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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선] 십자가를 질 것인가? 의지할 것인가?

입력 Jan 09, 2015 08:02 AM KST
지난해 12월22일(월) S회사는 보도자료를 통해서 검찰이 오 모 회장에 대한 고발건을 무혐의 처분했음을 알렸다. 그래서 “이번 검찰 결정으로 오 회장은 자신을 상대로 제기된...관련 의혹에서 모두 벗어났다”고 밝혔다. 하지만, 검찰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S회사 개혁모임은 12월26일(금) 검찰이 “오 회장 피고발사건을 증거불충분 이유로 불기소한 결정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하고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라고 선언했다. 이제 그 싸움은 12월29일(월) 고등법원이 회계장부 열람 및 등사의 허용을 결정한 것을 기화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전망이다. 
위 단락은 최근 사랑의교회의 내홍과 관련된 고발 건에 대해 사법 직역이 내린 결정과 그것에 대한 반응을 기사형식으로 꾸민 것이다. 단체 이름과 회장의 이름만 원래대로 치환하면 손색없는 교계관련 소식이 된다. 교계 내부의 역학관계가 일반사회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게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상황이다. 이제는 교회법이나 교회치리기관의 권위가 사회법의 지배를 받아야 되는 사태가 일반화된 듯하다. 교계 내부의 일도 사회법정에서 시비를 가리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이렇게 교회가 세속기관의 판단대상이 되기를 스스로 자처한 것은 교회치리기관의 역량 및 전문성 부족이 중요한 원인이기는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스스로를 성도(聖徒)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그 호칭이 무색하도록 세속의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목회자를 비롯하여 갈등을 빚는 쌍방의 성도들 모두가 예수를 믿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는 이익단체의 일종으로 전락하고 말 것임을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미 그러한 모습을 보인다는 비판도 심심치 않다. 물론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해서 이견과 분란이 없을 수는 없다. 최근 한국교회 내홍의 전형적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랑의교회의 경우처럼 새로운 지도부가 신앙의 정통성을 변질시켰다며 비판을 받는 점이다. 쌍방은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명분을 내건다.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새로운 지도부가 법조 및 사이버 대응팀을 가동하는 것도 예수의 이름에 의지하여 하는 일이며 개혁모임도 지도부에 대한 쟁송의 명분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거론하고 있다. 갈등의 쌍방이 모두 예수의 이름을 전면화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교회와 세속이 명목상 구별되고 있다고 볼 것인가? 
▲서울 서초동에 소재한 사랑의교회 새성전의 모습. ⓒ베리타스 DB

이 시점에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기적을 꿈꾸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상상해본다. 혹시, 쌍방이 모두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고 있으니 오히려 갈등을 해소할 단초도 거기서 얻어봄직하지 않을까? 쌍방이 다른 해석적 판본을 내걸고 있으나, 예수는 한 분이시니, 각자의 해석의 진실성에 대해 솔직하고 겸허하게 고민하면서 각자의 내심에 은폐된 욕망의 허상을 제거하고 본질을 발견한다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른 해석을 다양성의 한 국면으로 희석시키지 말고, 자신이 내건 예수가 진정 ‘십자가를 진’ 예수인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예수를 어떻게 따라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사태를 조금만 더 단순화해보면, 우선은 자신의 명분이 논리적 타당성이 있더라도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형제를 고발하지”(고전6:1) 않을 것이고 자신에게 불리한 기사를 ‘수색’하여 비난성 댓글달기를 하도록 순진한 양들을 세뇌시키지 않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일에 해당하는 것이다. 구색을 갖춘 사법적인 쟁송이나 조직적인 비난 전략을 활용하는 것은 일반 사회에서 늘 있는 일이지만, 위와 같이 세속적으로 ‘지혜로워’ 보이는 조처들을 중단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더라도 적어도 “믿는 자들”로서의 차별성을 입증하는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쌍방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갔다’는 사실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십자가는 의지하거나 기댈 대상이 아니라 짊어져야 할 대상인 것이다. 자신이 십자가를 의지하고 사는지 십자가를 지고 사는지를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락경 목사는 십자가를 대하는 태도를 ‘의지하고 사는’ 양태와 ‘지고 가는’ 양태로 구분한다. 
십자가를 의지하고 살면 축복된 삶이다. 행복한 삶이다. 기도만 해도 좋은 학교, 좋은 직장, 법관, 정치인, 대통령도 되었다. 명예와 부도 따른다. 즐거운 삶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면 굶주리고, 헐벗고, 집도 없이 가난하다. 핍박도 받고 옥살이도 하고 죽기도 한다. 이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한평생 섬기다 간다. 기쁘게 사는 이들이다. (『임락경의 우리 영성가 이야기』 [홍성사, 2014], 6-7) 
‘십자가를 의지하고 사는’ 삶과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의 차이는 그들이 맺는 열매의 성격에서 드러난다. 십자가를 지고서 사는 사람은 굶주리고, 헐벗고, 집도 없이 가난하며 핍박도 받고 옥살이도 하고 죽기도 하지만 이들은 “기쁘게 사는 이들”이다. 이들은 비록 이름 없고 영광을 얻지 못해도 한평생 예수를 섬길 수 있는 영성을 갖고 있다. 이 영성은 십자가를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맺기 어려운 열매이다. 
사랑의교회 분란과 관련하여 십자가를 지는 행위의 예를 제안하자면, “주의 종”(딤후2:24)이라 일컫는 지도부는 안전한 시스템과 인적 장막 안에서 마치 게임하듯이 외부의 비판에 대처하는 전술을 포기하고 개혁모임을 찾아가서 소통해야 한다. 모욕과 비난이 몰아쳐도 교회 공동체의 갱정을 위해서라면 계속해서 소통해야 한다. 이러한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채 “온유함으로 훈계”(딤후2:25)만 하려는 것은 스스로가 하나님이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딤후2:25) 하시는 대상이 되려는 모순만 지속시키게 된다. 반면, 개혁모임은 사법적인 쟁송을 준비하고 투쟁할 열정을 주변에 퍼져 있는 미자립교회들을 세우는 일에 쏟아봄이 어떤가? 대형교회의 프로그램과 시스템에 비하면 열악하기 짝이 없어서 미자립교회를 섬기는 일은 자신을 영적으로 굶주리고 헐벗고 불편하게 할 수 있지만 “기쁘게 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한다. 정의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기고 이제 회개를 위한 기도를 올리며 자신의 신앙의 열정을 예수께서 기뻐하실 일에 쏟는 것이 거룩한 무리의 ‘미련함’을 구현하게 한다는 말이다.    
교회의 갱신을 명분으로 시작된 갈등이 이제 정의의 이름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공방으로 비치며 ‘칼을 뽑았으니 호박이라도 잘라야 한다’는 집단고집 증후군으로 변질된 듯 보이게 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쌍방은 세상에서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거룩한 무리인 성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들이라는 점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갱신은 성도의 미련함을 구현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쌍방은 위에 예를 든 제안들을 포함하여 자기 십자가를 질 방안을 좀 더 숙고했으면 좋겠다. 불가능한 기적이 즐거운 현실이 될 것을 기대하며 성도의 부활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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