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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칼럼] 부드러운 장벽
김기석 목사(청파감리교회)

입력 Aug 27, 2019 10:24 AM KST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정말 오랜만에 민통선 이북 지역을 다녀왔다. 연천군청을 지나 한적한 시골 마을을 한참 달리다가 불쑥 나타나는 검문소에서 출입증을 발부받고 또 한참을 달려 찾아간 곳은 임진강 가까이에 있는 연강 갤러리였다. 그 한적한 갤러리에는 이웅배 교수의 설치 미술작품인 '부드러운 장벽' 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시된 작품이라고는 '부드러운 장벽', '가로지르는 미로', '고랑포리-도밀리'를 주제로 한 세 점뿐이었지만 그 울림은 단순하지 않았다. 연천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분단의 질고가 빚어낸 가족사의 아픔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지향을 작품 속에 오롯이 녹여내고 있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관람자들은 2.7미터 높이의 '부드러운 장벽' 앞에 서게 된다. 철제골조를 지지대로 삼아 설치된 장벽은 사람들을 압도하지 않는다. 투명한 연질의 비닐이 커튼처럼 내걸려 있기 때문이다. 철조망 모양의 빗금들이 그려진 그 장벽 앞에 설 때 사람들은 대개 잠깐 망설인다. 건너편으로 넘어갈 문이나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입장을 거절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장벽 앞에서 발걸음을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비닐 커튼을 열어젖힐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즐겁게 월경을 감행한다. 긴 세월 분단의 장벽 앞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장벽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다. 그러나 발랄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아이들에게 그 장벽은 언제든 넘나들 수 있는 장치일 뿐이다.

장벽을 넘어간 이들은 '가로지르는 미로'와 만난다. 크레타의 건축가 다이달로스가 반인반수의 괴물인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 만들었다는 '미궁'을 본 딴 것이다. 이웅배 교수가 만든 미로는 역시 투명한 비닐로 만들어져 있다. 미로에서 길을 찾다보면 막다른 골목과 만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길을 돌아 나와 새로운 길을 찾는다. 그것이 규칙이라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가로지르는 미로'의 진짜 비밀은 원한다면 누구나 비닐을 들치거나 밀치면서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데 있다. 우리 속에 주입된 강고한 분단 의식은 장벽 너머를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미로 혹은 장벽은 가로지르려는 이들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문이 되기도 한다.

예수님의 삶을 '장벽 철폐'라는 말로 요약한 학자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문화 혹은 습속이 만들어 놓은 불가시적인 장벽 혹은 금지선에 갇힌 채 살아간다. 금지는 늘 터부와 결합하여 사람들의 의식과 삶을 옥죈다. 예수는 성과 속, 의인과 죄인,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았다. 금기에 갇혀 결코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분 안에서 형제자매의 우애를 경험했다.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에게는 늘 불온의 딱지가 붙는다. 그들은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사람, 기존질서에 균열을 내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곤 한다.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신앙인은 경계에 갇힌 사람이 아니라 경계선 너머를 상상하고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그 차별의 언어에 찔려 피를 흘리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그뿐 아니다.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혐오 발언이 마치 신앙적 태도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참 많다. 경계선을 철폐하기는커녕 경계선을 강화하거나 장벽을 만드는 일과 신앙이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갤러리의 이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잠시 당혹감을 느낀다. '고랑포리-도밀리'라는 주제의 작품이 있어야 할 그 넓은 공간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사방 벽면의 중앙부에 흰색 띠가 지나고 있음을 발견한다. 고랑포리와 도밀리는 연천군에 드리운 휴전선의 서쪽 경계와 동쪽 경계를 이루는 마을 이름이다. 작가는 그 두 지역을 가로지르는 철책선이 있는 자리를 지형적 특색에 따라 재현해 놓고는 그곳에 철책 대신 압박 붕대를 둘러놓았다. 한반도의 긴장과 대립을 표상하는 철책선 자리에 감긴 붕대는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픈 작가의 열망인 동시에, 단절과 적대의 공간을 소통과 환대의 공간으로 바꾸고 싶다는 기도처럼 보였다. 장벽을 운명처럼 여기는 이들은 결코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없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찢어졌던 것처럼 세상에 드리운 온갖 장벽이 무너질 날이 기어코 올 것이다.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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