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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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시편 37:3-11, 고린도후서 12:7-10, 마태복음 6:34

설교문

가톨릭교회의 피정(避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해 조용히 자신을 살피는 일) 프로그램 중에는 '3분 안에 치르는 시험'이라는 게 있습니다. 시험지를 받아보면 첫머리에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끝까지 다 읽어보고 문제를 푸시오." 그런데 사람들은 끝까지 다 읽어보지도 않고 열심히 문제를 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시험지 맨 끝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보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문제를 풀 필요가 없습니다. 시험지에 이름만 쓰십시오." 왜 사람들은 열심히 문제를 풀었을까요? 옆 사람이 문제를 푸니 자기도 서둘러 문제를 풀었습니다. 이건 마치 남들이 다 탄다는 이유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기차에 올라타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마라톤 경기를 보면 선두그룹을 형성하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수십 명의 선수가 떼를 지어 선두그룹을 형성하다가 30km 지점을 통과할 때쯤이면 10여 명으로 줄어들고, 35km 지점을 통과할 때면 그 그룹도 다시 반으로 줄어듭니다. 그런데 마라톤의 묘미(妙味)는 선두그룹으로 먼저 치고 나온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속도에 충실하지 못하고 다른 선수의 속도에 자기 속도를 맞추려 했기 때문입니다. 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주 끝까지 최고의 스피드를 유지하는 지구력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페이스'를 끝까지 잃지 않아야 하는데, 다른 선수의 속도를 의식하고 거기에 편승(便乘)하다 결국은 뒤처지고 맙니다. 빠른 속도(speed)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속도를 낸다 싶으면, 그것이 학업의 속도든 승진의 속도든 비즈니스의 속도든 어떻게든 그 속도를 따라잡으려고, 아니 앞지르려 달립니다. 그러다가 자기 페이스를 결국은 뒤처지고 맙니다.

중국 고사에 '조장'(助長)이라는 말이 있지요. '사행심을 조장하다' 혹은 '과소비를 조장하다'라고 할 때의 조장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부추김'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논에 모를 심었습니다. 얼마나 자랐나 싶어 아침저녁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 모가 더 빨리 자랐으면 하는 조급한 마음이 들어 어느 날 저녁 순을 조금씩 위로 잡아당겨 놓았습니다. 모가 많이 자란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논에 나가보니 모들이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서두른다는 것은 미래를 현재에 가져와 미리 걱정한다, 혹은 염려(念慮)한다는 말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염려라는 말의 헬라어는 '나뉘다'라는 뜻으로 근심 걱정에 마음이 분열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미래를 현재로 가져와 미리 걱정하니 내 마음이 현재와 미래로 분열되었습니다. 마음이 한 가지에 집중되어야 공부도 되고, 일도 될 텐데 근심과 염려로 사분오열 조각나니 평안(平安)할 리 없습니다.

염려는 불신앙입니다. 염려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푸른 풀밭 맑은 시냇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을 자세히 보세요... 씨를 뿌리지도, 거두어들이지도, 광에 모아들이지도 않아요. 그러나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 새들을 먹이십니다... 들의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보고 배우세요. 힘들여 일하지도 실을 뽑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온갖 영광을 누린 솔로몬조차도 그 입은 것이 이 꽃들 가운데 하나만큼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뭘 먹지?' 또는 '뭘 마시지?' 또는 '뭘 입지?' 하고 말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는 여러분에게 이런 모든 것들이 필요한 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위해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터이니까요. 그늘의 나쁜 일은 그날로 충분합니다."(마태복음 6:25-34 중에서, 새한글성경)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어느 찬양의 가사입니다.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성서가 반복해서 말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베드로전서 5: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6-7)

염려의 반대는 평안이 아닙니다. 염려의 반대는 자족(自足)입니다. 그리고 감사(感謝)입니다. 염려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고유한 복에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고 감사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자'가 되지 못해, '금수저'가 되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에서 누가 부자고 금수저인지 아십니까? "일 안 해도 재산이 늘어나면 부자 / 일 안 해도 재산이 그대로면 중산층 / 일 안 하면 재산이 줄어들 때 서민 / 일해도 재산이 줄어들 때 빈곤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부모를 책임져야 한다면 흙수저 / 내 부모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면 동수저 / 내 부모가 나를 책임져주면 은수저 / 내 부모가 내 자식의 인생까지 책임져주어야 금수저"라고 합니다. 저는 이런 부자, 이런 금수저 하나도 안 부럽습니다. 성실한 노동과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 갔습니까.

무화과라는 과일을 아십니까? 무화과(無花果)란 '꽃 없는 과일'이라는 뜻입니다. 열매가 실하고 달아서 성서에 수없이 언급된 과일입니다. 그런데 무화과는 잘못 이름이 붙여진 과일이라는 걸 아십니까? 사람들은 이름대로 이 나무에 꽃 없이 열매만 열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닙니다. 꽃받침과 꽃자루가 주머니 모양처럼 부풀어 오르면서 꽃들을 안으로 감추기 때문에 사람들이 꽃을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무화과 열매를 잘라보면 그 안에 수많은 '작은 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기에 없다고 여겼지만, 수없이 예쁜 꽃들이 무화과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 꽃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나무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셨지요.(요한복음 1:48)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었습니다.(창세기 3:7) 성경의 무화과는 사실 자기만의 아름다운 색깔과 향기를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탐스러운 열매로 자기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모든 존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화주 시인의 <고건 모르지요>라는 시입니다. "어둠이 / 커다란 어둠이 // 꽃들을 재웠다고 / 큰소리치지만 // 꽃들은 / 자는 척 / 향기로 이야기 나누는 걸 // 어둠은 / 고건 모르지요."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은]" 존재라고,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은]" 존재라고 김춘수 시인은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으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요청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나의 이 고유한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이 불리는 꽃과 같이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존재들입니다.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 유령>을 보았습니다. 시간도 없고 비싸서 가지 못했는데, TV에서 한시적으로 이 오페라를 보여주기에 얼른 보았습니다. 보기를 잘 한 것 같았습니다.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눈부신 기적이 아니라 따스한 위로더군요.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아이의 출생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얼굴이 흉측해서입니다. 아이의 이름은 '에릭.' 성장한 후 그는 자신의 흉측한 얼굴을 구경꾼들에게 보여주고 돈을 받고 삽니다.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상품'으로 살아갑니다. 그런 그에게 엄마는 입맞춤 대신에 뒤로 물러서며 '가면'을 던져줍니다. 그 흉측한 얼굴을 보기 싫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엄마가 준 첫 번째 선물이자 마지막 선물이 이 가면이었습니다. 이후 에릭은 평생 '가면'을 쓰고 삽니다. 그리고 에릭이 마음에는 따뜻한 심장이 아닌 송곳 같은 얼음이 자리 잡게 됩니다.

에릭의 얼굴이 된 가면 안에서는 증오와 분노가 자랐습니다. 그렇게 에릭은 '세상의 유령'이 되었습니다. 외면과 냉소와 조롱과 차별이 한 인간을 세상의 유령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 크리스틴이 에릭의 입맞춤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에릭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그녀는 나를 받아들였어.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해. 신이여, 감사합니다!" 어머니조차 거절했던 입맞춤을 기꺼이 허락한 크리스틴의 진심이 에릭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 따스한 입맞춤은 가면 뒤에서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는 에릭의 얼굴에서 광기와 증오의 흔적이 사라지게 하는 신비한 힘이 되었습니다. 에릭은 이제 '세상의 유령'에서 '음악의 천사'가 됩니다. <오페라 유령>에서 에릭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것입니다. "나도 사랑을 받으면 얼마든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사랑에 목말라 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이 가면들을 한 겹만 벗겨내면 그 안에는 사랑에 굶주려 파리해진 존재가 보입니다. 싸늘한 눈빛, 정감 없는 말씨, 거부하는 몸짓... 지레 주눅이 들어 피어보지도 못한 채 안으로만 움츠리고 있는 '꽃'이 보입니다. 무화과나무처럼 봄을 기다리는 '꽃' 말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예수를 가리켜 "그는 모든 사람을 시인으로 만드는 시인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시인은, 한국의 시인 김춘수가 노래했던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내 이름을 불러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고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에서 예수와 만난 이들은 꽃이 되고 봄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나 자기 속에 웅크리고 있던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 11:28-30) 하셨습니다. 그분은 지난 한 주 여러분이 무엇을 성취했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묻지 않으십니다. 다만 자기에게 와서 쉬라 하십니다. 자기에게로 와서 꽃을 피우라 하십니다. "꽃이 아름다운 건 내 안에 꽃이 있을 때"입니다.

예수의 사도 바울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고린도후서 12:7, 공동번역)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 병이 무슨 병인진 정확히 모르겠으나 바울은 그 병이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얼마 괴로운 병이었으면 '사탄의 하수인'이라고까지 표현했겠습니까. 바울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린도후서 12:9)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공동번역)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자신이 잘 나가고 강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약하고 어려울 때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자기의 약점을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므로]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고린도후서 12:10, 공동번역)이라고 바울이 말합니다.

밤하늘에 아름답게 떠 있는 달은 사실 자세히 보면 분화구가 뻥뻥 뚫려 있는 황야나 사막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런 달도 태양 빛을 받으면 아름답게 빛납니다. 누가 저 '수퍼문' 혹은 '블루문'을 가리켜 울퉁불퉁한 돌덩이나 흙덩이에 불과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존재를 지으실 때 빛을 받아 보름달처럼 빛날 수 있는 아름다움을 하나씩 선물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선물을 어디에다 두었는지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하신 나의 아름다움이 어디 있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내 인생은 나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려고 발버둥 칩니까? 왜 남이 정해 놓은 틀 안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입니까? 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애써 입으려 헛된 노력을 계속합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고유한 복과 가치를 발견하고, 감사하고, 자기 페이스로 자기 본연의 삶을 사십시오.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이 나의 가장 좋은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잘난 부분은 잘났다고 오만해지다가 화를 불러올 수도 있지만,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은 오히려 나를 지키는 대들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장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는 고목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구 생명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멸종의 시기에 살아남은 생명체들은 대부분이 당대에는 쓸모없어 보였던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남이야 그러든 말든 자기만의 뚜렷한 개성을 유지한 생명체들이 끝끝내 살아남아 번성해 온 것이 우리가 아는 지구 생명의 역사가 아닙니까. 그래서 어느 시인이 말합니다. "그렇게 너무 많이 / 안 예뻐도 된다 // 그렇게 꼭 잘하려고만 / 하지 않아도 된다 // 지금 모습 그대로 너는 / 충분히 예쁘고 // 가끔은 실수하고 서툴러도 너는 / 사랑스런 사람이란다 // 지금 그대로 너 자신을 / 아끼고 사랑해라 // 지금 모습 그대로 있어도 / 너는 가득하고 좋은 사람이란다." (나태주, <어린 벗에게>)

오늘의 구약성서 말씀입니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그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시편 37:1-2, 새번역) 그리고 약속합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너의 의를 빛과 같이, 너의 공의를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실 것이다."(시편 37:3-6, 새번역)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걱정과 염려와 조바심으로 보낸 하루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버려지는 선물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오늘'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오늘을, 지금을 아름답고 충만하게 사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고유한 가치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나만의 복을 세어보십시오. 그리고 느리더라도 자기만의 속도로 자기 삶을 사십시오. 작다고, 없다고, 못 산다고, 못생겼다고 기죽지 마십시오. 어느 시인이 말했습니다. "기죽지 말고 살아봐 / 꽃 피워 봐 / 참 좋아"(나태주, <풀꽃>) 나의 고유한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앞에서 오늘 여러분 모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향기롭게 피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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