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절제미, 반본(返本)의 신앙
심광섭 전 감신대 교수

입력 Jan 06, 2020 04:06 PM KST

1. 절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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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심광섭 목사 페이스북)
▲렘브란트, Moses Smashing the Tablets of the Law, 1659

십계명이 새겨져 있는 돌판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머리 위로 치켜 올린 모세의 이 장면을 독자들은 한번쯤 보았을 것이다. 나는 렘브란트의 이 그림을 그의 <아브라함의 제사>, <눈먼 삼손> 및 <탕자의 귀향>과 함께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그림 중 하나다. 모세는 이 돌판을 바위 위를 향해, 아니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광란의 춤을 추는 미쳐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출애굽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세가 진에 가까이 와서 보니, 사람들이 수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모세는 화가 나서,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돌 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렸다."(출 32:19)

렘브란트는 이 작품에서 오로지 모세의 몸짓과 얼굴에 집중한다. 다른 화가의 작품들은 대개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을 보면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팔이 프레임이 되어 감싸고 있는 얼굴이 구성의 중심이다. 모세 뒤로 보이는 바위처럼 보이는 윤곽은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시내산)를 보여주는 간접적인 수단으로 사용된다.

후에 모세는 다시 산에 올라 하나님을 대면하고 십계명 판을 받아 내려오며(출 34:29), 이때 모세는 주님과 대면한 결과 그의 얼굴에 빛이 났다고 기록한다. 히에로니무스(제롬)는 히브리어를 라틴어로 옮기면서, 빛났다는 말을 뿔이 났다(cornuta)고 번역함으로써 이 번역은 고대 서방교회 표준 성경인 Vulgate에 담겨 정경이 되었으며, 그 후 모세를 그릴 때 뿔 달린 머리와 함께 그리거나 빛의 광선의 형식으로 그리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렘브란트도 뿔 모양의 머리채 형식으로 희미하게 뿔 모양을 그림으로써 간접적으로 이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이 큰 캔버스(167 x 135 cm)위에 그려진 모세의 얼굴에서 렘브란트는 모세의 슬픔과 분노를 드라마틱한 요소를 그리거나 효과를 바라지 않고 매우 절제된 형식으로 표현했다. 이 그림은 비교적 후기(1659년)에 그려진 그림으로 당시 그린 다른 그림에서처럼 감정이 매우 절제되어 감정의 중용(中庸)을 보여준다. 두 개의 돌 판을 집어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릴 정도로 화가 나 있는 모세를 기록한 성경과 다르다.

중용은 그저 단순한 가운데가 아니며 지나침(過)과 모자람(不及)이 없는 중간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過)와 불급(不及)이 없는 중간 위치라는 의미에서의 중용(中庸)은 동양고전에 없다. 중(中)이라 하는 것은 그런 단순한 가운데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감정이 아직 발현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喜怒哀樂之未發而 謂之中, 中庸章句 1) 어린아이의 감정상태이며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즉, 희로애락의 감정이 동적평형(dynamic equiliblium)을 이루고 있는 성(性)의 근원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화(和)라고 하는 것은 희로애락이 발현되어 상황의 절도에 들어맞는 것이다.(發而皆中節 謂之和, 中庸章句 1) 인간의 삶은 중(中)의 상태에서만 영위되지 않는다. 삶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자극에 대한 감정의 발현이 주어진 인간의 상황(節-삶의 모든 상황situation을 말함)에 들어맞는(中-적중하다의 의미)것이 바로 화(和)인 것이다.

공자도 감정의 중화를 이렇게 말한다. "≪시경(詩經)≫ 〈주남(周南)〉 〈관저(關雎)〉장은 즐거워하면서도 즐거움이 지나쳐 바름을 잃지 않았고, 슬퍼하면서도 슬픔이 지나쳐 화(和)를 해치지 않았다. 子 曰 關雎는 樂而不淫하고 哀而不傷이니라 "(論語, 八佾, 20)

렘브란트의 모세 그림은 성경의 감정의 과격한 발산과는 달리 감정을 발산하되 절제하여 깊은 감정의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중용과 중화의 美를 보여준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2. 반본(返本)의 신앙

모세는 금송아지 주변에서 그를 경배하며 춤추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화가 나서 손에 들고 있는 돌 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렸을 뿐 아니라,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였다.(출 32:19-20) 모세는 두 돌 판을 깨트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반본 신앙을 예시한 것이다.

후에 모세는 다시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지만(출 34:29) 그러나 바빌론 포로 후에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새 계약은 보이는 돌 판 위에 새긴 계약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가슴) 안에 새긴 계약이다.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3)

눈에 보이는 것들은 그것이 객관화되고 사물화되어 내 맘대로 관장할 수 있는 객체가 되어 나와 실존적으로 맺어진 것들이 되지 못하고 나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이 될 때, 그것이 금송아지 우상이든 하느님의 계명을 새긴 돌 판이든 크게 다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할례를 받은 것이나 안 받은 것이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고전 7:19)라고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 채찍에 맞아 살이 찢기고 그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드러냈다는 것은 의식 밖으로 대상화되거나 소유할 수 있는 형체가 될 소지가 완전히 없어지고 물질과 생명의 요소(element)인 근본으로 돌아갔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만물 안에 스며든 하느님의 무량한 사랑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한 것도 눈에 보이고 객관화할 수 있는 대상을 아주 작은 알갱이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마시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체화하는 근본으로 돌아가는 종교적 행위라고 생각된다.

결핍으로서의 존재인 인간은 무한한 욕구인 완전한 사랑이신 신을 꿈꾸며 산다.

나는 神을 믿지 않는다
나는 神을 꿈꾼다

神은 내게 모랄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내게 욕구의 대상이다

神을 꿈꾸기
나는 詩를 쓰며 욕구로서의 자아를
갈망한다

한 쪽 어깨는 너무나
아래로 기울어져 있고
한 쪽 어깨는 너무나
위로 날아올라가는
-김정란 , 「결핍으로서의 존재」 -어두움의 기록·3 (앞부분)

늘 처음 하는 일인 양 뒤뚱거리는 삶, 일하기, 글쓰기, 놀기, 여행하기, 운동하기, 공부하기, 예배하기.... 시인에게는 시쓰기 등은 존재의 현기증, 어둠 속에서 생명의 근본 에너지와 만나려고 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가려는 혹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현존재(Dasein)의 끊임없는 시도들, 갈망의 순수함이다.

나의 詩쓰기

나는 뒤뚱거리며 그러나 어쨌든
앞으로 나아간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갈망의 순수함만이
닫혀진 봉인의 비밀처럼
빛나고 있을 뿐

오늘 내가 몇 번이나
존재의 현기증으로
되돌아서는,
어두움 속에서
-김정란 , 「결핍으로서의 존재」 -어두움의 기록·3 (뒷부분)

사찰의 대웅전 벽에 그려진 십우도(十牛圖)의 제九도가 그림에서 보는 반본환원(返本還源)이다. 반본환원은 티끌 하나도 없는 수록산청(水綠山靑)의 광경을 그렸다. 즉 그의 본심은 본래 청정하여 아무 번뇌가 없어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보게 되며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얻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통해 모세가 십계명 판을 깨트리는 뜻을 새롭게 깊이 새겨본다. 생명의 근본인 하느님의 사랑에 돌아감으로써 감정의 최고상태(極)인 중용의 미를 그려본다. 인간의 본래적 원천은 청정한 마음이며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여여(如如)한 모습이며, 이것은 모두 기독교 신앙으로 보면 하느님의 사랑의 구현체들이다.

※ 이 글은 심광섭 목사(전 감신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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