케고어는 본다"고 밝혔다.
이처럼 가능성과 비존재를 담지하는 미학적 실존이 키에르케고어에게 "문제 많은 실존이 아니라 오히려 실존의 지평에서 새로운 현실의 가능성을 자각하는 매우 중요한 실존적 위상을 지닌다"라고 강조한 신 박사는 또 "그런데 가능성은 현실이 되고 비존재는 존재로 되어야 한다"며 "'자기'가 되고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되어야 미학적 실존은 키에르케고어적 의미의 실존 이념에 도달한 것이다"라고 전했다.
신 박사는 그러면서 "미학적 실존 자체는 가능성만 지닌 불완전한 존재다. 가능성이 현실로 이행하고 비존재가 존재로 이행해야 미학적 실존의 자기됨은 이루어지는 것이다"라며 "이것이 미학적 실존의 구원이자 미와 예술이 구원과 맞닿는 길이다. 그리고 이 길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인 키에르케고어의 주장이다"라고 전했다.
그는 "그런데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이성도, 지성도, 감성도 아닌 믿음뿐이에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것이다"라며 "그런데 사실 믿음은 실천이 너무 어렵다. 이론이 있어야 실천이 따르는데 믿음에는 이론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전했다.
이어 "키에르케고어가 구분하고 있는 미학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이성 종교) 모두 믿음의 벽에 가로막혀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되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이다"라며 "키에르케고어는 각 실존이 부딪히는 이 한계를 모두 절망의 상황으로 분석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윤리적 실존이 믿음에 실패해 필연성의 절망에 주저앉는다면, 미학적 실존은 반대로 가능성의 절망에 주저앉는 것이다. 수많은 가능성을 담지는 하지만 믿음에 실패하며 가능성의 절망에 빠지는 것이다. 현실로 연결되지 못하는 가능성은 그저 신기루에 지나지 않기에 그렇다"고 신 박사는 덧붙였다.
가능성이 현실로 연결되지 못해 자기됨에 실패한 키에르케고어의 미학적 실존의 한계를 극복한 인물로 폴 리쾨르를 언급한 그는 이어 리쾨르의 상징해석과 이야기 해석학에 기대어 가능성이 현실로 연결되는 발판으로 리쾨르의 '해석학적 믿음'에 주목했다.
신 박사는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자유의지로 따르며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얻었듯이, 독자도 텍스트 안에서 존재의 힘을 자유의지로 따르고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부여받는 것이다"라며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제자, 독자와 존재의 힘 사이에는 믿음이 작용한다. 리쾨르는 후자의 믿음을 가리켜 '해석학적 믿음'이라고 부른다. 해석학적 믿음은 하나님과 직접 관계하는 초월적 믿음은 아니지만, 준(準)믿음이라고 볼 수 있다. 사울이 바울로 변하는 그런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니지만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나를 본연의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텍스트 안에서 일어나는 믿음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리쾨르의 삼중의 미메시스를 분석하며 "미메시스 1, 2, 3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나는 점점 더 하나님이 나에게 놓아주신 본래적 모습으로 회복되어 가고 나를 둘러싼 세상도 점차 더 나은 세상이 되어가는 것이다"라며 "이게 미와 예술을 통한 구원의 길이고 '미학적 자기됨'의 길이다. 키에르케고어의 미학적 실존이 믿음의 벽에 막혀 가능성에 주저앉았다면, 리쾨르의 텍스트 세계 안의 실존은 '해석학적 믿음'을 통해 새로운 자기가 되며 가능성을 현실화한다"고 전했다.
한편 신 박사는 앞서 이 글에서 서구 개신교 전통이 진과 선에 쏠려 미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 동양 사상에서 지와 덕에 방점을 찍은 나머지 체를 소홀히 했다는 점을 꼽으며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있어서 미와 체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의 미학적 자기됨의 길을 찾는 과정도 개신교 전통에서 간과하기 쉬운 미(美)와 체(體)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현대적 재해석 시도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