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이충범의 물에서(2)]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충범·협성대 교수(역사신학)

입력 Sep 06, 2014 06:35 AM KST
▲이충범 협성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친구 Y는 직업군인이셨던 아버님 슬하의 5남매 중 막내였습니다. 형제가 많아서인지 그는 부모님의 제재를 별로 받지 않고 초등학생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행동반경과 자기영역을 갖고 있었습니다. 공부하고는 담을 쌓았던 그는 대담한 성격에다 용기까지 대단하여 늘 새로운 탐험을 즐기곤 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린아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까지 가서 물고기들을 잡아 오곤 했는데 우리는 그의 물고기 사냥 무용담을 들으면서, 그리고 그의 작은 어항에 있는 소위 “태극붕어”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침을 질질 흘리며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작은 몸에 길게 나풀거리는 지느러미를 가진 태극붕어는 경이롭게도 윗 지느러미에 선명한 태극마크를 달고 있었습니다. 쉰이 넘어 민물고기를 키우기 시작한 이 후에서야 저는 이 태극붕어의 정식 이름이 버들붕어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버들붕어가 태극마크를 선명하게 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또 한 가지, 지금도 어린 그와 내가 그 먼 곳까지 어떻게 그렇게 자주 다녔었는지 저 조차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여하튼 친구 Y는 초등학생이었던 제게 늘 부러운 존재였습니다.  

자전거가 생기고 나서 저는 Y와 동행할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멀리 가는지는 우둔한 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앞서 가는 Y의 자전거를 놓치면 천상의 미아가 된다는 두려움에 휩싸여서 알 수 없는 마을들을 지나며 그저 죽도록 페달을 밟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기진맥진하여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서울 근교의 하천이었는데 수변식물이 가득 우거져 하천에 접근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어렵사리 하천에 접근하여 반두(족대)와 어포기로 고기를 잡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그곳은 물 반, 고기 반이었습니다. 어쩌다가 메기나 가물치 같은 대형어종이 잡히면 우리는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나의 시선을 끌었던 태극붕어라도 잡게 되는 날이면 귀한 보석을 발견한 냥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태극붕어를 잡지 못하는 날엔 허접(?)한 피라미류 서너 마리와 붕어까지 끼워서 태극붕어 한 마리와 교환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늘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수 십 마리를 잡아 통에 넣고 자전거 뒤에 달고 집에 도착하면 살아남은 녀석이 거의 없었습니다.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녀석들도 어항에 넣고 나면 하루 이틀 새 모두 용궁행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한번 물고기를 사냥하러 갈 때마다 최대한의 물고기를 가져오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저 세상으로 가는 물고기의 숫자는 늘어만 갔습니다. 이러한 저의 물고기 학살행위는 위험한 자전거 여행이 아버님께 들켜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호되게 회초리를 맞은 후에야 멈추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뇌리 속엔 우리나라의 민물고기는 일반 관상어보다 매우  약하고 쉽게 죽는다는 고정관념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어린 시절, 그때는 물고기의 입장이 아닌 사람의 입장만을 생각했던가 봅니다.
인간이 손을 대지 않은 자연하천은 물고기들에겐 완벽한 환경입니다. 그러나 어항 속에서 물고기가 살 수 있으려면 최소한 3가지 요소가 반드시 충족되어야만 합니다. 첫째는 물고기에 맞는 적절한 온도입니다. 계곡에서 잡은 물고기를 그냥 어항에 넣어두면 여름엔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계곡에 사는 녀석들은 우리 인간들이 발을 담그기조차 망설여지는 찬물에서만 건강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살기 위해서는 빠른 물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요한 어항 속에서는 이들이 살 수 없습니다. 반대로 수초들이 많은 하류 물고기들은 찬물에 넣으면 감기에 걸려 죽고 맙니다. 
둘째로 어항 속 물고기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물고기 종류에 따른 적절한 용존산소량입니다. 계곡이나 여울물고기는 빠른 물에서만 살기 때문에 산소량이 풍족하지 않으면 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저수지나 하류 물고기는 산소량이 조금 부족해도 잘 견뎌 냅니다. 그러니 어린 시절 제가 물고기 학살의 원흉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작은 통 안에 가득찬 물고기들, 몇 시간을 페달을 밟아 달려야했던 귀가 길, 집에 도착했을 때 물고기들은 작고 햇볕에 뜨뜻해진 물통 속에서 질식사 하면서 서서히 민물고기국이 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물고기를 키우기 위해서 온도와 산소를 적절하게 맞추어 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몇 천 원 짜리 기구 하나 달아놓으면 쉽게 정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작 물고기를 키우는데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물고기가 사는 어항 속에 물고기보다 먼저 유익한 박테리아를 키우는 것이고 박테리아의 활동과 물고기의 생태를 조화시키는 일입니다.  몇일 전 우리 집 베란다에 붙은 왕탱이 집(말벌집)을 제거하기 위해 119대원들이 방문했습니다. 그분들은 저의 어항들을 보자마자 매우 신기해하며 한 목소리로 제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물이 맑을 수가 있나요? 매일 물 갈아주는 일이 귀찮고 힘들지 않나요?” 이 질문을 듣고 저는 껄껄 웃고 말았습니다. 왜냐고요? 물론 저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어항물의 1/3이나 1/4 정도 환수를 해주긴 합니다만 어항 전체의 물은 1년에 한번 갈아줄까말까 합니다. 이렇게 해도 박테리아만 있다면 나머지 일은 전부 유익한 박테리아들이 알아서 잘 합니다. 박테리아들은 물고기 똥들을 분해하여 물을 맑게 하고 비린내 나는 어항에 싱그러운 물냄새가 나도록 열심히 활동합니다. 참으로 신비롭지 않습니까?   
▲물잡이를 하느라고 휑한 어항. 이렇게 15일을 빈 어항을 보며 인내하였다.

처음으로 우리 민물고기를 키우기 위해 어항을 들여놓고 저는 여과기를 24시간 돌리면서 보름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사실 민물고기를 키우겠다고 마음먹은 후 하루 빨리 귀여운 물고기들을 데려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심을 꾹꾹 누르면서 보름이상 인내에 인내를 거듭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물고기들을 데려오기 전에 먼저 어항 속에 박테리아를 증식시키기 위한 인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온도, 산소, 변소(박테리아) 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 제가 키울 물고기들에 맞는 최적의 환경을 마련한 후에야 녀석들을 데려오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집짐승도 그 종류대로, 들에 사는 모든 길짐승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표준새번역, 창세기 1장 25절)
사실 대충 물을 받아놓고 그냥 물고기를 집어넣어도 물고기들이 잘 자랄 수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 강인한 물고기들(금/붕어나 잉어)도 있고 또 물고기가 살면서 박테리아가 증식되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별 신경을 쓰지 않아도 어항의 물이 깨끗하게 유지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 속의 우리 물고기를 키우려는 제게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에게 최적의,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자연에서 데려온 그 녀석들이 아무런 불편함 없이 가장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 어항으로 이주한 녀석들이 오염된 하천에서 사는 것보다 여기가 더 편하다고 느껴지도록 몸으로 준비하고 마음으로 기원했습니다. 이렇게 노심초사 어항을 꾸미면서 저는 이러한 저의 마음이 참다운 부모들의 마음이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부모된 사람들은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가장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모든 부모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먹을 때도 동전 몇닢 때문에 망설이면서 아이들에게는 물질적으로 아낌없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때론 “아이들은 제멋대로 놔둬야 잘 자란다.”라는 방임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조차 그 “제멋대로의 환경”을 늘 유심히 관찰하고 사려 깊게 고려합니다. 그리고 그 환경이 자녀들에게 유익하다고 판단될 때 그렇게 양육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들은 매연이 가득한 도시 한복판에서 살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울창한 숲이 우거진 맑은 공기 속에서 살 수도 있습니다. 또 염소가 가득한 수돗물이나 중금속에 오염된 물을 마시며 살 수도 있고, 마시면 뼛속까지 시원한 건강한 육각수를 마시며 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기오염이 심각한 도시 한복판에서 염소냄새 풀풀나는 물을 마시면서 평생을 산 사람이 울창한 숲에서 육각수를 마시며 산 사람보다 더 건강하고 오래 살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인간의 예측과 노력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조물주라면, 아니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부모의 마음이라면, 가능한 한 우리 자녀들에게 매연 가득한 공기를 들이키고 화학약품 냄새가 진동하는 물을 마시며 살게 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최적의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 마음에 따라 조화로운 환경을 조성해주는 그 노력, 저는 그것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며, 그 분이 창조할 때 하신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보기 좋았더라”고 스스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잡이가 다 끝난 맑고 싱그러운 어항 속의 흰줄납줄개 수컷과 숨어서 떨고 있는 민물새우의 모습

저는 아빠입니다. 그것도 두 아이의 아빠입니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아빠 중에 한 아빠이며, 제 아버지의 하나 뿐인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빠가 가질 수 있는 감성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끼고 모아서 조금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을 때 제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행복했습니다. 비록 제겐 금전적으로 큰 타격이었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열흘 동안 함께 먹고 마시면서 여행을 했을 때 제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 아이들의 행복도에 비해 몇 배를 더 행복해했습니다. 제가 뼈를 깍는 노력을 다해 마련한 전셋집에 입주하여 아이들이 느꼈던 그 행복감, 그리고 제가 아끼고 모아서 계획한 여행에 함께한 내 아이들의 행복감은 그 모습을 보면서 행복해하는 저의 행복과는 비교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노력해서 번 돈, 재물, 노력을 다 쓰면서도 제 아이들이 느끼는 행복보다 더 크고 감미로운 행복감에 침몰해있었습니다. 
제가 아빠로서 느끼고, 알고, 깨달은 그 마음, 이것이 저는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편리하고 넓은 아파트를, 가장 좋은 여행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자연을 이미 오래 전에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체험하고 느끼는 우리가 그 안에서 행복해하고, 감사하고, 축복 받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것을 체험하고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도 못할뿐더러 감사는커녕 하나님의 집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꾸며주신 그 아름답고 건강한 환경을 꼬챙이로 쑤시고, 망치로 때리고, 오물로 더럽히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들입니다. 마치 아이들을 위하여 새 집을 마련하고 그 집을 꾸몄더니 자녀들이 그 집에 들어와 모든 것을 훼손하는 것과 같은 모양새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자연이 우리의 집인 줄 모르고 그 집을 쑤시고, 찌르고, 더럽히고, 오염시키며, 그 집 안에서 질펀하고 파괴적인 파티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습니다. 게다가 고여 있는 물속의 생물체들은 먹고 쌉니다. 싸놓은 배설물들은 물을 더 썩게 만듭니다. 이것이 계속되면 물에는 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조류만 생존할 수 있고 또 이 조류의 급격한 증식은 용존산소를 부족하게 해서 물을 더욱 더 황폐화시킵니다. 이것이 4대강으로 막아놓은 하천에서 요즘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아니 하천정비나 하천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벌어진 모든 하천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러한 짓은 하나님이 하신 일도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도 아닙니다. 물고기들을 위해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최선의 환경을 대책 없이 훼손하고 강탈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여하튼 저는 최적의 어항환경을 만드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뜻하지 않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물고기를 위해 맑은 물을 만드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또 다른 물고기의 희생이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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