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데스크시선] 교계 최고원로가 신앙원로로 느껴지지 않아
“사랑은 상대방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

입력 Aug 01, 2014 07:45 AM KST
한국교계의 원로인 최성규 목사가 7월 30일자 국민일보 미션 면 하단에 “돌을 던지면 맞겠습니다. 오늘의 아픔과 슬픔이 내일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글에서 최 목사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를 정부에, 특별법 제정을 국회에, 책임자 처벌을 사법부에 맡기자고 제안했으며, 유가족들에게는 진도 팽목항에서의 수색작업을 중단할 것과 단식농성 및 서명운동도 그만둘 것을 권고했다. 최 목사는 유가족들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 희생자 가족이 아니라, 희망의 가족이 되[며]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 참사 피해자가 아니라, 안전의 책임자가 되[라]”고 말하며 그들이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되고] 아픈 상처만 곱씹어서도 안 됩니다”라고 그 권고의 이유를 간곡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일반국민들에게는 희생자를 기념하는 해상기념탑을 세우고 국민성금도 모으며 단원고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자고 제안했다.     
이 글에는 교계의 원로가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품은 사랑과 국가의 장래에 대한 충심이 잘 드러나 있다. 돌 맞을 각오를 했다고 선언한 것으로 보아 이 글이 가져올 파장과 오해를 짐작하였음에도 용기를 발휘했다는 인상도 주고 있다. 그리고 글의 하단에 나열된 여러 직함들이 증명하듯이 지도자 역할도 두루 경험하였고 시무하는 교회를 세계 굴지의 대형교회로 성장시켰으므로 그의 글은 인생의 연륜이 담긴 지혜로운 조언으로서 권위가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는 고통의 경험을 이렇게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정돈할 것을 간곡히 고언하는 교계의 원로가 신앙의 원로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이제는 거대한 시스템의 테두리 안에서 그 최상부를 장악한 원로가 되었으므로 고통당한 사람들과는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서 가르치듯이 제안하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그도 인간적으로 갖은 고통을 겪고 오늘날 원로가 되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고통의 의미를 아는 ‘인간’의 눈이 아닌, 고통을 효율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시스템’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의 글에는 신앙의 원로로서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바울의 가르침대로 그들과의 공감과 연대이다. 이 공감은 정서적인 인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우는’ 연대가 있어야 한다. “함께 우는” 것은 공감의 성육신이다. 사실 신문에 실린 조언은 팽목항 체육관에서 기다림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거하며, 단식농성장에서 그들과 함께 단식하는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건넬 수 있는 종류의 말인 것이다. 혹은 그런 정도로 함께 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에게 직접 가서 그들이 있는 현장에서 그들의 손을 잡고 울면서 권할 수 있는 종류의 말인 것이다. 중앙일간지의 광고난을 통해서 조언을 전달하는 것은 심리적 거리를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현재 팽목항과 단식농성장에 있는 유가족들을 은연중에 효과적으로 압박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예수께서는 일일이 동네 곳곳을 다니며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직접 만나 복음을 전했고 그들의 손을 직접 잡아주었다. 예수는 고통받는 자들의 현장에서 위로의 성육신으로 존재했다. 그래서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마태복음 7:29) 하였던 것이다. 예수의 말씀의 권위는 그 분이 자신의 말씀대로 살아오신 연륜에서 풍겨나는 것이었고 고통받는 자들과 공감하는 삶을 지내왔기 때문에 그들의 삶과 밀접한 비유와 가르침을 베풀 수 있었다. 체제에 복무하는 서기관들과는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분은 오늘날 신문에 광고하듯이 하늘의 구름을 동원하여 배너광고를 할 수 있음에도 자신의 말씀을  ‘광고’하지 않았다. 그 분의 사랑은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하는 현장에서 성육신되었다.   
아마도 예수는 팽목항에서 여전히 자식을 기다리는 가족들과 단식농성 중인 유가족들과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위해 서명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 나름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다. 그들이 고귀한 생명의 희생이 정쟁의 구름 속에 가려지지 않도록 생명을 담보해서 빛을 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 그들 곁에 계실 것이다. 신문에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가슴 아파 한다, 지금도 울며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라고 광고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런 말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 100배나 1,000배나 옳기는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시장 네거리에서 크게 소리 지르며 기도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산상수훈에서도 밝혔듯이 예수께서 싫어하신 일이다. 예수의 모범을 따르자면, 고통을 공감하는 자는 고통받는 자들 곁에서 그들과 함께 우는 자들이다. C 목사가 결론으로 말한 “이제는 온 국민이 힘을 모아 국가 혁신과 국민 행복을 위해 앞으로 달려가야 할 때입니다”는 효율성을 우선하는 세계관에서 나온 조언인데, 거리감과 가르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공감의 능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 <천국에 다녀온 소년>의 한 장면에는 “사랑은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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