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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19세기 영국 기독교 민중 여성작가들": 오정화, 『19세기 영국 여성작가와 기독교』(이화여대출판문화원, 2017) (1)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 철학적 신학, 민중신학)

입력 Apr 14, 2017 01:05 PM KST

존경하는 오정화 선생님,

오정화
(Photo : ⓒ 이화여대출판문화원)
▲오정화, 『19세기 영국 여성작가와 기독교』 표지

몇 주일 전, 이화여대 출판부에서 선생님의 최근 저서 『19세기 영국 여성작가와 기독교』를 출판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제가 사는 일산 아파트 근처 책방에서 주문했습니다. 제가 이 책 제목을 보고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세기 영국의 시대정신과 지성, 특히 집단 지성에 대한 관심에서였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최근 아시아 태평양 지역 YMCA연맹에서 "종교개혁 500주년과 YMCA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강연 부탁을 받고, 논문을 발표하게 되면서 15,16세기에 영국과 체코 그리고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의 시대정신과 인문사회과학적 배경에 대해 연구하였고, 그 내용을 1844년 영국 런던의 커튼, 휘장류 직물 공장 관리인 조지 윌리엄스(George Williams)가 시작한 YMCA운동과 연결하여서 오늘의 세계와 아시아에서 YMCA운동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모색할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제 논문과 강연을 준비하면서 19세기 영국의 사회상이나 지식 사회에 대해서 제가 너무도 무식하다는 것을 통감하였습니다. 다만 제가 알고 있는 바는 1844년이라는 시대가 영국이 산업혁명의 한가운데 있었다는 것, 그리하여 농촌의 청년들이 산업도시가 된 런던으로 몰려 와서 엉성한 공장에서 중노동을 하고 런던의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윌리엄스는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의 기독 학생들을 중심으로 공장 지대에 성경 연구반을 만들어 청년 노동자들과 함께 "기독교 청년회"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이미 마르크스(Karl Marx)와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런던 박물관에서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 1848)을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런던 YMCA의 창시자 윌리엄스는 독실한, 이른바 "저교회(low church)" 전통의 조합교회(Congregational Church) 교인이었습니다.

신학대학원에서 세계 교회사를 학습하면서 영국 교회사도 배웠지만, 청교도 운동과 아울러 감리교 선교운동과 경건운동 등, 영국 국교와 천주교와의 갈등, "high Anglican," "low Anglican" 등 복잡한 교회 권력 관계에 대해서 "골치" 아팠던 기억만 남아 있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집단 지성, 그 시대의 문학, 음악, 회화 (미술) 등을 통해서 영국의 기독교 신학과 기독교인들의 신앙 양태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연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제가 회장(1994-98)으로 몇 년 동안 온 세계를 돌아다니고 스위스 세계 YMCA연맹을 이끌어 온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 시대의 문학 작가들이 19세기 영국을 어떻게 그리고 있었는지 우선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사회 소설"부터 읽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오정화 선생님의 책 제목이 눈에 들어 왔고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특히 1844년 공장지대, 도시화되는 런던의 한 복판 직물 공장에서 조촐하게 시작한 YMCA의 청년 노동자들이 읽었을 만한 문학작품이 무엇이었을까? 산업혁명과 공산주의가 태동하는 시대, 대형 증기범선이 최신 무기로 중무장한 군대를 싣고 5대양 6대주를 돌아다니며 "노략질"하는 시대의 문학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런 질문을 가슴에 품고 있던 저에게 선생님의 책 제목은 너무도 반가웠습니다.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역사적으로 서구 기독교의 종교개혁이 영국의 기독교의 구조변화라고 할까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는 데 주목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영국 구교인 성공회(Anglican Church)를 비롯하여,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 루터교, 조합교회, 그리고 유니테리안 등에 이르기까지의 교파가 분립되었다는 점을 부각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들 개신교 교파들의 신학을 통 털어서 "복음주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유럽의 15,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이 영국의 개신교 "복음주의" 신앙에 끼친 영향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였습니다. 나아가서 종교개혁 운동으로 일어난, 18,19세기 영국의 개신교 교파 교회 생활에서 성장한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기독교 신학의 눈으로 분석하였습니다.

마침 올해가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을 기점으로 하는 500주년으로 독일교회를 주축으로 온 세계 교회가 여러 가지 형태로 기념하며 각종 행사를 준비하거나 진행중에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이에 한몫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책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종교개혁이 영국 개신교뿐 아니라 여성 작가 개인의 신앙과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한 점입니다. 특히 신학자로서 이 점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종교개혁 운동의 사상 중, 성경중심 사상에 주목하게 됩니다. 기독교 성경을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두게 된 것은 중세 기독교의 "교리" 중심에서 벗어나는 혁명적 계기가 되었던 것은 문학적으로, 문자적으로 그리고 인문학적으로 지식의 패러다임 전환이었습니다. 급진적인 루터의 성서제일주의는 "성서가 없는 교황과 공의회보다 성서를 가진 평신도를 믿어라"라는 그의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영국의 여성 작가들의 손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옥스퍼드대학의 철학 및 신학 교수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 ca.1320-1384)가 신약성서를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하고 그의 동료 교수들이 구약성서를 영어로 번역해서 교인들 사이에서 읽히도록 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역시 "교회나 교리가 아니라, 성경이 진리와 생명의 권위"라는 반(反)로마 선언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의 루터보다 150년 전에 로마 교회의 독점물이던 라틴어 성경을 영국 백성들의 모국어로 번역해 냈던 것입니다. 그의 성경 번역 운동은 해협을 넘어 체코의 얀 후스(Jan Hus, 1371-1415)가 이어 받았으나 두 개혁운동가이며 성서 번역가는 로마 교화 공의회에 의해 "이단"으로 출교되었습니다. 후스는 화형에 처해졌지만, 위클리프는 1384년 예배인도 중 뇌졸중으로 사망했는데, 31년 후에 무덤에서 유골을 파 내, "부관참시," 화형에 처한 것도 모자라 그의 재를 강물에 뿌렸다고 합니다. 후스는 살아 있는 채 화형을 당했습니다. 이들은 종교개혁의 새벽 별로 모두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 운동가들이었고 종교개혁의 순교자들이었습니다.

위클리프가 영어로 번역한 성경책을 어떻게 보급했는지 조사를 해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요새 쓰는 종이에 필사했을까? 1300년대만 해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유럽에 보급되지 않았을 터인데, 아마도 중세 수도원에서 한 것처럼, 필사해서 신구약 성경을 가까운 친구들이나 교인들에게 돌린 것이 아닌 가 추측해 봅니다.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보급할 때만 해도 당시의 최근 인쇄술로 다량의 성경을 인쇄해서 보급할 수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성경을 교황의 손에서 뺏어내어 민중들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엄청 난 혁명적이고 이단적이고 저항적인 문화운동을 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과 집단 지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위클리프, 후스, 루터 모두 다 당시 중세 유럽대학의 교수들이었다는 데 주목하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중세 유럽의 대학은 르네상스의 산물이었고, 희랍 로마의 지식세계의 복원이라는 지적 활동의 중심이었습니다. 대학에서 라틴어만이 아니라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등 고대 언어를 필수로 배웠으며, 논리학과 수사학을 연구하였습니다. 르네상스 이전의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들이 가져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배웠고, "스콜라철학"을 탐구했습니다. 이러한 대학의 지적 풍토와 여기서 배양된 집단지성이 없이는 성경 번역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 운동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흑인 노예해방을 위한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한 말,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가 민주주의 정부 건설의 표어가 되었지만, 사실 이 말은 영국의 종교개혁의 "새벽 별"(morning star)이라는 별명을 가진 위클리프의 말이라고 합니다. 위클리프는 성경 번역 작업을 민주주의 정부 이념과 수립과 연결시켰습니다. "성경이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를 만들 것이다"는 신념으로 해서, 성경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 것입니다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존 위클리프"). 루터 역시 일반 백성들이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과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게 됨으로써, 즉,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 연결될 수 있게 된 이상, 교황이나 신부의 도움이나 중개 없이 직접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성경을 읽고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고 그 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신념은 "만인사제론"(Priesthood of all believers)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접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사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혁명적인 민주주의 사상,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한 존재"라는 근대적 민주주의 사상의 뿌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의 모국어 번역과 해석의 자유와 민주주의 평등사상 등이 개인의 주체성과 하나님 앞의 단독자로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평등사상이 서구 근대사회를 여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서구의 르네상스에서 일어 난 인본주의(humanism)는 루터가 예기치 않았던 신학적 인본주의로, 그리고 18,19세기의 계몽주의와 함께 무신론적 인본주의, 인간 중심주의, 혹은 유물사상으로 변질되어 나갔습니다. 여기서 개인의 문제, 인간의 주체성, 개인주의, 개성의 문제, 인간의 정체성 문제 등, '인간의 자유' 담론이 근대 계몽주의 시대와 민주주의 시대의 철학적 신학적 사회 정치 경제 문제로 번져 나갔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독일어 성경을 보편화하면서 국민 교육 문제에 대해서 거론하였습니다. 수도원 학교와 교회 학교로 제한되어 있던 중세교육을 보편화하여 공교육과 의무교육까지도 주창한 것이 루터였습니다. 개신교 종교개혁 운동은 교육제도의 개혁으로 확장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중세 유럽 인구의 90% 이상이 문맹이었던 것이 종교개혁 이후 인구의 대부분이 모국어로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적이 "문화혁명"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과찬은 아닌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당시의 정부 사람들에게 공교육에 있어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18세기와 19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가능했던 것도, 그리고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를 "문화 융성 시대"였다고 일컬을 수 있었던 것도 종교개혁을 통하여 성경의 문자를 해독하게 되고, 공교육과 보편교육을 통해서 국민 교육이 확장되었던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19세기 여성 작가들이 교육을 받고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 역시 루터가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데서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러한 문화적이고 문학적인 시대정신의 배경을 생각할 때 스위스 제네바의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개혁운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오정화 선생님이 19세기 여성작가들이 기독교인들의 엄격한 규율 생활과 금욕과 근면을 강조한 것을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일종의 반감과 반항을 언급한 것에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의 저명한 저서 『기독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s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밝힌 대로 금욕과 근면한 노동을 강조한 기독교 생활 윤리가 결국 부를 축적하게 되어 서구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아이러니입니다. 금욕이 탐욕적인 자본주의의 윤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칼빈의 "구원의 예정론"이 개입되어 있어서 한 개인이 구원 받았다는 증거는 바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는 결과와 현실로 "증명"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칼빈의 기독교인의 생활 윤리는 수도원 생활을 세속화한 것이고, 수도원의 금욕과 절제하는 생활과 수도원 농원에서 열심히 노동하는 생활을 산속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실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도 인간 개인이 가지는 직업을 "천직(天職)"으로 알고 소명에 응하여야 한다는 직업윤리, 혹은 노동윤리가 있었습니다. 칼빈은 이 천직 사상을 루터보다 더 보편화시키고 대중화시켰던 것입니다. 루터의 천직 사상은 귀족과 상층계급의 전문직에 한해서만 천직을 논했기 때문에 일반 노동계층의 천직 사상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학자들의 비판이 있어 왔습니다. 칼빈의 노동 윤리, 금욕적이며 근면한 노동윤리는 19세기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증가하는 노동 인구와 함께 설득력 있는 기독교 윤리로 강화되었던 것 같습니다.

위와 같은 종교개혁으로 형성된 영국의 개신교가 거의 모든 교파의 선교운동과 전도활동을 통해서 시대정신을 구성하고 민중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 나아가서 도덕적 에토스(ethos)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였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시대의 여성 작가들을 기독교적 작가들로 이름 짓고 개신교(복음주의적 기독교)의 틀 안에서 해석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해석과 분석을 유럽의 기독교 역사, 15,16세기에 시작된 유럽과 영국의 종교개혁 사상을 설명해야 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소개한 네 사람의 19세기 영국 여성작가들이 종교개혁의 정신을 정말 그대로, 충실하게 그들의 작품 속에서 이야기하고 몸으로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선생님의 해석과 분석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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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선] 크리스천 코스프레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크리스천 코스프레를 하는 듯 신앙과 생활이 유리된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대로 실천함으로써 증명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