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김기석 칼럼] 성과 속의 경계는 없다

입력 Sep 05, 2019 07:07 AM KST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의 '천사들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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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바르톨로메오 무리요의 천사들의 부엌(1646)

스페인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 1617-1682)는 네덜란드의 독립과 영국 함대에 의한 스페인 무적함대의 파괴 등의 사건의 여파로 스페인의 황금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던 때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도인 세비야에서 활동했던 화가입니다. 여전히 도시는 흥청거렸지만 무리요의 삶은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화업을 시작할 무렵 세비야에는 걸출한 두 명의 화가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벨라스케스와 프란시스코 드 수르바란입니다. 무리요는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수르바란의 그림을 보면서 그는 키아로스쿠로 스타일(chiaroscuro style)을 익혔습니다. 이 용어는 명암의 대비를 뜻하는 것인데 빛을 뜻하는 키아로(chiro)와 어둠을 뜻하는 오스쿠로의 합성어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배경을 어둡게 하고 인물들의 얼굴을 밝게 표현하는 이 기법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마드리드 방문은 무리요의 회화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루벤스와 반 다이크 그리고 이탈리아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자기의 화풍을 만들었습니다. 부드럽고 아련한 빛과 톤을 능숙하게 다루게 된 것입니다. 무리요는 주로 종교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수도원의 요구에 응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 가운데는 17세기 세비야에 살던 서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통해 그 당시 세비야의 거리풍경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종교화를 그리는 화가가 풍속화를 그리는 것은 가톨릭 세계에서 흔한 일이 아니었는데 무리요는 플랑드르 상인들의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 그런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멜론과 포도를 먹는 아이들'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간식거리를 즐기는 소년들의 천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린 거지'는 남루한 차림의 아이가 속옷을 들추며 이를 잡고 있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아이 발밑에 흩어진 새우 껍질은 그가 조금 전에 먹은 조촐한 음식을 말해주지만 아이는 비참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서산에 기울고 있는 햇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마치 인생은 그런 것 아니냐고 말하는 듯합니다. '주사위 놀이하는 거지 소년들'의 모습에도 궁핍함이나 비애는 담겨 있지 않습니다. '창가의 두 여인'은 여러 가지 서사적 상상을 하도록 만듭니다. 창문 덮개에 반쯤 몸을 가린 채 비스듬히 서 있는 나이든 여인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숨기려고 숄로 입을 가리고 있고, 한 손은 창턱에 팔꿈치를 기대고 다른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젊은 여인은 희미하지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바깥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어떠하고, 창밖에서는 어떤 정경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무리요의 시선은 따뜻합니다. 그는 장엄하고 높은 영적 세계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일상의 삶 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일 또한 즐긴 것 같습니다. 영적 생활과 일상생활은 무관한 것일까요? 무리요는 1646년에 마치 이 질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천사들의 부엌Angels' Kitchen'(180*450cm, 루블 박물관)이라는 대작을 그렸습니다. 사람들은 무리요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세비야 인근에 있던 수도원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San Francisco el Grande)에서 30년을 하급 수사로 일했던 페레스의 일화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그는 신심이 깊었기에 수도원에 들어왔지만 라틴어, 그리스어, 스콜라신학 수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주로 부엌 일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기도 생활에 열중했고,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 속에 머물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는 기도에 몰두하다가 그만 식사 준비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뒤늦게 깨닫고 허겁지겁 부엌으로 달려갔는데, 천사들이 이미 식사를 다 준비해 놓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우렁각시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나요?

무리요의 초기 그림들과는 달리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떤 서사를 전달하기 위해 적절하게 배치되고 있습니다. 화폭의 한복판에는 크고 화려한 날개를 단 두 천사가 마치 연단에 선 것처럼 우뚝 서 있습니다. 한 천사의 손에는 물 항아리가 들려 있고 다른 천사는 빵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정교하게 표현된 그들은 화면을 좌우로 가르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해서 좌측에는 부엌에 들어서고 있는 두 명의 귀족과 한 명의 상급 수사가 보입니다. 그들은 뜻밖의 광경에 놀란 듯합니다. 그들 앞에는 단정하게 무릎을 꿇은 채 기도에 몰입하고 있는 한 수사가 보입니다. 금빛 아우라에 감싸여 있는 그는 공중에 떠 있습니다. 후광은 보이지 않지만 무리요는 그가 경험하고 있는 영적인 희열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겁니다.

화면 우측에서 우리는 예기치 않은 장면과 마주치게 됩니다. 부엌일에 열중하고 있는 일단의 사람들이 보입니다. 어린이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입니다. 절구에 양념을 찧는 사람, 아궁이 위에 올려진 솥을 살피는 사람, 각종 채소를 다듬는 어린이들, 식탁을 정리하는 사람이 저마다의 일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분주함도 기도에 몰입하고 있는 이의 고요함을 깨뜨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놀라운 점은 그들의 어깨에 다 날개가 돋아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사들입니다.

무리요는 이 그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신앙생활에 열중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신다고 말하려는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성과 속의 경계를 짓는 일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거룩한 일이지만 밥을 짓는 일은 세속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앙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거룩함이란 특정한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접속된 모든 일상적 행위를 통해 나타납니다.

광야에서 돌을 베고 잠들었던 야곱은 꿈결에 하늘에 닿는 계단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사실을 두려움으로 깨달았습니다. 오직 그곳만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경외함을 품는 사람의 만남의 자리야말로 하나님의 집이 아니겠습니까? 기도와 금식, 찬양과 묵상은 경건 훈련을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종교적 행위에 열중하는 이들이 때로는 그렇지 못한 이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건 행위가 자기와 남을 가르는 기준이 될 때 거룩함은 자칫 폭력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일상의 삶 속에 스며들지 않은 경건은 위선이 되거나 교만이 되기 쉽습니다.

일상의 삶의 자리에 하늘 빛을 끌어들일 때, 일상은 경건의 통로가 됩니다. 청소를 하고, 밥을 짓고, 가르치고, 땀 흘려 일하고, 어울려 놀고, 사랑을 나누는 모든 행위가 거룩함과 무관한 행위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거룩한 삶의 특색은 아낌과 귀히 여김입니다. 30년 동안이나 수도원 부엌에서 밥을 지었던 하급 수도사가 경험한 그 깊은 삶의 신비를 무리요는 한 화면 속에 담아냈습니다. 영화의 미장센처럼 치밀하게 배치된 이 그림은 성과 속은 공간적으로 갈리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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