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경계선의 존재 - 예언자!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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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예레미야서 2장 13-19절

설교문

[예언이란 무엇이며, 예언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뒤 주일예배 설교의 성서 본문은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가진 신구약 성경의 순서대로 정하고 있습니다. 모세오경과 역사서를 지나 5월 마지막 주부터는 예언서들이 설교의 본문이 되었고,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예언자들을 다루게 될 터인데, 성서가 말하는 예언은 무엇이며, 또 예언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예언"이라는 말을 들을 때, 일반인들이나 교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앞으로 닥칠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 말한다고 하는 사전적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유명한 예언가 중 한 명은 150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프랑스의 천문학자이자 의사였던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1503년 12월 14일 ~ 1566년 7월 2일)입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청년 시절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 지나가던 한 수도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이름은 '펠리체 베리티'였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이 수도사를 만나자마자 무릎을 꿇고 "교황 성하께 무릎을 꿇나이다"라며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런데 1585년 그 수도사는 정말로 교황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그가 바로 식스토 5세였으며, 이것은 노스트라다무스가 죽은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 성경은 예언자를 선지자(先知者)라고 부르는데, 선지(先知)라는 말은 미리 안다는 뜻의 한자어이고, 성경에서의 예언도 미래의 일어날 일에 대한 언급이 있기에 예언자나 선지자를 노스트라다무스 같이 미래의 일을 말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나 '예언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의 일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난 일에 대한 평가일 수도 있고,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하는 권면일 수도 있으며, 잘못에 대한 심판이거나, 겪고 있는 어려움과 환란에 대한 위로일 수도 있습니다. 설사 누군가 미래의 일을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감이나 계시가 아니라면 성경은 그것을 예언이라 부르지 않고, 또 그런 사람들을 예언자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점을 치거나, 혼을 불러내어 미래의 일을 알려고 하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됩니다(레 19:26, 31).

예언자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감과 말씀에 꼼짝없이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어떤 예언자는 제사장 가문 출신이고, 어떤 예언자는 왕실에 기용되기도 하고, 어떤 예언자는 양치는 목자였지만, 이들 모두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강렬한 소명 체험을 하고, 이전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평범한 미디안 목자로 살아가던 모세도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죽기 전까지 출애굽의 역사를 일궈냈기에 예언자로 불리고, 이사야는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라고 물으실 때,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라고 응답하면서 예언자의 삶에 접어들게 됩니다.

예언자들은 이제 자기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야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선포와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받은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 전하는 말씀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 모든 상황을 감내해야 합니다. 예언자의 심정을 잘 드러내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서 20장 7절부터 9절의 말씀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예레미야는 아시리아를 몰아내고 새롭게 부상하는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자신의 나라 유다 왕국이 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선포해야 했던 예언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의 비신앙적 행태를 정확하게 짚어내면서, 하나님의 정의 대신 이방신의 권력과 자신의 욕망을 향했던 모든 삶은 철저하게 갱신되어야 하고, 썩은 것들을 제대로 도려내야 한다고 말했고,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거센 저항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치욕과 모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는 주님의 말씀에 강렬함에 항복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 예언과 예언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습니다. 어떤 예언자는 하나님을 만나고 곧바로 말씀을 선포하지만, 어떤 예언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말씀 앞에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부족한 자신의 모습이 아주 절실하게 느껴지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감당할 수 없다는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을 보내달라는 고백을 하는 예언자가 있는가 하면, 자신은 말을 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예언자도 있습니다. 예언자 요나의 경우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내빼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상황들이 존재하지만 성경에서는 예언자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있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이나, 그 말씀을 듣는 백성들 모두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사람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신탁(神託)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고대사회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면서 예언의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면,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정신이 약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수학과 물리학 이론에 토대를 두고, 관찰과 실험이라는 방법론을 도입하여 쌓아 올린 과학 문명은 미래를 예측하거나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는 기준을 정할 때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한편 현실 정치권력과 자본의 힘은 막강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눈에 보이는 것, 부자가 되고 그것으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소비하고 즐기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에 돌리게 합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에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먼 이야기가 됩니다.

초월적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복잡한 사회 속에서,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우리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사실 성서가 쓰일 당시에도 누가 진정한 예언자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 상반된 내용을 선포하는 장면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서에는 하나냐라고 하는 또 다른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예언자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꺾으실 것이고, 바벨론에 끌려간 포로들도 다 돌아올 것이라는 매우 희망적인 내용을 선포합니다. 이 말은 백성들이 모두 기대했던 말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반대의 말을 선포했습니다. 이 두 예언자 중에 과연 누가 진정한 예언자인가를 즉석에서 밝히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희망을 말했던 예언자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죽음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이 두 사람 중 누가 진짜인가는 결국 당대에 밝혀졌지만, 그러나 이렇게 빠른 시간안에 예언의 참과 거짓이 판별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하는 기준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오늘날 진정한 예언과 예언자들의 말을 구별해 내고, 인간의 언어로 쓰인 성경 안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난무하는 주장과 시끄러운 소리들 속에서 우리가 성서의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해 내는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성서의 예언자가 세상에서 말하는 예언가, 점술가, 역술인과 다른 점은 미래의 일에 초점을 두지 않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운다는 것입니다. 2018년 한국인의 종교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개신교 목사는 98,305명, 승려는 36,877명, 신부는 5,360명입니다. 그런데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2013년 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굿당이 257개가 있고, 무속인(역술인 포함)은 약 40만으로 추정됩니다. 목사, 신부, 승려를 합친 수보다 무려 3-4배가 더 많습니다. 우리 국민의 41%는 점을 본 적이 있는데, 점을 보는 이유는 대체로 자신의 전반적인 인생사와 운세가 궁금하고, 취업이나 결혼, 입시나 자신의 진로를 알아보기 위함입니다.(심지어 개신교인들의 23%도 점을 본 적이 있다) 대체로 미래의 일을 알고자 하는 심리는 현재의 불안함과 불확실성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이 미래 일을 점쳐주는 이들을 찾아가는 이유는 바로 안정적 삶을 추구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예언자들도 미래의 일을 얘기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예언자들의 초점은 바로 지금 현재입니다. 예언자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앞에 세우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여 변화의 길을 가도록 선포하고 경고합니다. 예레미야가 유다 왕국의 멸망을 예언한 이유도 유대 백성이 당장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개하도록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신의 백성들을 책망합니다.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 하나님께 여쭙지 않고 아시리아나 이집트에 빌붙어서 생명을 유지하려고 하는 유다 백성들의 신앙과 모습에 대해 생수의 근원인 자신을 버렸다고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샘이 아닌 곳에서, 물이 고이지 못하고 빠져나가는 곳에서 엉뚱하게 생명을 갈구하는 어리석은 백성을 꾸짖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엉뚱한 곳에서 삶의 행복과 진정한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해 성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수많은 소리 중에, 난무하는 주장 중에 진정한 하나님을 말씀을 구별하려면 그 말이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말인지를 살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저 안정 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과 비전을 살피면서 불안과 두려움마저도 싸 안고 새로운 모험과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들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 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중요한 특징을 살피면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예언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달리 감수성이 매우 높습니다. 특히나 불의함과 악에 대하여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세상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악하고 추한 것도 있기 마련인데, 예언자들은 불의와 폭력, 사람들의 비행(非行)을 보고는 견디지 못하고 한 옥타브 높은 소리로 마치 세상이 온통 더러운 시궁창인 것처럼 외쳐댑니다. 예언자는 철저하게 느낌의 사람이지만, 그들의 정신은 언제나 날카로운 촉을 세우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의 불의와 악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고, 폭력과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태원에서 사람들이 깔려 죽고, 노동자들이 경찰들에 의해서 곤봉으로 맞아 피가 터지고, 우리나라 앞바다에 후쿠시마 오염수가 방류되어도 "내 알 바 아니라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먼 사람입니다. 부자들의 배를 불려주고, 가난한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정부, 힘없는 자들의 억울함은 들어 주지 않고, 법을 가지고 놀면서 법 위에 군림하는 이들을 편들어 주는 이들, 약자들의 보호에는 관심이 없고,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칭송을 늘어놓는 기레기 언론을 보면서도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늘 가난하고 힘없고, 주눅 들고 억울하게 당하는 이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하나님은 이 세상과 무관한 저 천상의 이데아 세계에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나님은 고요하게 관조하며 깊은 사색을 통해 참된 지식을 추구하는데 있을지 모르지만, 예언자들의 하나님은 자질구레하게 보이는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형편에 관심을 기울이시고 그 자리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 세계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셔서 그들과 함께 뒹굴고 아파하고, 어떻게든 그들을 바른길로 이끄시고 소중했던 시간을 회복하시려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거역하고 대들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든 품어 안으려고 하시는 분입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 과격한 언어, 감당하기 쉽지 않은 예언자들의 행동은 사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감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셋째 예언자들은 경계선에 선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지고 있고, 우리처럼 한계가 있고, 시대의 문화와 상황에 영향을 받고, 개개인들마다 저마다의 기질과 개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힙니다. 이제 예언자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경계선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지만 자신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는 사람이지만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완전히 사람 편에 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이 하나님처럼 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생각하면서도 양편의 어느 한쪽 치우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외롭기도 합니다만.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구별하는 능력을 지니려면 우리 또한 예언자들처럼 경계선에 설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과는 다른 신앙공동체 즉 그리스도교 교회의 일원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이지만 그렇다고 또 세상을 완전히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과 교회의 경계선에 서서 양쪽 모두를 볼 줄 알고, 양편이 지니는 한계와 장점, 문제와 좋은 점들을 비판적으로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생활에 푹 빠져서 세상에서 볼 때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서도 안되고, 세상에 푹 빠져서 하나님은 없다고 말해도 안됩니다. 오히려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교회에 와서 회복하고, 교회에서 받은 사랑으로 세상을 치유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수많은 경계선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가정과 사회 사이에서,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개인과 사회에서, 나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사랑과 힘과 정의, 자연과 인간 사이에 수많은 경계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경계선에 설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내면과 외부의 생활 사이의 경계선에서 중심을 잡아야 하고, 자연과 문명 사이의 경계선에서 양쪽 모두를 적절하게 활용해야 하고, 우리나라에 대한 애국심과 지구촌 한 가족 인류로서의 사해동포주의 사이에서도 우리는 적절한 균형을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경계선에 선다는 것은 개인의 이익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 할 때 "예" 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오" 해야 하는데 적당히 회색지대에 머무는 것과도 다릅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면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처세술도 아닙니다.

경계선에 선다는 것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양쪽 모두를 살피고, 그 사이에서 서로 교류하는 통로가 되어주며, 어느 한쪽에 집착하거나 고착되지 않고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균형을 잡으려는 치열한 수행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품으면서도 넘어서고, 넘어서면서도 다시 구분할 줄 아는 세밀한 선택이 바로 경계선에 선 자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다가 경계선에 서지 못하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 된 것처럼 자기기만과 자기도취에 빠져, 결국은 권력욕의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 쪽에 기울어서 하나님의 뜻 앞에 옳게 서지 못하고 교인들 눈치나 보며 제 밥벌이를 하는 것으로 불쌍한 목회를 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인간의 고백적 언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도 두 언어 사이의 경계 사이에 설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언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자 그대로 믿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문자를 숭배하는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인간의 언어만을 듣게 된다면 그 사람은 성경에서 절대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고 그 말씀을 전할 때, 그들은 무색투명한 상황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생각하는 능력이 있고, 수사학을 사용하여 설득해야 했으며, 몸으로 직접 나서서 투쟁도 하고 대결도 하고 애원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살피기 위해 국제정치 사회적 질서를 민감하게 분석해야 했고,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을 세심하게 관찰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해야 했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거는 결단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서, 또 자신과 백성들 사이에서, 또 자기 신앙과 이방신들의 주장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경계선에 세웠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자신을 엄청나게 많은 경계선, 줄 위에 세울 줄 알아야 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하나에 매몰되어서 다른 쪽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경계선과 줄에 선 사람들은 불안을 쉽게 떨쳐 버리지 말고 그것을 견뎌내야 합니다. 한쪽을 선택하려는 끊임없는 안주의 유혹을 떨쳐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양쪽 모두를 살필 수 있는 경계선의 자리를 찾으시고, 바로 그곳에서 줄타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바로 그곳이 우리의 자리입니다. 인간은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천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배로 땅을 기어다니는 뱀도 아닙니다. 인간은 바로 하늘과 땅 사이의 존재 경계선적 존재입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제대로 디디고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머리를 들어서 하늘의 향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다가오는 일주일도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세상과 주님의 몸된 교회 사이에서 제 자리를 찾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세우신 예언자들의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 합니다. 끓는 물이 넘쳐흐르는 재앙이 우리 앞에 닥치고 있기에 마음이 한편으로 무겁습니다. 지금 정부의 실책들과 냉혹한 국제질서 속에서 소외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형편, 기후 재앙과 회개할 줄 모르고 추락하는 교계 현실에 답답함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세우시고, 역사를 이끄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세상의 현실에 관심을 가지시고 구석구석까지 챙기시는 분임을 압니다. 하늘과 땅 사이,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세상 사이에 선 우리들이 주님의 말씀을 받는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여 주소서. 바로 여기에 생명사랑교회를 세우시고, 갖가지 사역들을 하게 하셨으니, 우리가 "아멘" 하고 응답하며 몸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역을 잘 감당하리라 다시 한번 더 다짐하여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이 좋은 날 우리 모두를 주님 앞에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홀로 있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며 기쁨이 되며 위로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자신을 나눠주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다름을 간직하면서도 서로 삶을 공유하는, 그렇게 세 분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으로 계시는 주님을 본받아,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음에, 이 삶을 살게 해 주심에,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그 열정으로 거룩한 영께서 우리의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을 받으시고 생명사랑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확장시켜 주소서. 우리가 주님의 구원 활동에 한 몫을 담당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나와 너 사이에서 모두를 품는 사람, 품으면서 넘어서고, 넘어서면서도 다시 균형을 잡는 사람이 되십시오.

* 축도

지금은 산 자에게 사랑을, 죽은 이에게는 평화를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사귐, 애틋한 위로가 사랑과 지혜의 영, 거룩한 영의 가르침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언제 어디에서나 주님의 뜻을 펼쳐가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전국에서 거룩한 영을 힘입어 민감하게 응답하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본 글은 2023년 6월 11일 생명사랑교회 주일예배에서 한문덕 목사가 전한 설교문 전문입니다. 설교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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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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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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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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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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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