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소래 마을에 심겨진 씨앗(14)

3. 비운의 정객 김규식(金奎植 1877~1950)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시편 118-22).

김규식은 호가 우사(尤史)로서 강원도 홍천의 유서 깊은 청풍 김씨(淸風金氏) 양반의 후예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김지성이 동래부사 종사관으로 재직중에 민씨 정권에 대하여 일본 정권에 대한 사대주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미움을 사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3년 만에 객사하고, 김규식이 6세 때에 그의 어머니마저 죽으니 졸지에 천애고아가 되어버렸다.
 
나라가 그러한 부랑아를 돌보는 일이 없고, 그의 숙부들마저 이 핑계, 저 핑계로 이 아이를 박대하니 어제까지 양반의 귀한 아들로 잘 지내던 김규식은 어쩔 수 없이 이 집 저 집으로 구걸을 하며 떠돌아다니는 내버린 돌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참으로 놀라운 곳에서 역사하신다. 이 부랑아가 언더우드 목사의 눈에 띄어 입양되고 훈련되어 이 나라 건국의 머릿돌이 된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비밀이었다.

▲김규식. ⓒ독립기념관

언더우드는 미지의 나라에 선교사로 입국하였으나 아직 기독교 전교가 허락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일차적으로 우선 청소년 교육을 시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서당을 통한 한학만을 최선의 교육으로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양반들이 저 벽안(碧眼)의 외국인들에게 자녀교육을 맡긴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언더우드의 눈에는 양반의 자녀이건 거리의 부랑아이건 구별하지 않고 다 같이 귀한 하나님의 영혼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김규식이나 그 비슷한 소년들을 만나기만 하면 잘 타일러서 자기의 선교부로 인도하였다. 거기서 그 소년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씻어주며 함께 살았다. 처음에는 이 아이들이 규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자주 도망을 갔다. 그러면 언더우드는 그들을 찾아서 온 시내를 돌아다니며 다시 선교부로 데리고 오고는 하였다. 그 교육의 터전이 훗날 경신학당(儆新學堂)이 되었다.
 
김규식은 원래 총명하고 학문적인 훈련이 되어있어서 얼마 아니하여 공부도 잘 하고 신앙생활도 적응하게 되었다. 그는 언더우드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언더우드는 그에게 세례를 베풀고 요한(Johann)이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그리하여 1896년에 경신학당을 졸업하였다.
 
그 시대에 우리 민족의 지도자 서재필(徐載弼)박사는 한성에서 독립신문사를 경영하며 우리 민족에게 독립정신을 고취(鼓吹)하였다.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추천으로 그 신문사에 입사하여 서재필을 도왔다. 서재필은 청년 이승만을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한 일도 있었다. 그 서재필이 김규식의 신앙심과 향학열이 뛰어난 것을 보고 그를 지도하여 미국의 로노크 대학(Roanoke University) 으로 유학을 보내어 영문학을 이수하게 하였다. 그 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Princeton University Academy)에 진학하여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동 대학 당국은 김규식의 재능을 높이 보고 그에게 박사학위를  위한 장학금을 지급하겠다고 제안 하였다. 그러나 그 시기는 우리나라가 국권을 일제에게 강점되어 동포들의 처지가 날로 악화되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학문만 위하여 안주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학교의 제의를 정중히 사양하고 1905년에 조국으로 귀환하였다.

그의 귀환을 크게 기뻐한 언더우드는 김규식을 자기의 비서로 영입하였으며, 경성 YMCA 총무 직을 맡기고 그곳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하였다. 그리고 경신학당의 교감 직을 맡겼다. 이 기간에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많이 기독교 신앙과 애국심으로 양육되었다. 그는 또한 새문안교회 장로가 되어 교회생활도 충실하게 했다.
   
1709년에 그는 조순환(趙淳煥)의 딸 조은수(趙恩受)와 결혼하였다. 그의 결혼에는 다음과 같은 애화가 있다. 김순애는 소래마을 김성섬의 첫째 딸이었다. 그녀가 여학교에 다닐 때에 조은수와 한 학급에서 친하게 지냈다. 훗날 김규식의 고달픈 망명생활중에 아내 조은수가 병약하여 자리에 몸져 누웠을 때에 남편에게 말하였다.

“여보, 내가 죽거들랑 저 김필순 어른의 딸 순애를 후처로 맞으세요, 그는 집안도 좋고, 신앙심이나 조국애가 뛰어난 사람이랍니다.”
“아니 여보, 무슨 그런 소리를! 몸조리 잘 하여 건강을 회복할 생각이나 하시오. 지금 좀 어려워서 약해졌을 뿐이오.”
“아닙니다. 제 몸은 제가 잘 알아요. 아마 일어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그리고는 또 병문안을 온 순애를 보고서 말하였다.
“순애야, 너는 나하고 오랜 세월을 절친한 친구로 지내왔쟎니! 나는 이제 더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내가 세상을 떠나면 네가 저 어른을 모시고 큰 뜻을 이루시게 해 줘. 부탁이야.”
“아니야. 너는 곧 낳을 거야. 우리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해 보자.”

이렇게 주변에서 그의 회복을 염원했지만 얼마 아니하여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훗날 독립운동의 동지 서병호가 또한 김규식에게 속현(續絃)하기를 권하며, 자기의 처제 김순애를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김순애와 재혼하여 새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우국지사들에게는 신혼의 단 꿈과 같은 사치는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혼한지 15 일 만에 프랑스의 파리로 먼 길을 떠나야만 했다. 그런데 이 일은 훗날의 일이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통성과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고 일본의 신을 섬기라고 강요해 왔다. 이른바 [신사참배(神社參拜)]로써 모든 의식에 앞서 반드시 거쳐야 할 의례로 강요했다. 김규식은 단연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후진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다가 일경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지자 결국 망명의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지사들은 처음에는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였으나 일본의 군사적 정치적 압력에 견디지 못한 중국은 독립지사들의 만주 활동을 규제하였다.

김규식은 그의 활동무대를 몽골까지 옮겨서 [울란바토르]에 있는 앤더슨(Anderson & Meyer Com.) 회사 몽골 지점장으로 전근하였다. 거기서 돈을 버는 대로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헌납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마수는 그곳까지 뻗혀왔다. 그리하여 또 다시 상해로 옮기게 되었다. 거기서 여운형, 신채호, 서병호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첫 정당이다. 이 후의 활동은 다음과 같다.

① 1918년 모스크바 약소민족 대회에 참여하여 국제적 안목을 넓히고, 제 1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의 소식을 조국 동포들에게 알려주었다.
②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석대표로써 참여하고, 프랑스에 있는 한인들을 규합하여 [조선 혁명당]을 결성하여 세계만방에 우리나라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외교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일본의 세력에게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③ 미국의 워싱톤 D.C.로 가서 이미 미국에 와서 활동하던 이승만, 안창호, 서재필 등과 합세하여 미국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도와주도록 활동하였다.
④ 1920년에 다시 상해로 돌아와서 임시정부 학무총장으로 취임하였다.
⑤ 1935년 상해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부주석으로써 김구 주석을 도와 광복군조직에 힘썼다.

1945년 드디어 조국이 광복되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우리 힘이 아니고 외국의 군사력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었다. 그 결과가 우리나라 역사에 큰 비극과 장애요소로 이어진다. 1946년 민주의원(국회의원의 전신) 부의장 겸 [과도입법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이미 미국의 힘을 등에 업고 우리나라의 실권자가 된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안을 반대하고 남북한이 협의하여 통일국가를 이루고자 노력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그러한 민족애는 이승만 계열에게 [좌익] 내지 [공산당]으로 매도되었다. 내가 어린 시절 해방직후에 [김규식은 빨갱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당시에는 이승만이나 미 군정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나타내면 곧 좌익으로 모는 일이 많았다. 한번은 남로당 당수이던 박헌영이 함께 적십자운동을 하자고 할 때 그는 공산당과의 제휴는 할 수 없다고 하며 단연코 거부하였다. 남로당(南勞黨)이란 남조선노동당의 준 말이며, 그야말로 순수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 당시 공산주의를 체험하지 못한 한 이상주의 청년이 그에게 항의하였다.

“선생님, 공산주의를 그렇게 무조건 싫어하면 어떻게 이 나라를 구성하겠습니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공산주의는 절대 안 된다. 내가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그 백성들이 참으로 순박한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1917년 공산주의자 레닌의 지휘를 받아 반대파를 숙청하는데 7백  만명을 학살하였다. 그 이웃의 알바니아에서는 혁명과정에서 하루에 6만 명의 동포를 학살하고 공산혁명의 승리라고 자랑하였다. 우리 한국인이 착한 백성이지만 저들의 사상과 조직에 말려들면 끔직한 일이 발생할 것이다. 내가 저들과 타협을 하려는 것은 조국의 분단이 또한 무서운 비극을 초래할 것인즉 어떻게든지 노력하여 통일국가를 이루려는 염원뿐이다. 이것이 이 백성의 이상이요, 하나님의 뜻이다.”
 
그는 1948년 이승만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구 선생님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여 공산당의 수뇌 김일성, 김원봉 등과 회담을 하려 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4김 회담]이었다. 그러나 저들 공산당들은 이 우국지사의 애국 정성을 한낱 정략으로 이용하기만 하고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 국민들에게 오해를 받고 이승만에게 배척을 받아 많은 곤욕을 당했다.

1949년 우리 민족의 지도자 김구 선생님께서 국군 장교 [안두희]라는 자의 방문을 받고 아무 의심 없이 면담을 하던 중에 그에게 권총으로 암살당하였다. 안두희는 말하였다. “김구는 빨갱이다.” 이승만 정권은 그 안두희를 처벌하지 않았다. 김규식은 김구 선생의 장례위원장이 되어 국민장을 거행하였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국가에서 가장 큰 죄악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이다.
 
1950년 북한 괴뢰군의 남침이 있었다. 미처 연락을 받지 못한 김규식 선생은 서울에 그대로 있다가 저들에게 납치되었다. 그리하여 저들에게 끌려가 저들에게 협조하라고 유인과 위협을 당했다. 그러나 단연코 거부한 김규식은 같은 해 12월 10일 저 북방 만포진(滿浦鎭)에서 74세를 일기로 비운의 생을 마감하였다. 



글/박종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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