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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선] 한국교회판 신중세주의의 도래?

입력 Feb 16, 2015 08:50 AM KST
오늘날 한국교회의 지형을 일별해보면, 세 가지 현상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위 ‘세금’을 걷는 교회 연합기관이 여러 개 생기는 한편으로 연합기관의 치리에 그다지 충성스럽지 않은 회원교회들이 출현하고 있는 현상, 교회 간이나 교회 내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일단 선악의 이분법적 잣대로 상대를 악마적 존재로 규정하고는 사회법적 정의 관념에 의거해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현상, 교회들이 거대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인테리어를 하는 것은 물론 예배시간에 스크린과 영사장치를 사용하는 등 이미지의 재생산에 많은 관심을 갖는 현상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들은 그 속성들을 분석해볼 때 중세의 시대적 특성들과 관련되어 있다. 첫째, 연합기관과 회원교회와의 관계는 중세의 국왕과 영주와의 관계를 닮았는데, 다만 그 관계상의 계약이 상호간에 원활하게 이행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둘째, 분쟁이 발생했을 때 당사자들은 서로 십자군전쟁을 치르듯이 ‘성전’(holy war) 의식에 사로잡힌 듯 행동한다. 셋째, 중세에 신앙교육을 위해 각종 성상이 건립되고 성인들의 유물이나 유적지에 대한 순례가 강조되었던 대로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시각매체에 대한 의존성이 교회현장에서 유행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한국교회의 지형에서 중세적 요소가 왜곡되거나 부정적인 요소의 재판(再版)으로 드러나고 있는 현상은 혹시 한국교회에 신중세주의(neomedievalism)가 도래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 아닌지 궁금하다. 신중세주의라는 용어는 1977년 헤들리 불(Hedley Bull)과 1986년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등이 사용한 이래 빈번하게 인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주목하는 신중세적 가치는 초국가적 기관(유럽연합 등)과 하부국가적 기관(분리독립을 시도 중인 스코틀랜드 등)의 공존으로 독립국가의 주권이 위축되는 현상과 환타지 등의 중세적 상상력이 문화적으로 유행하는 현상 등이다. 이러한 신중세주의적 특성이 한국교회의 풍토에서도 발견되는 현실에 대해서 필자는 그 용어의 적절성을 섣불리 판단하기 전에, 한국교회의 풍토에서 발견되는 신중세주의를 단순히 중세적 특성의 왜곡된 재판(再版)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아니면 쇠락에 접어든 한국교회에 새로운 활력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는 기회로 해석해야 할지를 재고해보려고 한다.   
▲서울 명일동에 소재한 한 대형교회의 예배 전경. 상기 사진은 이 기사와 무관합니다. ⓒ베리타스 DB

우선 눈에 띄는 현상들로부터 판단할 때, 오늘날 한국교회는 중세가 지상천국의 이상을 구현하려 했던 그 마지막 때의 추억을 살리려는 듯 기독교왕국(Christendom)적 세계관에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부 대형교회에서는 이미 내부에 기독교왕국이 건설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소(小) 교황’적 지위를 누리는 담임목사 아래 충성을 제도화한 직제로 성도들을 조직하며, 모든 분쟁에 대해서 금력과 권력을 동원하여 비판자들을 회유하거나 제압하고, 장중한 이미지를 창출하여 성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므로 신 중세의 도래라고 칭할 만하다. 중세가 봉건제도와 십자군전쟁과 신앙의 교리화 등의 폐해로 소멸했다면, 한국교회 현장에서 포착되는 이러한 신중세주의를 한국교회의 쇠락 조짐을 현시한다고 보는 것은 기우일까? 한국교회의 연합기관들과 회원교회 사이에는 충성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관계가 형성되어 있고, 교회법보다 사회법에 의존해서 교회 분쟁을 해결하려고 하거나 성도들을 동원해서 물리력을 행사하며,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시각매체들을 통해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를, 문자 그대로, ‘보고’ 가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중세의 결말을 알고 있기에 그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경험은 오늘의 새로운 지형에서 재해석되어 시대의 생명력을 회복하도록 돕는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한국교회판 신중세주의를 우리 시대에 생명을 불어넣도록 재해석하는 길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첫째 특성과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거대단체를 결성하여 중앙집권적 권력체계를 구성한다고 해서 효율적인 질서가 확립될 것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세에 교황권이 황제권을 지배하며 권력을 독점했다고 해서 기독교왕국의 이상이 구현된 것이 아니었지 않은가? 실제로 오늘날 총회나 연합회 등의 거대단체들이 현실적으로 개별교회의 주권에 대해 불편한 상관으로서의 지위를 지니는 것이 사실이고 개별교회는 총회나 연합회의 결정을 수용하지 않으려고 사회법정에서까지 다투는 사례가 왕왕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거대단체들은 개별 교회나 군소교단들을 지배하려고 하기 이전에 그들의 허브가 되어 소통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옳다. 원래 연합회를 구성하려 한 의도 자체가 회원교회들 간의 원활한 소통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거대단체는 헤게모니의 장악보다는 개별교회들과 파라처치 혹은 작은교회운동 등까지도 아우르는 소통의 허브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두 번째 특성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중세에 ‘거룩한 전쟁’의 명분으로 발발한 십자군 전쟁이 무고한 인명과 문화를 파괴함으로써 기독교사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분쟁 당사자는 상대방을 마귀나 사탄으로 규정하고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남의 각성을 촉구할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죄성을 깊이 고뇌하며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행위를 일컫는다. 남들에게 회개를 외치는 일은 요나나 이사야처럼 스스로를 철저히 회개한 뒤에 하나님의 지시로 행할 수 있는 것이지, 일반 사회의 시위대처럼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라고 구호처럼 연호한다고 실현되는 행위는 아닌 것이다. 
세 번째 특성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복음의 실천보다는 이미지의 재생산에 경도하는 듯한 경향을 반성해야 한다. 중세에는 무지한 민중을 교화하기 위해 성상을 건립하고 성지나 성인의 유품 및 유적지 등에 대한 순례를 통해 시각적인 교육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날에까지 와서 복음을 이미지화하는 현상을 방기하고 재생산하는 행위는 복음의 생명성을 흐릴 우려가 있다. 복음은 실천을 통해 직접 그 의미가 실생활에 구현될 때 생명을 살리는 길을 열어준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라고 하신 말씀은 “나와 함께 걷자”는 말이지 않은가? 복음은 목회자가 먼저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고 성도들에게 나와 함께 걷자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보여주기에 집중하다보면 복음을 강단에 가두고 게임과 영화 등에서처럼 낭만적 환타지를 형성하여 하나님을 기복신앙의 대상으로 만들게 된다. 
이러한 재해석의 시도가 진지하게 진행되지 않을 때 우리는 교회현장에서 소통과 포용과 실천의 가치를 동반하지 않는 허위의식의 재현만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복음이 실천되지 않는 곳에 진정한 회개가 있을 수 없고 겸손한 헌신으로 지탱되는 공동체가 존립할 수 없다. 또 한 번 중세의 몰락을 한국교회의 지형에서 확인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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