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1 ‘종교’와 ‘다종교상황’이라는 것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May 16, 2015 09:07 AM KST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베리타스 DB
과학의 출현이 새로이 열었다는 근세를 탈종교화 또는 세속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중세 종교의 자리를 과학이 대신하여 인간을 더욱 확실히 잘 살게 해 줄 것이고 결국 인류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과학주의까지 치달아갔지만 그것은 곧 근세 붕괴의 서주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이 시작된 우리 시대인 현대는 아직도 엮어져가는 중이라 잠정적으로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앞선 근대와 연속적이라는 뜻에서는 ‘후기근대’이기도 하고 불연속적이라는 뜻에서는 ‘탈근대’이기도 할 것입니다.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는 우리의 시대에 종교의 퇴조를 여러 모로 예견한 이들이 꽤 있었지만 세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종교의 운명을 그렇게 점쳤던 말들이 딱히 맞아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굳이 즐거워할 일만도 아닌 것은 종교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무종교인들이 그 어떤 종교인보다도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것도 엄연히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종잡을 수 없어 보이지만 이런 혼란 속에서도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인류가 씨름해야 할 중차대한 과제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크고 작은 갈등과 충돌, 분쟁과 전쟁 등이 실제로 종교적인 이유에 의한 경우도 적지 않거니와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우거나 포장하면서 충돌을 향한 폭발력이 증폭되는 현실은 굳이 논의나 증거를 찾을 필요도 없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정치적 목적을 지닌 집단이 권력을 차지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종교적 포장을 동원하면 순교를 불사하는 종교적 극단주의가 극악무도한 폭력의 주범으로 둔갑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명한 일입니다. 나만이 옳다는 진리에 대한 신념과 남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 사이에서 고민할 여지없이 진리의 깃발이 치켜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비단 국제뉴스를 타는 범위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사실 이런 문제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갈등과 충돌은 이름이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같은 이름의 종교, 같은 이름의 신을 믿는다는 종단이나 교단들, 교파들 사이에서도 무수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리스도교 현실을 비판하면서 신앙의 당파성과 사랑의 비당파성 때문에 신앙과 사랑이 서로 모순될 수밖에 없다고 예리하게 지적해주기도 했지만 종교인들에게서 이러한 문제는 간단하게 교리적으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삶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 문제를 여기서 조금은 차분히 다루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여러 종교들이 한데 얽혀 있고 심지어 같은 이름의 종교 안에서도 결코 이에 못지않은 갈등과 충돌이 벌어지고 있으니 도대체 근본적으로 어떻게 문제를 진단하고 또한 처방을 모색해야 할지 고민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른 바 ‘다종교상황’에 대한 정직한 분석을 먼저 해야 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이런 토대에서 우리가 함께 관심하는 그리스도교의 마땅한 모습을 그러한 다종교상황에서 어떻게 구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다종교상황과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라고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짚고 가야 할 것을 살피고 들어가겠습니다.  
1. 서설

‘종교’와 ‘다종교상황’이라는 것

종교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다고 바로 단도직입적인 대답을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관심하려는 기독교 입장에서 ‘종교’란 말이 어떤 뜻을 지녀왔는가를 묻고자 할 따름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종교’라는 말은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기독교가 태동할 때에는 이미 주변에 많은 종교들이 있었으니 이들과의 관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꾸리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고 저항하면서 변호하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태동과 핍박, 순교의 역사는 이를 웅변해줍니다. 또한 기독교 신학이 호교론 또는 변증론으로 시작했다는 것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주후 1세기에서 시작하는 태동기에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에 대항하여 자기를 확립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에 이르러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핍박받던 순교자의 종교’에서 ‘군림하는 황제의 종교’로 급격한 탈바꿈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변화는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세계화의 발판이 되기는 했지만 동시에 너무도 빨리 정치권력과 결탁하면서 힘 숭배사상을 노골적으로 정당화할 정도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여튼 이런 상황은 종교에 대한 과학의 도전으로 탈종교화와 세속화가 시작하게 된 근세의 여명이 돋아나기까지 계속되었으니 15세기까지 상당히 긴 세월동안 기독교는 지배종교가 되었습니다. 이제 지배종교가 된 기독교는 스스로를 지칭하기 위해 굳이 ‘종교’란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라는 말로 충분했기 때문에 그것이 고유명사이면서 동시에 보통명사로서의 역할도 했습니다. 이 때 ‘종교’란 말은 ‘올바른 가르침’ 또는 ‘경건한 믿음의 태도’를 일컬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과학에 의해 새롭게 열린 근대는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 끝에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를 뒤로 하고 계산과 측량을 거쳐 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다 끝을 향해 달려 나갔습니다. 목숨을 내건 도전이었지만 이게 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땅, 다른 사람, 다른 문화, 다른 종교들을 만났습니다. 지배종교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하고도 불가피하게도 이런 다른 것들과의 관계는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은 그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나와 같으면 옳은 것이지만 나와 다르면 그냥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배종교의 위상이 흔들리겠기 때문입니다. 이걸 나중에 ‘배타주의’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틀린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옳은 길이었습니다. 적어도 근세전기라 할 16-17세기에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오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통과 통신이 점점 더 발달하고 다름과의 만남이 더욱 빈번해지면서 마구 틀렸다고만 간주했던 다름이 꼭 틀리지만은 않다는 것을 점차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동네에서도 사람들이 삶의 가치와 의미, 도덕과 윤리에 대한 전통과 문화를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적절하게 엮어가면서 살아가는 모습들과 만나면서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다고 하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마구 틀렸다고 배제해 버릴 수만은 없음을 깨닫고 조금씩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기독교가 최고로 우월한 종교이고 다른 종교들은 기독교에 비하면 수준이나 등급이 낮은 단계에 속한다는 식으로 정리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기독교를 기준으로 정도의 차이를 평가하면서 서열을 매기는 식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다른 종교들이 통째로 틀렸다기보다는 세계관과 도덕, 초월체계에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한 수 가르쳐 기독교와 같이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을 내치기보다는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여 가르치겠다고 하니 이를 일컬어 ‘포괄주의’라 하는데 가르침이 바로 선교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18-19세기에 걸친 근세후기의 상황입니다. 
그러다가 우리 시대인 현대로 넘어오면서 상황은 또 급변합니다. 과학이 열어준 근대는 새로운 시대의 여명과 함께 시작했다고 평가됩니다. 중세의 암흑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하여튼 근대는 그런 여명과 함께 시작한 역사낙관주의가 인간중심주의와 함께 찬란하게 전개되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과학이 종교의 자리를 대신하여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거품 물던 과학주의는 과학 스스로에 의해 붕괴되었고 인간은 이제 소외와 허무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근세가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이걸 물려받은 현대인들은 불안과 절망을 거치면서 그동안 억눌려졌던 물질과 육체의 해방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인 현대는 그 시작이 근대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중세의 종교도 아니고 근세의 과학도 아니라면 이제 인간은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게 현대인들이 묻고 씨름해야 할 과제인 것입니다. 
고대와 중세 시대에는 전제군주체제이니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노예의 편안함’이 대중의 기본정서였습니다. 근대에는 시민사회로 전환되었다고 하지만 이 때 시민이라는 것은 똑똑한 과학적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근대를 이끌었고 이때에도 그저 이들이 제공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가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근대화가 가리키는 것과 같이 물려받은 땅으로 권력을 행사하던 고전시대의 1차 산업 위주에서 과학이 만들어준 기계화에 의한 2차 산업으로 전환하면서 부의 재분배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결국 16세기 과학혁명의 효과가 점차로 대중에게 퍼져나갔으니 18세기의 계몽주의는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 우리 시대인 현대라면 과연 현대인은 삶의 매뉴얼을 더 이상 다른 곳으로부터 받을 수 없게 되고 각자가 판단하고 선택하며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불안과 절망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켰으니 여기서 ‘실존’이라는 이름의 인간상이 나타납니다. 이제 인간은 알알이 개체화되었습니다. 개인주의적 민주주의가 점차로 사회의 정치체제로 자리 잡게 된 것도 이런 맥락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대중이 곧바로 개체적 결단에 익숙할 수는 없었으니 많은 처방들이 제시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여러 종교들 사이의 관계도 요동을 치게 되었고 기독교의 자리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여러 다른 종교들 사이에 함께 있는 ‘하나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엄연한 현실입니다. ‘종교’라는 말도 필요 없던 중세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꽤 많이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일 뿐 아니라 그것도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가 된 것입니다. 소위 ‘다원주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했습니다. 여러 종교들이 혼재하는 상황에서 하나의 종교가 다른 종교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상세히 논하겠지만 다원주의는 매우 다양하고 심지어 그 안에서도 서로 충돌하는 입장들이 꽤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는 아직도 다원주의에 대한 폭력적 매도가 지배적인데 이는 거의 대부분 이제는 부적절한 것으로 폐기처분된 고전적 유형의 다원주의에 대한 것일 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를 논의하는 필자는 다원주의에 대한 단순한 지지를 표방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이보다 훨씬 더 깊은 데에 깔려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선 위에서 논한 일련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세기            기독교의 자리          다른 종교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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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         다른 종교들을 거슬러 기독교
  Christianity against gentile religions

4-15              오직 기독교  
           Christianity Only

6-17           유일하게 참된 하나의 종교로서의 기독교        배타주의
Christianity as the One and Only True Religion    
                 
18-19   최고로 좋고 높은 수준의 종교로서의 기독교        포괄주의
Christianity as the Best and Highest Religion

20-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로서의 기독교  다원주의
Christianity as a religion among other religions    
 
일단 역사적 배경의 전개과정을 간략하게 위와 같이 간추릴 수 있다면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상황에서는 ‘다종교상황’이라는 사실적 판단의 언어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여러 종교들이 혼재하는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은 엄연히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종교상황’이 자연스럽다면 일상을 뜻하는 것이니 굳이 되새길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역사적으로 동양종교문화권에서는 그러해왔습니다. 여러 갈래의 전통을 이루는 종교들이 유구한 역사에서 승계되어 오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자연스레 엮어 내다보니 한 문화권 안에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한 사람에게서도 여러 종교들이 혼재하는 것도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점을 주목하여 강조할 것이지만, 이게 바로 사실 종교의 단위로 살필 것이 아니라 인간을 기준으로 살펴야 한다는 당연한 통찰의 부정할 수 없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위 서양종교문화권으로 가면 이야기가 매우 달라집니다. 그도 오래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데 부족국가체제를 넘어 정치적으로 제국화하면서 지배력의 범위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통제이념의 필요성과 맞물려서인지 종교의 경계들이 점차로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불가피하게 여러 종교들이 긴장 또는 경쟁하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힘겨루기가 벌어지게 되었으니 문명 간의 충돌은 물론이거니와 개인들에게도 ‘하나의 종교’라는 정치적 이념이 종교의 보편성을 구실로 강요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종교간 갈등이라는 상황을 겪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다룰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간문화연구나 종교학, 종교신학 등 여러 분야에서 진단과 처방이 엮어졌습니다. 다만 미리 일러둘 것은 ‘다종교상황’이라는 것은 ‘종교다원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입니다. 앞서도 언급했거니와 나중에 살피겠지만 종교다원주의도 초기 주장들의 부적절성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제는 무수한 갈래로 나뉘고 있으니 하나의 편협한 주장인 줄로 알고 매도하는 오류를 더 이상 지속할 일은 아닙니다. 아울러 다시금 강조하건대 ‘다종교상황’이란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고 혼재하는 상황에 대한 단순서술의 뜻일 뿐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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