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성탄의 집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jangyoonjae_0512
(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52:7-10, 요한1서 1:1-7, 누가복음 11:33-36

오늘부터 '하나님의 달력'으로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기다릴 '대'(待), 임할 '림'(臨), 글자 그대로 우리 가운데 임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대강절(待降節), 강림절(降臨節)이라고도 합니다. 영어로는 "Advent"입니다. '오심' 혹은 '도착'을 뜻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우리 가운데 임하실 주님, 곧 임마누엘 하나님(God-with-us)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새해를 시작합니다. 제 첫 사랑과 첫 데이트하던 날이 기억나네요. 오늘 우리 그런 설렘 가지고 있을까요?

헨리 나우엔의 글입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가 아니라 그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주님이 오신다고 했지만,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게 종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이 인간을 찾아옵니다. 성서에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이사야 35:4)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신과 진리를 찾아 떠나는 인간의 탐구 생활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로, 어느 찬송가(304장)의 가사처럼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우리를 구하기 위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모험적인 사랑과 주권적인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대림절의 영어인 "Advent"에도 이 뜻이 숨어 있습니다. 어원인 라틴어 "adventus" 안에는 '도래', '출현', '등장'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Adventus"는 희망의 도래(到來)입니다. 빛의 '출현'(出現)입니다. 메시아의 '등장'(登場)입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 그 포로 생활 고달파 / 메시아 기다립니다 / 기뻐하라 이스라엘 / 곧 오시리라 임마누엘." 오늘 부른 한 찬송가(104장)의 가사에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이 숨어 있습니다. 때는 주님 오시기 6세기 전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에서 가혹한 노예살이 할 때입니다. 우리의 일제하를 상상해보십시오. 이사야가 갑자기 입을 열어 구원자 메시아의 도래를 선포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이사야 40:1) 그의 선포는 위로의 메시지부터 시작합니다. 왜 이스라엘이 위로를 받아야 합니까? 그것은 이제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기"(이사야 40:2)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선포에서 가장 놀라운 위로는 장차 임하실 메시아가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따뜻한 목자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인으시[리라]"(이사야 40:11) 하나님의 공의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은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달픈 포로생활 끝에 이스라엘을 찾아오시는 분은 더 이상 심판하고 징벌하는 분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백성을 위로하고 감싸시는 목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더 이상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니라 기쁨과 설렘 속에 메시아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고단한 삶 속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비루한 우리의 역사 안으로 하나님이 달려오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정말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노래합니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이사야 49:13)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도 이사야의 선포로 시작하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해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교회와 기독교 기관에서는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Nativity Scene)을 재현합니다. 성서는 예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말 먹이통, 즉 구유(manger)에 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누가복음 2:7) 이 기록에 따라 구유는 하나님의 아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음을 상징하는 거룩한 물건이 되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구유를 만드는 전통은 성 프란치스코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프란치스코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기억하면서, 그 거룩하신 아기가 어떤 모습으로 구유에 누워 있었는지, 어떤 불편함을 겪었는지, 소와 말과 나귀를 옆에 두고 어떤 모양으로 계셨는지 그 모습 그대로 보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열망 속에 1223년 이탈리아 중부의 그레치오라는 한 작은 마을에서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 탄생 장면이 처음으로 재현됐습니다. 16~17세기가 되면 성탄 구유가 일반화되기 시작합니다. 18~19세기가 되면 독일의 일반 가정에서도 성탄 구유를 설치할 정도로 대중화되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성탄 구유에는 아기 예수와 그가 누우신 구유,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의 상, 그리고 동물들과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의 상이 놓입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교회들은 각 나라의 전통과 풍습에 따라 또 사회적 이슈를 반영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성탄 구유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기하학적 도형으로 아기 예수 탄생의 장면을 묘사하기도 하고, 벤치 위에 얼굴까지 낡은 담요 덮고 누운 노숙자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모습으로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화에서는 2018년 처음으로 성탄 구유가 제작되었습니다. 제가 교목실장으로 있을 때 조형예술대학의 강애란 교수님과 김지혜 교수님께 의뢰하여 성탄 구유를 창의적으로 재해석한 '이화 성탄의 집'을 만들었습니다. 이화의 본관 건물을 상징하는 유리 집 안에 아기 예수님을 상징하는 도자 작품이 있는데 그 위로 베들레헴의 별에서 한 줄기 빛이 떨어집니다. 밤이 되면 어두워진 캠퍼스를 환히 비춥니다. 대림절과 성탄절을 지나 새해 주현절이 오기까지 한 해 중 가장 추운 계절에 이화동산을 오가는 모든 사람에게 포근한 사랑의 온기를 전합니다. 올해도 지난 화요일에 학교 후문 쪽 새로 단장한 학관 앞에서 이화 성탄의 집에 불을 밝히 점등식이 있었습니다. ECC 앞과 E-House 기숙사 앞 그리고 멀리 마곡의 의과대학 안에서 이화 성탄의 집에 불이 밝혀졌습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이사야 9:1) 했습니다. 올해도 이화 성탄의 집이 길고 차가운 겨울밤 캄캄한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사랑의 빛을 비추는 위로의 등대가 되길 바랍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이사야 52:7)라고 이사야는 노래했습니다. '아름다운가'에 사용된 히브리어 '나아'는 아가서 1:7에도 사용된 단어로 '치장하다' 혹은 '아름답게 가꾸다'라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많은 산을 타고 먼 길 여행으로 더러워진 발이 마치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인처럼 아름답다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산을 넘고 들을 건너서 먼지와 상처투성이가 되었을지라도 그 발을 통해 전달된 소식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소식은 어떤 소식입니까? 첫째, '샬롬' 곧 평화의 소식입니다. 둘째, '예수아' 곧 구원의 소식입니다. 평화와 구원, 이것이 포로생활을 하던 하나님의 백성이 애타게 기다리던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 소식을 한마디로 줄입니다. "말라크 엘로하이크", 곧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입니다. 바빌론과 페르시아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 통치하실 거라는 소식입니다. 이것이 '복된 좋은 소식'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외칩니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이사야 52:9) '황폐'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의 원뜻은 '마르다'라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불어오는 메마른 동풍과 이에 따른 기근 그리고 끊임없던 전쟁으로 유다 땅은 메마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에게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소리를 내어"라는 말은 "함성을 터뜨려라"(새번역)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억눌려서 신음조차 내지 못했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기쁨의 함성으로 터져나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구속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이사야 52:10)라고 이사야는 노래합니다.

이화의 성탄 구유 혹은 성탄의 집은 바로 이 하나님의 구원을 땅끝까지 보게 하는 예술 작품입니다. "아름다움이 치유한다"(프란치스코 교종) 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한1서 1:1) 했습니다. 영원하신 생명의 말씀을 우리가 듣고, 보고, 만졌다 했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으므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그러므로 "증언하여... 전하노[라]"(요한1서 1:2) 했습니다. 무엇을 증언하고 전합니까?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의 빛이시라"(요한1서 1:5)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요한복음 1:9)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한복음 1:4) 했습니다. 이 빛이 길고 차가운 겨울날, 오늘 여러분처럼 이화를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따스한 위로의 등대가 될 것입니다.

사실 아기 예수 탄생하신 베들레헴의 마구간은 침침하고, 냄새나고,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시끄러운 곳이었습니다. 거룩한 곳도, 깨끗한 곳도, 풍경이 아름다운 곳도 아니었습니다. 무슨 선한 일이 일어날 기대도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구세주가 탄생했습니다. 거기에 메시아가 탄생했기에 베들레헴의 별이 비추고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 예물을 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빛이신 예수께서 그곳에 계셨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한 곳이 하나님의 거룩한 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베들레헴의 마구간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흑암 속에 절망하고 갈길 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이 '마음의 마구간'에 예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거기는 더 이상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백향목 향기가 나는 주님의 성전이 됩니다. "베들레헴 / 작고 / 추한 말구유를 / 허물치 않으시고 / 거기 나신 예수님이여 / 나의 작고 추한 / 마음 구유에 / 탄생 / 좌정하시옵소서" - 이용도 목사님의 기도 시 <마음 구유>입니다. 실로 13세기 그리스도교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성탄은 빛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탄생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우리 각자는 [아기] 예수를 위해 방을 내어줄지 아닐지를 결정하는 여관주인과 같다"(Each of us is an innkeeper who decides if there is room for Jesus) 했습니다. 성탄을 앞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빛이신 예수께서 탄생하실 구유를 준비하셨습니까? 내 안에 주님 모실 빈방을 마련하셨습니까? 성탄의 집은 교회 앞에만, 이화동산 안에만 작품으로 서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성탄의 집입니다. 내가 성탄의 구유입니다. 내 마음의 구유에, 내 마음의 가장 지치고 메마르고 아픈 곳에 메시아가 탄생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집으로 변모되어야 합니다.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실]"(사무엘하 22:29)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성탄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어둠을 밝히시는 사건이 성탄입니다. 주님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살펴]보라"(누가복음 11:35) 하셨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이 생명의 빛이 밝게 빛나고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이 사랑의 빛이, 희망의 빛이 빛나고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성탄의 집이 되어 길고 차가운 겨울밤, 캄캄한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포근하고 따뜻한 위로의 등대가 되고 있습니까?

한 흑인영가가 마음에 떠오릅니다. 10년 전 부산의 벡스코(BEXCO)에서 세계교회 총대들 앞에서 제가 부른 노래입니다. "This little light of mine, I'm gonna let it shine / This little light of mine, I'm gonna let it shine / This little light of mine, I'm gonna let it shine / let it shine let it shine let it shine."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작은 빛을 비추십시오. 여러분 안에 있는 평화(샬롬)와 구원(예수아)을 빛을 비추십시오. 버림받은 사람, 병든 시대까지 포근하게 감쌀 수 있는 따뜻한 빛을 비추십시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메시아가 오십니다. 하나님이 오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나의 어둠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전쟁과 폭력이 끊이지 않는 이 세계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했습니다. 성탄은 빛의 '출현'(出現)입니다. 희망의 도래(到來)입니다. 메시아의 '등장'(登場)입니다. 우리는 이 빛을 기다리며 내 마음속에 대림의 촛불을 하나씩 켜면서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는]"(요한1서 1:7) 사람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 주님이 안 계신 내 마음의 집에는 / 정욕, 명예욕, 탐욕 물욕 / 교만, 자만, 오만, 거만으로 가득 찬 / 아주 더럽고 불결하고 냄새나고 살기 싫은 / 귀신 나오는 집이었습니다. // 주님! / 주님께서 어느 날 / 내 마음의 집에 불쑥 찾아오셔서 / 청소를 하기 시작하셨지요. / 쓸고 닦고 긁고 칠하고 / 꽃을 심고 나무를 심고 // 주님! / 주님이 사시는 내 마음의 집에는 / 사랑, 기쁨, 감사, 행복 / 양보, 헌신, 희생, 웃음으로 가득 찬 / 아주 깨끗하고 상쾌하고 향기 나고 살기 좋은 / 주님이 사시는 집이 되었습니다."(최용우, <주님이 오신 후>) 아멘.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신학대학 살아남으려면 여성신학 가르쳐야"

신학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성신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백소영 교수(강남대 조교수, 기독교사회윤리학)는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