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네 마음을 지키라"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Sep 09, 2019 07:07 AM KST

- 잠언 4:23-27, 로마서 12:14-17, 요한복음 5:2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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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이 설교문은 기독교자살예방센터인 <라이프호프 LifeHope>가 제안한 생명보듬주일의 2018년 설교자료집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인간을 연구하면서 '거울 단계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태어난 지 6개월에서 18개월 된 어린아이의 행동을 바탕으로 한 이론입니다. 이 시기의 어린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막연하게나마 '나는 저거야,' '저게 나야'라는 식의 자기발견을 하게 됩니다. 아이는 손을 들어보고, 발을 움직여보고, 웃어보기도 합니다. 물론 아직 부분적으로밖에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더 이상 거울에 비친 이미지와 자기 자신을 혼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울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거울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제 아이는 '부모라는 이름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춰봅니다. 부모라고 하는 거울에 비친 자기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나갑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해, 부모에게 칭찬받기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에게 인정받을 때 아이는 자신을 인정합니다. 반대로 부모에게 거절당하면 아이는 자신을 부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때의 아이들은 엄마, 아빠 때문에 공부합니다. 엄마, 아빠 때문에 교회에 다닙니다. 자신을 비추는 부모라는 이름의 거울에게서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시간이 더 흘러 이제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더 이상 부모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가지고 자신으로 혼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 거울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거울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제 아이는 '친구라는 이름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게 됩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높아지기 위해 아이는 삽니다. 친구라고 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화려하면 자신이 화려한 것입니다. 친구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면 자신이 초라한 것입니다. 이때의 아이들은 친구가 가장 중요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말이 있지만, 이때의 아이들은 '친구 따라 지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인정을 못 받아도, 선생님의 칭찬을 못 들어도, 내 곁에 친구만 있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저 자신을 비추는 그 친구라는 이름의 거울에게서 인정받기 원합니다.

시간이 더욱 흘러 이제 대학생이 되고, 청년이 되어 어른이 된 아이는 더 이상 친구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가지고 자신이라 혼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 거울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거울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제 아이들은 세상의 물질과 가치관을 거울로 삼게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세상에서 높아지기 위해 삽니다. 당장 주머니에 돈이 많이 있으면 내가 당당하고 힘이 있는 것이고, 주머니에 돈이 별로 없으면 내가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다들 돈 많이 벌어서 떵떵거리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부자 아빠가 아빠고, 부자 친구가 친구입니다. 신앙생활도 나중에 부자가 된 다음에 취미 삼아 하면 됩니다. 그저 자신을 비추는 세상이라는 이름의 거울 속에서 인정받기 위해 살아갑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한 평생을 통틀어 온갖 거울에 자기의 모습을 비춰보면서 살아갑니다. 거기에 비친 자기 모습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백설공주> 이야기의 그 여왕처럼, 우리는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서서 이렇게 물어봅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부모라는 거울에 비친 모습, 친구라는 거울에 비친 모습, 소유와 지위라는 세상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남을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그 거울들에 비친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거울들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거기 보이는 내 모습은 실제의 모습과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반대입니다. 나는 왼손을 들었습니다. 거울 속의 나는 오른손을 듭니다. 나는 오른쪽으로 돌았습니다. 거울 속의 나는 왼쪽으로 돕니다. 거울을 통해 발견하는 자신의 정체성은 왜곡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라는 거울, 친구라는 거울, 세상이라는 거울,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라 하여도, 친구라 하여도, 세상의 그 어떤 물질과 가치관이라 하여도, 그 거울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이 불완전한 거울 앞에서 서로를 왜곡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희미한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왜곡되어 있기에 우리는 서로 오해하고, 서로 정죄하며, 서로 수많은 상처를 줍니다. 그 상처들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무너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거울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숙명처럼 그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고, "지금은 부분적으로 안"다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3:2). 주께서 다시 오셔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고 "내가 온전히" 알 때까지 우리는 희미한 거울 속에서 나와 우리의 부분적인 모습만 보고 삽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2).

그런데 바로 이 '지금'을 사는 것이 힘든 분들이 있습니다. 이 '지금'을 견디는 것이 너무도 버거운 분들이 있습니다. <한국 생명의 전화> 하상훈 원장은 아침에 출근하면 맨 먼저 야간 상담사들에게 어젯밤 별일이 없었는지 묻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늘 한두 건 신고가 있었습니다. 전화를 걸어온 분들 중에서 자살 위험이 심각한 분들은 119 구조대와 경찰에 신고합니다. 하원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매일 밤 걸려오는 상담요청자들의 사연을 경청하고 공감하다 보면, 그들의 고통이 마치 상담사 자신의 고통처럼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지금 그분들은 도움 받을 곳이 없고 이야기할 곳조차 없습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 혼자 남겨진 사람처럼 극심한 외로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살고 싶어 한다"고 하원장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어떤 도움의 손길도 받지 못할 경우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매일 평균 34명이 그렇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40분당 한 명꼴입니다. 자살시도자는 자살자의 10~20배에 이릅니다. 매일 약 300명에서 600명이 자살을 시도한다는 말입니다. 부자 나라들의 집합체라는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그리고 자살자 한 명당 평균 6명의 '자살 유가족'이 발생합니다. 남은 가족의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자살 유가족들의 자살 충동은 일반인에 비해 8배 이상이나 높습니다.

모레 9월 10일 화요일은 '세계 자살 예방의 날'(World Suicide Prevention Day)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자살예방협회(IASP)가 2003년부터 지켜왔습니다. 이 날을 앞두고 우리 교회 교우들도 지난 8월 말 <한국 생명의 전화>가 개최한 <생명사랑 밤길걷기 대회>를 다녀왔습니다. 왜 밤길을 걷습니까? 삶이 칠흑같이 어둡고 고통스럽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함께 걷다보면 희망의 아침이 온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1만여 명의 시민들이 함께 밤길을 걸으며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기독교자살예방센터인 <라이프호프 LifeHope>가 생명존중과 자살예방을 위해 한국교회가 연합주일로 지키자고 제안한 '생명보듬주일'입니다. '보듬다'(embrace, care, redeem, heal)라는 말은 '안다'의 방언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슴에 닿도록 꼭 안거나 포근히 얼싸 안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고 왜곡된 세상 속에서 지금을 살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보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고귀함을 성찰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 잠언 4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세상에는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도, 성실히 모은 내 재산도, 오래 쌓은 깊은 우정도, 그리고 죽어가는 환경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성서는 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생명의 근원'이고 거기에서 '생명의 샘'(springs of life)이 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마음을 다치고 빼앗겨 지키지 못하면 생명의 샘물이 말라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이는 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가 큰 차를 타면 그를 큰 사람으로 보고, 작은 차를 타면 작은 사람으로 봅니다. 누가 좋은 옷을 입으면 귀인으로 대하고, 편하게 입으면 업신여깁니다. 눈에 보이는 '겉 사람'만 볼 줄 알고 마음으로 보이는 '속사람'은 볼 줄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구부러진 말을 하고 비뚤어진 행동을 합니다. 거기서 우리가 상처를 받습니다. 거기서 내 마음이 상합니다. 내 생명의 샘이 흙으로 메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나를 판단하시고 정죄하시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시편 기자는 주께서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신다"(시편 51:6)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한다(이사야 26:9)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에 상처 받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거울에 비친 왜곡된 이미지로 나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자기 마음에 상처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어니 J. 젤린스키(Ernie J. Zelinski)의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실제의 자신과 다른,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중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당신입니다. 당신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당신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자부심이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당신만이 당신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심지어 어머니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언제나 당신 자신과 연애하듯 삶을 살아야 합니다."(『자신과 연애하듯 삶을 살아라』 중에서)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신 후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태 4:3)는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신명기 8:3)이라는 성경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소유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의 거울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대신 주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 12:1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사탄이 높은 산에 올라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을 때 이를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마태 4:9-10). 높은 지위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의 거울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만한 바리새인의 기도와 다만 가슴을 치며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한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 18:1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사탄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천사들이 받아줄 것이라는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마태 4:6). 누가 성전에서 뛰어내렸는데 천사가 받아주면 당장 유명인사가 될 것입니다. 인기와 명예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의 거울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린도전서 1:21)고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늘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삽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천하보다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부자이고 높은 자리에 있으며 유명해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가 연약할 때에도, 경건하지 아니할 때에도, 죄인 되었을 때에도,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도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했습니다(로마서 5:6-10). 이 세상의 흐릿한 거울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맑은 거울에서 비친 내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증언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느니라]"(이사야 43:1-5).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금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고린도전서 9:9). "온전한 것,"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한 지금을, "부분적으로 아는"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생명의 샘인 내 마음을 지키며 살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희미하고 왜곡된 거울로 가득한 세상을 버티어 낼 수 있는 힘을 제시합니다.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힘,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는 힘,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힘, 즉 사랑이라는 힘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오늘 읽은 교독문처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이 속성을 가진 사랑이라는 힘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말합니다(고린도전서 13장).

불행히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느 날 갑자기 맑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경제적 어려움이 해결되고, 운 좋게 합격하고, 성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하루는 여전히 의미하고 흐릿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아내야 하고, 믿어야 하고, 바라야 하고, 견뎌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버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가장 큰 유산은 모든 불완전한 거울들을 덮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철환 작가의 책 『곰보빵』 중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대여, 오늘 하루도 애썼다. 하지만 우리가 애썼기 때문에 오늘 하루를 살아낸 건 아니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소리 없이 우리 곁을 다녀간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하루를 살아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며 눈동자와 같이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참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소망을 품고 희미한 세상 속에서 생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 다른 생명을 보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대단한 결단과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를 참아주고, 서로를 믿어주고, 서로를 바라며, 서로를 견디어내면 됩니다. 서로의 손을 잡아주고, 서로의 옆에 있어주면 됩니다. 그런 '작은 사랑의 몸짓들'로 나의 생명과 너의 생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며칠 전 이화여대 2019년도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국제구호 운동가로 일하는 한비야 씨가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단상 위로 걸어가며 총장님과 악수를 나누는 그를 눈빛으로, 박수로 축하해주었습니다. 이제는 박사님이 된 그가 쓴 책 『그건 사랑이었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 역시 잘하고 있을 땐 요란하고 화려한 응원을 받고 싶지만 요즘처럼 기분이 가라앉거나 풀이 죽어 있을 때는 그냥 옆에 있어주는 응원, 따뜻하게 손잡아 주는 응원, 그리고 가만히 안아주는 응원, 그런 조용한 응원을 받고 싶다."

울고 싶어도 울 기운조차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온 몸이 떨리는 아픔에 골방에 들어가 울음을 삼키고 가까스로 몸을 추스를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순간에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손을 잡아 일으켜주면 그보다 더 큰 응원이 없을 것입니다. 그냥 옆에 있어주는 응원, 따뜻하게 손잡아 주는 응원, 그저 가만히 다가가 안아주는 응원 말입니다. 그런 '조용한 응원'이 생명을 지키고,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여러 이유로 심각한 충격을 받아 누구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군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누군가 손잡아주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처럼, 우리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로마서 12:15)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꽃보다 아름답고 천하보다 귀합니다. 아픔과 슬픔 그리고 절망 가운데 있는 이웃을 우리는 사랑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애도가 없는 위로는 자칫 위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절망의 위기에 빠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을 수 있는 곳, 남은 가족들이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되찾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가복음 8:36, 마태복음 16:26, 누가복음 9:25)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여러분의 마음을 더욱 지키십시오. 내가 가진 것이 없어, 높은 사람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칭찬해주지 않기 때문에 내가 귀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 모든 거짓 거울들에게서 상처를 받지 마십시오. 그 거울들을 모두 깨버리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편 54:4)입니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시편 36:9) 볼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모든 생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눈에 여러분은 보배롭고 존귀합니다. 이 하나님의 눈동자에 자신을 비추어보십시오. 그분의 눈동자가 바로 생명의 거울입니다. 그분은 '모든 생명의 생명'(Life of all life)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거울은 진리의 거울입니다. 이 참된 거울로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십시오. 생명의 샘이 거기서 나기 때문입니다. 아멘. (20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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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기석 칼럼] 로댕의 '대성당'

"마주보고 있는, 서로를 향해 기울어진 두 개의 오른손이 빚어낸 공간이 참 아늑해 보입니다. 손처럼 표정이 풍부한 게 또 있을까요? 노동하는 손, 기도하는 손, 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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