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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라의 웃음

2016년 7월 17일 경동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채수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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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경동교회 채수일 목사

성경본문

창세기 18:1-10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장막 안에 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들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고, 사라는 월경마저 그쳐서,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난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 때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면서 '이 늙은 나이에 내가 어찌 아들을 낳으랴?' 하느냐?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다시 너를 찾아오겠다. 그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였다.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골로새서 1:24-28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파하게 하시려고 내게 맡기신 사명을 따라,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 비밀은 영원 전부터 모든 세대에게 감추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 성도들에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 가운데 나타난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성도들에게 알리려고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요,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권하며,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누가복음서 10:38-42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설교문

1. 아브라함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이른바 세계의 3대 종교가 모두 '신앙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이 무엇인지,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위해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추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에서 아브라함은 홍수 심판(창 6장-9장)과 바벨탑 사건(창 11,1-9) 이후, 노아의 후손이자 셈의 후손인 데라가 70세에 난 아들로 등장합니다(창 11,26).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며느리 사래,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아내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했다(창 11,27-32)고 합니다. 데라가 그 가족과 함께 왜 비옥한 땅, 갈대아인의 '우르', 당시 최고의 국제도시를 떠나야 했는지, 그 이유를 성서는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세계의 3대 종교로부터 신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배경에는 그가 어느 날,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창 12,1) 순종했고, 또 그가 100세에 얻은 유일한 아들 이삭, 그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다시 바치라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 사건이 있습니다.

고향, 곧 땅과 친척과 아비의 집은 사람의 생존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안전한 자연적, 사회적 기반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보상은 야훼가 장차 보여줄 땅이고,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것도 단지 하나의 약속일뿐입니다. 보여줄 땅, 아직 보지도 못한 땅,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도 하지 못한 땅에 대한 약속,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러나 아직 현실이 아닙니다. 이 땅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에게 보여주시려 한다는 것뿐이고, 그의 아내는 아직 출산도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큰 민족이 될 수 있단 말인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그 약속을 회의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이에 아브람이 야훼의 말씀을 따라갔다'(창 12,4)고 지극히 간단한 한 마디로 보도합니다.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이방인이었던 조상들이 어렵게 정착했던 땅에서 아브라함은 다시 이방인의 삶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알 수 없고 불안한 미래, 그러나 전적으로 야훼의 손 안에 있는 특별한 길로 자신이 인도되고 있다는 믿음만으로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떠납니다(창 12,5).

그렇습니다. 믿음은 히브리서 기자가 증언하듯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믿고,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것들만 따라갑니다. 미래가 보장되었다는 확신이 들 때만 현재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갔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입니다. 치밀하고 현실성 있게 계산되고 계획된 미래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열려있고, 그 무엇도 예측할 수 없는, 희망과 절망, 기대와 실망, 환희와 좌절의 가능성이 교차하는 불확실성의 한 복판에 자신을 무작정 던지는 것은 쉬운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쉬운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건곤일척(乾坤一擲), 하늘과 땅을 걸고, 즉 결과를 오직 하늘에 맡기고 승패와 명운을 걸어 마지막으로 거는 승부입니다. '건곤일척', 홍구(鴻溝) 강을 사이에 두고 휴전했다가 마지막 전쟁에서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유방을 노래한 당나라 최고의 문장가 한유(韓愈)가 기원전 203년에 쓴 '과홍구'(過鴻溝)라는 칠언절구에 나오는 말입니다. 유방에게 건곤일척은 천하통일을 위해 항우에게 던진 승부수였지만, 아브라함에게 건곤일척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건 승부수이자,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건 승부수'였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후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100세에 겨우 얻은 유일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할 것인지, 건곤일척의 기로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정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선택하셨던 아브라함을 포기하고, 자신의 약속을 실현하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져야 하시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승부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이름을 걸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자신의 믿음을 걸었습니다.

삶의 매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건곤일척'해야 할 상황에 처한다는 것은 힘들고 불행한 일이고 또 아무리 신앙인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살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에게 승부수를 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건곤일척'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신앙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고향을 떠난 이후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그가 위대한 믿음의 삶과는 오히려 무관할 정도로, 매우 소심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으로 서술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들자 곧바로 이집트로 피난합니다(창 12,10).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믿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곳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라고 믿었다면, 어떤 기근이나 재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땅을 떠나서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곧바로 이집트로 피난한 것이지요. 그는 신앙의 사람(homo fides)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의 사람(homo diffidentiae)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아브라함은 자기를 죽이고, 그의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빼앗아 갈 것이 두려워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하고, - 물론 이것은 사실이지만 - 그 때문에 아내를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빼앗기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소심하고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창 12, 11-16). 그런데 이런 일은 아브라함이 가데스와 술 사이의 그랄에 거류할 때도 반복됩니다(창 20,1-18).

아브라함의 우유부단함과 소심함은 본부인 사라가 질투 때문에, 이집트 출신의 여종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낼 때에도 - 일부다처가 공인된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 무기력하게 사라 편에 서는 데서 드러납니다(창 16,6).

사실 아브라함에게 세 천사가 나타나 사라의 출산을 예언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면서(창 17,1),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창 1,16)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자 말을 합니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창 17,17).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은 이집트 출신의 몸종, 대리모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에게 비아냥거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체면을 살려주는 웃음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왜 이런 아브라함에게 내려졌는지 성서가 아무런 해명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의 삶에서 신앙인으로서 어떤 영웅적인 모습도 우리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사의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것, 성서는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을 찾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신앙의 조상이 된 이유,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찾으셨고, 아브라함은 단지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는 더욱 어려웠지만, 아브라함은 불가해하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고, 마침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2. 이것은 아브라함의 아내이자 이삭의 어머니인 사라 이야기에서도 드러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지나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하신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히 11,11)라고 말하지만, 사실 창세기의 사라는 천사들의 약속을 믿을 수 없어서 웃었던 여인입니다.

웃음에도 수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가가대소(呵呵大笑: 껄껄 웃음)부터 가소(假笑: 거짓웃음), 건소(乾笑: 건성으로 웃는 웃음), 경소(輕笑: 남을 업신여겨 웃음), 냉소(冷笑: 비웃는 웃음. 업신여겨 웃음), 대소(大笑: 소리를 내어 크게 웃음), 미소(微笑: 소리를 내지 않고 가볍게 웃음), 박장대소(拍掌大笑: 손뼉을 치며 크게 웃음), 실소(失笑: 참아야 할 자리에 툭 터져 나오는 웃음), 염화미소(拈華微笑: 붓다가 영산회에서 연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보이자, 제자 가섭(迦葉)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하므로 그에게 불교의 진리를 주었다는 데서 나옴), 파안대소(破顔大笑: 활짝 웃음), 폭소(爆笑: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 등 정말 많은 웃음이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너털웃음, 눈웃음, 비웃음, 선웃음, 소웃음, 쓴웃음, 억지웃음, 찬웃음, 코웃음, 함박웃음, 헛웃음 등이 있습니다.

사라가 웃음은 어떤 웃음이었을까요? 여자였으니 분명히 너털웃음은 아니었을 것이고, 어쩌면 쓴웃음이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라에게 천사의 말은 덕담으로조차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고향을 함께 떠날 때부터 지금까지 아기를 가질 수도 없었는데, 임신할 수도 없는 나이에 웬 아들? 아니 고향을 떠날 때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키시지 않았는데, 이 천사들은 웬 헛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웃음, 냉소였을지 모릅니다. 사라는 분명 아브라함 같은 신앙의 인간(homo fides)이 아니라, 불신의 인간(homo diffidentiae), 의심하는 인간의 전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적 상식과 가능성을 넘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삭을 낳은 후, 사라는 혼자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셨구나. 나와 같은 늙은이가 아들을 낳았고 하면, 듣는 사람마다 나처럼 웃지 않을 수 없겠지'(창 21,6).

어쩌다 실수하여 늦동이를 본 늙은 여인의 웃음이 아닙니다. 이 웃음은 하나님이 주신 웃음입니다. 사라의 첫 번째 웃음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본 불신의 웃음이었다면, 두 번째 웃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본 믿음과 기쁨의 웃음입니다. 믿음은 '이미'의 삶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마치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사는 삶,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기도할 때, 이미 기도가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 하는 기도가 참 기도인 것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던 마르다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입니다'(눅 10,41-42). 단 하나만을 위하여, 단 한번만이라도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과 승부수를 건 경험이 신앙을 배우는 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과 씨름한 경험 없는 신앙은 종교적 관념이거나 교양이고, 관념과 교양으로 만나는 하나님은 더 이상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죽은 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신 승부수, 이해하기도 수용하기도 어렵고 힘든 그 승부수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처럼, 냉소가 미소로 변하는 길입니다. 이런 믿음의 길, 우리가 함께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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