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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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창세기 50:15-21, 로마서 8:1-6, 요한복음 9:1-3

설교문

그리스 신화에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있습니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부부 사이에 오랜 세월 아이가 없자 한 신탁소를 찾아갑니다. 신탁(神託)이란 신이 사람을 통해서 그의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물음에 답하는 일이지요. 신탁은 이랬습니다. '태어나는 왕자가 장성하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 왕은 어느 양치기를 불러 아들을 맡기고는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양치기는 차마 아기를 죽이지 못하고 다리를 묶어 나무에 매달아 놓습니다. 지나가던 농부가 이 아기를 발견하고 어느 영주 부부에게 데려갑니다. 영주 부부는 아기를 양자로 들이고 '오이디푸스'(부은 발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훗날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가 친아버지라는 걸 모르고 죽입니다. 이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왕으로 추대된 오이디푸스는 선왕의 왕비 이오카스테(오이디푸스의 어머니)와 결혼합니다. 결국은 신탁대로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하게 됩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방랑길에 오릅니다. 이것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오이디푸스 이야기입니다.

운명은 정해져 있습니다. 아무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모이라'(moira), 즉 '운명'을 믿었습니다. '아난케'(ananke), 즉 '필연'을 믿었습니다.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에게 적대적이거나 기껏해야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것이 운명으로 결정된 것이면 아무도 그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조건은 본질적으로 비극입니다. 영웅들은 넘어질 운명입니다. 그리스의 종교는 비극의 종교입니다. 사실 많은 현대인이 이런 종교를 믿고 있습니다. '이생망'입니다. '이번 생은 망했다'를 줄여 이르는 말이지요. 젊은이들만이 아닙니다. '어쩐지 요즘 잘 풀린다 했더니... 내가 그러면 그렇지...' 사실 '과거의 신탁'에서 자유로운 현대인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과거의 포로, 운명의 포로입니다.

그런데 성서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정확히 뒤집은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한 창세기는 요셉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요셉이 누구입니까? 요셉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했고 이 아이에게만 귀한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당연히 형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요셉은 이상한 꿈 이야기를 해서 형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밭에서 형들이 묶은 곡식 단이 자기가 묶은 곡식 단에게 절하더라는 꿈 이야기를 하더니 심지어 해와 달도, 그러니까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자기에게 절하더라는 꿈 이야기를 해서 아버지의 꾸지람까지 받았습니다. 결국은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팔아버리지요. 이집트로 끌려간 요셉은 이집트 왕 친위대장 집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다 주인의 아내가 동침하기를 청했을 때 거절했다가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힙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었습니다. 감옥에 함께 갇혀 있던 이집트 왕의 술을 따르는 신하와 빵 굽는 신하의 꿈을 잘 해석하여 신임을 얻었다가 후에 왕의 꿈도 잘 해석하여 일약 이집트의 총리로 오릅니다. 이집트에 큰 기근이 들 것을 예견하고 총리 요셉은 풍년이 든 칠 년 동안 곡식을 잘 저장하였다가 흉년이 든 칠 년 동안 굶주린 백성을 살립니다. 기근에 시달리던 요셉의 형들도 곡식을 사러 이집트에 옵니다. 와서 총리 앞에 절합니다. 요셉은 형들인 줄 아나 모르는 체하고 그들을 정탐꾼이라 호통치며 감옥에 가둡니다. 이후 한 사람만 감옥에 남기고 나머지 형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며 자신의 유일한 친동생인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복수심에 치를 떠는 요셉은 이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형들을 괴롭힙니다. 하지만 베냐민과 함께 온 형들 앞에서 요셉은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몰래 숨어서 웁니다. 그러다 형 중에서 유다가 베냐민 대신에 인질이 되어 이집트에 남겠으니 이미 사랑하는 아들(요셉)을 잃은 늙은 아비가 또 다른 아들(베냐민)까지 잃는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호소에 마음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극적인 화해를 합니다. 그 장면이 창세기 4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의 모든 시종들 앞에서 그만 모두들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주위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요셉은 드디어 자기가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나서,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고요?'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으나, 놀란 형제들은 어리둥절하여, 요셉 앞에서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니, 그제야 그들이 요셉 앞으로 다가왔다."(창세기 45:1-4, 새번역)

이렇게 형들 앞에서 자신을 밝힌 요셉이 이어서 말하는데 그 말이 놀랍습니다.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흉년이 든 지 이태가 됩니다. 앞으로도 다섯 해 동안은 밭을 갈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창세기 45:1-8a, 새번역)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요셉이 감옥에 갇혔을 때 했던 말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요셉의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을 때 함께 갇혔던 이집트 왕의 두 신하의 꿈을 해석해주고는 이렇게 당부했었지요. "당신의 모든 일이 잘되거든 나를 기억하셔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내 사정을 왕에게 말씀드리고 나를 이 감옥에서 나가도록 해 주십시오. 나는 히브리 땅에서 강제로 끌려왔으며 여기서도 감옥에 갇힐 만한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창세기 40:14-15, 현대인의 성경) 보십시오. 요셉은 자신을 '히브리 땅에서 강제로 끌려온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요셉이 자기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형들의 의지로 팔려 강제로 이집트에 끌려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요셉입니다. 그런데 그 요셉이 지금 형들 앞에서 자기를 이집트에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요셉은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형들이 자신을 팔아넘긴 것은 여전히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이제 그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대기근 속에 온 가족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마음에 언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성서 본문은 이에 대해 침묵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요셉이 자신의 모든 과거를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며 형들이 과거의 죄책감 아래 살지 않도록 사건을 재구성한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형님들, 형님들은 당신들이 한 일이 무언가 더 큰 계획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보다 더 크고 또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인도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아버지가 죽으면 요셉이 그때 복수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때 요셉이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구약성서의 본문입니다. 이 구절은 과거에 제가 신학대학원 입학시험을 치를 때 반드시 외워야 하는 500개 성경구절 중 하나였습니다. 저는 그 시험을 두 번이나 통과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창세기 50:19-21a)

다른 집에 그림 한 점쯤은 걸어놓고 사시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같은 그림이라도 다른 틀 속에 넣으면 다르게 보입니다. 인생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요셉은 지금 틀을 새로 짜고("re-framing") 있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실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틀은 바꿀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아픈 과거를 전부 새로운 틀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하나님을 주어(主語)로 자기 인생을 다시 보았습니다. 은혜와 섭리의 틀로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더 이상 억울한 일을 당한 피해자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형들에게 노예로 팔려 13년 동안이나 자유를 잃고 22년 동안이나 가족과 헤어져 살아야 했던 세월은 요셉이 형들에게 원한을 갖고 복수를 하려고 해도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자 그는 복수심의 감정을 털고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발목을 잡는 과거의 감옥, 감정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날 내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현대인의 성경) 보십시오. 이제 그는 자신을 생명을 구하는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로 새로 보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정확히 뒤집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미래는 바꿀 수 있지만, 과거는 바꿀 수 없다'라고. 혹은 '미래는 열려 있지만, 과거는 닫혀 있다'라고. 과연 사실일까요? 요셉의 이야기는 우리가 과거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과거의 의미를 바꿈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창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정해진 운명은 없다고 말합니다. 신탁은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약 20년 전(2005년)에 고(故)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가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한 연설은 유튜브에서 수천만 명 넘게 시청한 명연설입니다. 오늘의 디지털 시대를 연 장본인인 잡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났던 세 가지 결정적인 타격을 묘사했습니다. 첫째는 대학 중퇴, 둘째는 자신이 설립한 회사인 애플에서의 해고, 셋째는 암을 진단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대학을 중퇴한 잡스는 이제 원하는 강의는 무엇이든 자유롭게 청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캘리그라피(calligraphy, 서체)에 관한 강의를 들었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컴퓨터에 사용할 우아한 글꼴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자신이 세운 회사인 애플에서 해고를 당한 후 잡스는 새로운 컴퓨터 회사(NeXT)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를 통해 나중에 애플에 가져올 새로운 기능을 개발하고 또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 스튜디오 중 가장 창의적인 픽사 애니메이션(Pixa Animation)을 인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암을 진단받았을 때 그는 이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당신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잡스는 비극의 필연성을 믿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신탁에 묶여 있지 않았습니다.

이 연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말은 이 구절입니다.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당신은 미래를 바라보며 점들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뒤를 돌아보며 점들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앞을 바라보며 삶을 살아가지만, 뒤를 돌아볼 때 인생을 이해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과거는 수많은 점과 같습니다. 그 점들은 꼭 밤하늘의 별들과 같습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저 밤하늘에 어디 큰곰과 작은 곰 자리가 있으며 사자와 전갈자리가 있습니까. 그 별들을 어떻게 연결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한번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생각하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우리의 미래를 바꿀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구원함으로써 미래를 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구원하심으로써 새 미래를 여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이 구원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어떤 신탁이 주어졌습니까? 어떤 운명이 예고되었습니까? 어떤 마법의 주술이 오늘도 여러분의 손과 발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린도전서 15:10)이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새로운 틀로 고단했던 그의 삶 전체를 다시 본 사람입니다. 요셉은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날 내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고통스러웠던 삶의 과거 전체를 새로 이해하고 화해와 용서의 새 역사를 연 사람입니다. 그럼으로써 오합지졸에 불과하던 히브리인들을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창조되게 한 사람입니다. 창세기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해서 요셉의 이야기로 끝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실 요셉의 삶을 하나씩 뒤돌아보면 가장 우연처럼 보이는 곳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요셉의 삶에는 계속 다른 힘이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 이집트 왕의 신하들이 꾼 꿈을 해석해주고 일이 잘되면 자기를 기억해서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그 신하들은 감옥에서 나간 다음 2년이나 요셉을 잊었습니다. 요셉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요셉의 기도는 그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요셉과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누구나 밤새워 기도하던 날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 좀 구해주세요. 간절히 기도하면 뭐든 들어주시는 분이라면서요.' 누구나 한 번쯤 이렇게 절절한 기도를 해봤을 겁니다. 하지만 울며 기도할 뿐, 그때마다 침묵, 침묵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응답이 없다며 돌아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지요. 응답 없음이 곧 응답이었음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일하신다는 것을.

돌아보면 나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지만 내가 예상한 대로 응답받은 적은 없습니다. 많은 경우 내가 희망을 버리고 나서야 답이 왔습니다.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니 내 삶의 사건들은 내가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보다 큰 계획의 일부였기에 일어났습니다. 내 기도가 합당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실 것이나 반드시 내가 생각하는 방법과 내가 지정하는 시간에 따라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때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우리는 섭리가 어떻게 내 삶을 이끌어왔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내가 내 삶의 유일한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내 삶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깨닫고 조금은 뒤로 물러서 내 마음에 빈 공간을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여백을 만듭니다. 그 여백과 공간이 이름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습니다. 하루면 될 것처럼 보이는 일도 천년이 걸리고, 천년 걸릴 것 같은 일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의 노래입니다. "역사는 자기 방식으로 일을 해요 / 하늘은 다른 길로 뜻을 이뤄가요 // 한 시절 악의 세력이 승리해도 /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 오래 절망하지 말아요 // 그들은 지금 자신들을 통해 / 거짓과 죄악의 실체를 드러내며 / 역사의 무대에서 자기 배역을 / 충실히 수행하는 중이니까요 // 역사는 돌아서 보면 / 장엄하고 아름다운 연극이죠 / 선도 악도 어쩌면 하나의 배역 / 성취도 고난도, 승리도 패배도, / 하나의 낮과 하나의 밤이죠 / 그러니 희극에 도위하지 말아요 / 그러니 비극에 낙담하지 말아요 // 어둠 속에서 패배 속에서 / 서로 함께 묵묵히 걸어가요 / 밤이 오고 또 밤이 오고 / 별이 뜨고 아침이 와요 / 또 봄이 오고 또 새날이 와요"(박노해, <역사의 무대에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랍비 조너선 색스(Jonathan Sachs)가 말하는 것처럼, "믿음의 눈으로 보면 오늘의 저주가 내일의 축복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을 두고 제자들은 그가 그렇게 된 것이 누구 탓인지를 예수께 물었습니다. 자기의 죗값입니까" 부모의 죗값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한복음 9:3) 같은 현상을, 같은 사건을 예수님은 전혀 다른 눈으로 보셨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의 재해석하여 치유와 광명의 새 미래를 열어주셨습니다. 이 예수의 사도인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망과 운명과 신탁의 노예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새번역)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오늘까지 살려두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혜와 섭리 속에 오늘까지 보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생명을 살리고 구하는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언제까지 인생의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가 무서워 웅크리고 주저앉아 있겠습니까? 우리는 과거의 포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운명에 놀아나는 장난감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안에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시는 성서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노 저어 가십시오. 저 자우와 은혜의 바다를 향해 힘차게 노 저어 가십시오. 나를 옭아매던 과거의 모든 닻줄을 끌러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의 바다로"(찬송가 302장) 맘껏 노 저어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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