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고 길희성 박사 추모글 기고

길희성
(Photo : ⓒ베리타스 DB)
▲고 길희성 명예교수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글에서 김 교수는 길희성의 학문적 정체성을 "'종교신학'"이라고 규정했다.

이 같은 규정에 대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종교학자이지만, 20세기에 크게 발전한 종교학의 성과를 기독교 신학에 조명하고 접목하면서 기독교 신학을 새로운 문명시대에 걸맞는 신앙으로 혁신하려고 노력한 학자요 진정한 영성가이자 신앙인으로서 그를 보려는 것이다"라고 그는 부연했다.

그러면서도 김 교수는 "위와 같이 길희성을 규정하는 것이 길희성을 좁은 의미의 기독교 종교영역으로 다시 복귀시키고 가두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라며 "불교학자들도 그가 인도 종교와 불교, 특히 중국 선불교의 임제 선사, 한국 불교 지눌 연구, 일본 정토종 신란 연구 등에서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정한다. 그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을 비롯한 가톨릭 신학과 동방 정교회 신앙, 그리고 유교와 원불교와 동학 연구에서도 깊은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을 학계에서는 모두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희성의 종교학과 철학과 인문학의 깊은 비밀을 알려면 그가 진정한 '예수쟁이'였으며, 인간적-역사적 참사람 예수를 지극히 애모하고 따르고 그분과 일치하려고 몸부림쳤던 진리 구도자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전했다.

길희성의 종교신학을 지탱하는 삼각대로는 파울 틸리히, 윌프레드 스미스, 루돌프 오토를 들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삼각대 중 하나인 파울 틸리히에게서 길희성은 (1) 궁극적 관심으로서 종교 이해, (2) 존재의 지반과 능력으로서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 이해, (3) 상징의 중요성과 종교에서 상징을 물상화하는 위험, (4) 종교의 속화(俗化)와 마성화(魔性化)를 비판하는 예언자 전통과 신비가 전통의 비판 정신, (5) 자율과 타율,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를 넘어서는 신율적 황홀한 이성개념을 배웠다.

또 윌프레드 스미스에게서 "근현대적 의미에서 말하는 종교 개념, 즉 '축적된 전통으로서의 종교'와 살아 있고 숨 쉬는 '경건한 신앙'을 구별하는 분별력을 배웠다"고 김 교수는 전했다. 마지막으로 오토에게서 "종교적 체험의 원초적 특징인 '성스러운 실재 체험의 현상학'을 배웠다. 또한 종교는(혹은 경건이나 영성은) 자연과학자가 강조하는 '인과율', 수학적/실증적인 것만을 인정하려는 단세포적이고 평면적인 합리성을 넘어서는 '초합리적/비합리적'(superrational/irrational)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

이러한 거장들의 어깨 위에서 현대문명을 멀리 넓고 깊게 바라보는 새로운 자기 사상을 피력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 김 교수는 이 글에서 길희성의 저작물 중에서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신앙과 이성의 새로운 화해』, 『영적 휴머니즘』을 중심으로 그의 '종교신학'이 우리에게 남긴 공헌과 과제가 무엇인지 세 가지만 골라서 그 문제에 집중했다.

첫째로 길희성이 우리에게 남겨준 공헌과 문제 제기는 "모든 지식/앎/체험은 왜/어떻게 가능하며 그것들이 진실한 것이라는 점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연구하는 인식론(epistemology) 문제에서 시작된다. 그 문제는 매우 중요한 쟁점인데, 길희성이 공공연하게 여러 번 공론화한다"며 "왜냐하면 길희성 말년의 역저 제목이 『영적 휴머니즘』인데, 계몽주의 시대 이후 소위 계몽된 지식인들은 영적인 것, 종교적인 것, 신앙과 하나님 은혜 체험 등을 개인의 취향 문제로 여겨 지성적 학문 세계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이어 "계몽주의 시대 이후 현대인들은 하나님, 영혼 불멸, 사후세계, 마음의 자유 등등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이성의 한계'를 금 그어준 임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적 혁명'의 충실한 신도들이 되어버렸다"며 "그 결과 세계는 신을 잃어버렸거나 망각하게 되었고, 신은 세계를 잃고 현실 세계와 관계없는 하늘나라의 군주처럼 여겨졌다"고 지적했다.

또 "그리고 현대인들은 자신을 단지 복잡한 생물학적 기계로 바라본다. 철학사에서 다루는 인식론을 여기서 재론할 수는 없지만, 칸트의 인식론이 가져다준 획기적 공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칸트 이전의 인식론은 크게 보아서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대륙의 합리론(rationalism)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영국적 경험론(empiricism), 이렇게 두 흐름으로 대변된다. 칸트는 이 두 인식론을 종합하여 양쪽의 일방적 주장을 동시에 비판했다"고 덧붙였다.

길희성
(Photo : Ⓒ베리타스 DB)
▲고 길희성 명예교수

합리론과 경험론의 종합을 시도한 칸트에 대해 그는 "칸트는 경험론의 입장을 일부 받아들여서 하나님, 영혼, 자유 등은 감각적 경험 대상이 아니므로 '형이상학적 지식'은 불가능하다고 했다"며 "그러나 인간은 감각적 오관을 통하여 외부에서 들어오는 수많은 자극/정보/자료를 일정한 질서와 법칙 아래 정렬시키고 비교하고 판단하고 살아간다. 칸트는 그러한 판단이 인간 마음의 '범주'(範疇)로 불리는 인간 정신의 '선험적인 능력과 인식 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합리론의 타당성을 일부 인정한 셈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길희성에 대해 "길희성은 인식론적 혁명으로서 소위 칸트의 '종합적 구성설' 이론이 갖는 공헌을 인정한다. 그러나 칸트의 인식론은 결국 하나님, 영혼, 영성 등 형이상학적인 실재들의 실재성과 믿음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을 양산하게 되었고 불가지론자들의 손에 그러한 문제들을 맡겨버린 셈이 되었다고 비판한다"고 했다.

아울러 "길희성은 자기 입장을 '비판적 실재론'이라고 말한다. 그는 '소박한 경험론'과 경험을 무시하는 '관념적 합리론'을 동시에 부정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순수이성은 형이상학적 지식에 접근 불가능한 한계성이 있다."라는 칸트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특히 "길희성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인간 영성은 선험적으로 하나님의 내주와 현존을 경험할 수 있으며, 그 신비한 경험은 주관적 환상이거나 망상이 아니라 진실이요 실재라는 것이다"라며 "그것은 인간 본래 마음의 본향이며 본래성이므로, 그의 종교신학은 신앙과 이성을 갈등 관계로 생각하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고 강조했다.

둘째로 길희성이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라는 두 진영의 갈등과 이분법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그는 "길희성의 종교신학이 전통적 기독교 신학과 현대인들에게 남긴 공헌과 과제는 오랜 세월 동안 신관과 실재관에서 상호 대립되어 온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고 제3의 길을 제시하고 강조한다는 점이다"라며 "길희성은 이 제3의 입장을 '자연주의적 초자연주의'(natural supernaturalism)라고 표현하는데, 그 개념 자체는 일반 대중들이 언뜻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이다"라고 했다.

길희성의 실재관과 신관에 대해 그는 "길희성이 말하는 제3의 길은 초자연주의와 무신론적 자연주의 및 범신론적 자연주의를 모두 부정하는 입장이다. 신과 세계의 관계를 "신이 만물에 내재하지만 동시에 초월하는 포월적(包越的) 실재"라는 신관으로 규정한다"며 "길희성은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과학과 종교, 이성과 신앙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하여 '포월적 실재'를 주장하며 전통적 초월주의에 갇혀 있는 한국 기독교에 성찰을 촉구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길희성은 사도바울의 말처럼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이 있다"(고전 15:44)는 것을 믿는다. 심지어 이 세상에서 극악무도한 삶을 산 사람에 대한 엄한 심판도 믿는다. 다만 예수께서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요 14:2)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때, 우리가 지금 '시공우주'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종류의 특별한 시공간이라는 단순한 사고를 넘어서라는 것이다"라며 "요즘 말로 하면 존재 양식이 다르고, 시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다르고, 몸의 영광이 다르고, 존재하는 것들의 진동과 주파수가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길희성이 전통신학에서 강조하는 유일회적 성육신론과 원죄론을 넘어섰다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 그는 "길희성은 엑카르트의 사상을 지지하면서 '유일회적 특별 성육신론'을 넘어서서 '보편적 성육신론'을 주장한다. 하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하여 갈릴리 나사렛 예수의 몸 안에서 특별하게 유일회적으로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문명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의 영혼 안에서 이뤄지는 은총 사건의 '범례적 표징'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 아들의 탄생, 말씀의 탄생, 혹은 단순히 하느님의 탄생은 엑카르트 영성과 신비 사상의 핵심 주제"이다"라고 했다.

또 "길희성의 종교신학에서 '보편적 성육신론'은 하나님과 피조세계의 관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신의 자유로운 의지 행위로서의 창조'라는 전통적인 은유 대신 어머니가 자녀를 낳듯 '낳는다'라는 은유를 강조한다. 어머니가 낳은 자녀들은 독립된 개체 인격체로서 어머니와 구별되지만, 여전히 어머니와 닮은 생물학적 유전자를 갖는다. 그렇듯 절대 거룩하고 자유롭고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연약한 피조물 특히 인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론적 관계성을 '선험적으로' 갖게 된다. 이것이 '인간 영성'의 존재론적 근거이다. 태초의 시원적 창조, 지속적 창조, 종말론적 완성으로서의 창조가 수미일관 회통된다"고도 했다.

끝으로 "길희성의 종교신학적 인간학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보편적 은총'과 '선행적인 은총'(prevenient grace)을 인정하지만, 도덕적-영적 수련 및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 은총론을 본회퍼와 함께 '싸구려 은총론'이라고 비판하고 이를 비복음적, 아니 반복음적 신학이라고 경고한다"며 "정통 신학이 강조해 왔던 '인간성의 전적 타락', '원죄론', '행위 없는 믿음만으로의 구원' 등은 4개의 복음서에서 예수가 민중들에게 기대하고 격려하시는 말씀과 배치되는 경직된 도그마들이다"라고 김 교수는 전했다.

김진한 편집인 jhkim@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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