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이화여대 대학교회 설교] 율법의 마침표, 사랑

박영신 목사

성경본문

출애굽기 20:3-4/7-8/12-17, 에베소서 4:21-25, 마태복음 22:37-40

설교문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오용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사랑은 인간의 삶을 존엄하게 지켜주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본질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40절은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은 누구이며,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 이웃, 그리고 자신이며, 사랑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속마음을 숨기고 위선으로 하는 거짓 사랑이 아니라, 마음의 진정성이 있는 실천적 삶의 행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지만 둘째 계명도 첫째와 같다고 하시면서 대상에 따라 사랑의 질적 차이가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본문 말씀을 좀 더 숙고해 보면, 하나님, 이웃,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동일선상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전제가 있다는 것을 말씀의 행간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이웃의 대상이 되어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에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본질이자, 삶의 방식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성서의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입니다.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5계명부터 10계명 까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에 대해서 인간도 하나님을 향하여 변하지 않는 사랑을 지켜달라는 것이고, 5계명부터 10계명 까지는 '내가 너를 사랑하듯 너의 이웃들도 똑같이 사랑하니, 네 자신을 소중히 여기듯 타인도 소중히 여겨 이러한 불의한 일들을 이웃에게 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특히 5계명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시작되는 부모-자녀 관계로서 사회적 관계의 모체가 됩니다.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주의를 보는 듯 하나 이것은 범사회적 관계를 향한 출발점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를 존경하는 인격적 관계의 시작이 이웃을 향한 관계로 나아가는 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 나'라는 이자적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면,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하나님-나-이웃'이라는 삼자적 관계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창조 세계 안에서의 관계는 '하나님과 나'라는 개인적 영성에만 머무는 이자적.폐쇄적 관계가 아닌 개인적 영성을 기반으로 '하나님-나-이웃'으로 나아가는 확장적.개방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는 당신이 사셨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사랑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셨는지, 또 예수가 정의하는 사랑과 그에 따른 실천적 행위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메시지로 전달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앞선 구절 마태복음 22장 34절과 35절을 보면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라고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여 있고, 그중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불순한 의도로 질문을 하고 예수는 그 질문에 응대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구절은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율법사들이 예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길래 예수를 좋아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예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그들에게 사랑이라는 화두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했던 것인지, 당시 예수가 살던 역사적 배경과 정치.사회적 상황을 짧게 살펴보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가 살던 시대는 기원전 63년에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이후 계속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때였습니다. 로마는 총독을 파견하여 법률과 치안, 그리고 세금 징수 문제만 관여했고, 나머지는 유대 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하여 로마 총독이 임명하는 유대 사회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이 관장하는 산헤드린 공회에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이 시기에 예수가 사셨고, 이 시기에 유대교의 가장 정수에 있던 종교 엘리트들인 사두개인, 바리새인, 율법사들이 유대의 지배계층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 지배계층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은 크게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과부와 고아들, 그리고 병들고 무능해서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예수의 사역 현장에 종종 등장하는 소경, 귀머거리, 절름발이, 앉은뱅이, 문둥이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술이 없어서 고정적으로 일을 할 수 없는 날품팔이들, 또 농장에서 일을 하던 농부와 노예들이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또 다른 계층인 죄인들은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율법과 전통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누구나 열등 인간으로, 하류계급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죄인에 포함되는 사람들은 죄스럽거나 부정한 직업을 가진 창녀, 세리, 목자, 돈놀이꾼 등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바치지 않는 사람이나 안식일 휴식과 정결 예규를 지키는 일에 태만한 사람들도 죄인으로 취급당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가난과 병듦은 죄인들의 삶의 결과로 생각했기에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은 구별되었다기보다 동일시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종교를 중심으로 짜여진 사회 계층구조에서 사두개인, 바리새인, 율법사들은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 비난하면서 자신들과는 분리하며 혐오의 대상으로 그들을 주변부로 소외시켜 갔습니다. 백성의 대부분으로 구성된 가난한 자와 죄인들의 계층은 외적으로는 로마의 박해와 경제적 착취, 내적으로는 로마와 결탁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 가는 종교지배층의 이중.삼중의 경제적 착취와 그들의 율법 해석에 따른 판단과 정죄로 인한 죄책감까지 더해져, 백성들의 삶은 정치적 해방도, 경제적 안정도, 신앙적 도움도 받지 못하며 아무 소망도 없는 처절한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망이 깊어질수록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들의 소망 또한 깊어만 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가 그들의 삶의 한가운데로 등장하십니다. 예수는 가난한 자, 그리고 죄인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을 친구라 하며 함께 식탁 공동체를 이루고, 그들의 아픈 마음과 몸을 치유하면서, 긍휼과 연민의 시선으로 그들을 돌보고 관계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목자 잃은 어린 양으로 보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선포하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라고 믿고 있는 종교지배층들은 예수에게 격렬하게 분노하며,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흔들릴 것에 대한 두려움과 더욱이 자신들의 숨겨진 위선이 드러나는 수치로 인해 예수를 '먹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경멸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백성들이 예수를 이 고통의 삶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메시아라고 믿고 따르자,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들은 예수가 가시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그를 곤경에 빠뜨려 제거하고자 교묘한 질문들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한 율법사가 불순한 의도로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고 예수께 묻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는 망설임 없이 '사랑'이라고 하시면서 위선자들인 그들을 향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 전문가인 이들이 십계명에 나오는 그리고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문제는 율법을 지식적으로만 완벽하게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들의 숨은 욕망을 충족 시켜주는 기득권을 수호하는 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그리고 백성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사에게 예수는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환기를 시키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4절부터 40절은 율법사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리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 병든 자를 돌보아 주는 것, 옥에 갇힌 자를 찾아가 주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그 작은 자 하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웃사랑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십니다.

이웃사랑의 극치는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신실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의 종교지배층인 레위인과 제사장은 강도 만난 이웃을 피하여 도망치듯 가버립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죄인 취급하며 혐오하는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이웃을 자신의 시간과 물질의 비용을 치르면서 여관에 맡겨 부탁합니다. 또 볼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다시 들르겠고, 비용이 더 들면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극한 이웃사랑의 내용뿐만 아니라 진정한 이웃이란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는 우리를 마태복음 5장 46절과 47절로 초청하여 이웃의 범위에 대해서 진지하게 돌아보도록 하십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는 위의 말씀을 해제해 주는 내용으로서,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이웃의 범위와 진정한 이웃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에피소드입니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예수는 당시 유대인이 갖고 있었던 사마리아인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시선을 넘어서 '긍휼'과 '연민'의 시선으로 그녀를 만났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어 살아왔다는 것은 그녀가 평생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며 방황했음을 의미합니다. 타자에게 진정으로 수용되는 경험을 통해 자신도 존엄한 인격체를 가진 인간이 되고픈 그녀의 갈망은 사마리아인이라는 인종적 차별과 당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여성으로서 갖는 불평등을 넘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상태에서도 멈추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그녀가 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날도 절망감에 젖어있던 그녀는 공허한 마음으로 한낮의 뙤약볕을 맞으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나갔습니다. 육체적 갈증을 해결해 주는 물을 구하러 나갔지만, 긍휼과 연민의 눈으로 그녀를 존엄한 인간으로 만나 주신 예수를 통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진리의 샘물을 얻게 됩니다.

간음한 여인이 예수 앞에 던져졌을 때 유대인이었던 예수는 그녀를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유대 율법의 시선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시선은 죽음 앞에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한 여인의 고통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의 긍휼과 연민의 시선은 가부장제라는 사회적 구조악 속에서 일어난 이 간음 사건에 당연히 상대 남자도 붙잡혀 와야 하는데, 무슨 이유인지 그 남자는 없이, 홀로 죽음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이 여인을 죽음의 율법으로부터 구해내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두 이야기에는 예수의 '무조건적 연민의 시선'이 녹아져 있습니다.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에게까지 이웃의 범위가 확장되어 있으며, 타자에 대한 사랑은 혐오와 배제를 넘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엄하다는 명제를 담은, 깊은 긍휼과 연민에 의한 무조건적 환대여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사람에 대해서 예민하게 깨어있는 분 이셨습니다. 우리처럼 피해의식과 열등감으로 예민하셨던 것이 아니라, 상대의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 예민하셨던 분입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군중의 한가운데서도 혈우병 앓는 여인의 바람처럼 스쳐 가는 움직임도 예민하게 포착하시어 그녀를 군중 가운데서 불러내셨고, 만나 주셨고,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녀는 인간으로 상대해 주신 주님과의 이 만남을 통해 12년 동안 소외되어 인간으로 살지 못하던 삶에서 해방되는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은 불러줌이고 만남이고, 관계의 시작이고, 그 관계를 완성 해가는 진정성 있는 상호적 돌봄입니다. 이 상호적 돌봄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종교의 정의를 책임성이라고 했습니다. 존 카프터는 종교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언어로 기독교라는 종교를 다시 정의해 본다면, 기독교는 예수의 시선을 따라, 사랑하는 대상의 범위를 확장하는 책임성을 가져야 하며, 기독교 종교의 본질은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맘몬이 지배하는 자본의 시대 속에서 경제적 논리와 효용적 가치로 매겨지는 인간의 존엄성은 예수의 시선이 아닙니다. 예수의 시선은 자본과 권력, 그리고 관습적인 사회적 통념의 시선을 넘어 '지극히 작은 자 중의 한 사람'을 이웃으로 불러내어 그들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시선을 가질 때, 우리는 인간의 한계적인 사고와 종교적 교리를 넘어, 모든 타자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생명의 역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사문화된 율법적 사랑에 마침표를 찍고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을 시작해야겠습니다. 그 사랑은 불가능한 대상이라 생각하는 타자까지 이웃으로 확장하여 육체적, 정서적, 영적으로 서로가 돌봄으로서 모두가 살아나는 생명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생명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예수의 참된 제자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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