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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15 슈바이처가 말하는 그리스도교의 우월성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Dec 28, 2015 12:26 PM KST

2.1. 포괄주의 (1): 슈바이처의 '그리스도교와 세계종교'

jungjaehyun
(Photo : ⓒ베리타스 DB)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앞서 살핀 복음주의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핵심 근거로 하는 입장입니다. 복음주의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기초로 이천년 전 그날, 그곳에서 그렇게 태어나 죽고, 부활과 승천하신 것으로 경전을 통해서 전해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데에서 출발해 온 세계로, 역사 전체로 향하는 구도를 지녔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위한 구세주가 되는 것은 맥그래스가 말했듯이 '잠정적인 차원,' 즉, 우리에게 지상과업으로 남겨졌습니다. 유일성을 구성할 뿐 아니라 이의 논리적 근거가 되는 개별적인 특수성이 출발의 전제이며, 보편성은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집니다. 말하자면 복음주의에서는 보편성은 부차적인 것이고 설령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유일성'이라는 근본주장에는 아무런 변화나 지장이 없습니다. 개별적 존재에 토대를 둔 역사적인 특수성에서 시작하여 잠재적인 범역사적 보편성을 지닌 당위로 나아가는 방식이니 결국 개체를 전체로, 개별을 보편으로 확장시키는 구도를 개진하고 있으며 이 구도에 포함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확연하게 갈라내는 입장으로 귀결됩니다. 복음주의가 그 자체로서 배타주의를 적극적으로 표방하지는 않더라도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이제 다루려는 포괄주의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이 가장 중요한 주장입니다. 복음주의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포괄주의의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사뭇 다릅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차이는 매우 중요한데 포괄주의의 다른 자료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겠습니다. 그러나 유일성과 우월성 사이의 차이는 상식적임에도 불구하고 좀 더 자세한 주목을 요합니다. 유일성이란 다른 것은 틀렸을 뿐 아니라 없다는 것이라면, 우월성은 일단 다른 것들과 함께 있는 상황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들과 비교하고 판단하며 주장하는 주제입니다. 그런데 우월성 주장도 그 근거와 배경이 각양각색이니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개라도 살펴보는 것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해서 슈바이처, 트륄취, 라너 세 사람의 글을 살피고자 합니다. 많은 글들이 있지만 김승철 교수가 번역하고 편집한 『종교다원주의와 기독교』라는 책에 수록된 논문들을 읽고자 합니다. 이렇게 선택하는 것은 이들의 대표성이야 재론의 여지가 없을 터이고, 슈바이처가 포괄주의 안에서도 꽤 고전적인 면모를 보인다면, 트뢸취는 전환기에서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라너는 더욱 진전된 전개로 틀 잡힌 구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 셋은 각기 나름대로 독특한 포괄주의의 면모를 보입니다. 이런 순서로 살피는 것은 연대기적으로도 적절하지만 포괄주의라는 틀 안에서 일련의 전개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포괄주의라는 범주 안에 묶이지만, 세 사람이 각각 어떤 근거에서 어느 정도로 우월성을 주장하는지 살피고 또한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하는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 각 세 사람의 주장을 명제 단위로 추리면서 앞서 논했던 종교관 관계구성의 논리적 근거와 역사적 배경에서 분석된 포괄주의의 관계구도, 초점, 주장을 적용하여 이들이 명실공히 포괄주의로 분류될 수 있음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포괄주의의 면모를 보이는 가운데서도 각 사람이 서로 내세우는 핵심적인 근거개념들을 찾아낸다면 보다 효과적으로 이들을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슈바이처를 특징짓는 핵심 개념들을 찾고 추림으로써 트뢸취나 라너와 어떠한 면에서 다른지를 가늠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훨씬 더 입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우리가 갈 길을 도모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쓴 "그리스도교와 세계 종교"라는 글은 꽤 길고 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세계 종교들의 관계를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석하면서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기독교가 아닌 종교들이 단순히 이교라고 불리면서 추방되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진지한 추구와 탁월한 사상이 그 종교들 속에 얼마나 녹아 있는지를 묻는다. (26)

현대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이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하나님 나라 사상이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우리가 비기독교인들의 과거 속에서 넓은 하늘 아래에서도 기독교의 이상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축소시키려 하지 맙시다. (57)

말하자면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그는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갈고 닦아 세계적인 석학이 되더니 문명의 오지로 달려갔습니다. 다른 것을 향해서 말입니다. 숭고합니다. 이에 대한 예찬은 지면이 모자랍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이면도 있습니다. 자신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열등을 향해 갔던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포괄주의의 핵심주제인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슈바이처가 어떤 방식으로 말하는지를 살펴봅시다. 우선 "그리스도교와 세계 종교"라는 제목이 자신의 입장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세계 종교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목에서 바로 추려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세계 종교들 중에서 그리스도교를 따로 떼어내고 또 앞에 놓았습니다. 관계 짓고 비교하면서도 앞세운 것이지요.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제목이 이미 주장하고 있습니다. 너무 과장된 자의적 해석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이 글 전체를 따라가게 되면 충분히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배타주의가 되어버리는 복음주의가 표방했던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에 대해 나름대로 새로운 해석을 내어놓습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로마적 경건과 구원에 대한 동경에 동양으로부터의 신비주의적 성향이 더해져 그리스도교 안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이런 맥락에서 독창성을 주장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많은 측면으로부터 그리스도교의 독창성이 의심받고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이념들은 연대기적으로 그리스-로마 세계의 종교로부터 유래했다. 맨 처음에는 구원을 동경하던 종교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그 다음에는 유대교의 랍비인 예수를 이 '구원 종교'의 선포자로 만들었던 하나의 전통이 나타났다. (27)

근대 이후 새로운 연구들이 진행되면서 그리스도교의 독창성이 의문시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의미에서 독창성을 다시 주장합니다. 물론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한 포석이겠지요. 그는 종교사적인 연구를 통해서는 그리스도교가 지닌 독창성이 의심받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독창성은 다름 아닌 윤리-행위-실천적인 차원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토대로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실제로 슈바이처는 아프리카로 가서 실천을 도모하기도 했습니다.

후기 그리스 종교의 구원사상과 그리스도교의 구원사상 사이의 차이는, 한쪽은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상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반면 다른 한쪽은 하느님 나라라는 표상에 집중했다는 것에 있다. 후기 그리스 종교는 인간과 세계의 운명에 관심을 쏟은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의 회복에만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세계의 변화에 대한 불타는 듯한 희망으로 살았다.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은 하느님께서 변화된 세계, 즉, 하느님의 나라를 도래하게 하시고 경건하고 도덕적으로 확증된 이들은 그 나라에 받아들인다는 데서 성립할 수 있다. (30)

과연 자신이 실천한 신념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글입니다. 여기서는 '정신의 회복'과 '인간과 세계의 운명에 대한 관심'이 대비됩니다. 이런 식의 대비가 내내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로 유입되어 영향을 주었던 그리스 종교나 동양종교들은 불멸성에 대한 마술적 부여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윤리적인 실천에 더욱 큰 비중을 부여했다는 데에서 결정적인 우월성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나 동방의 신비종교들은 탈세계적으로 정신의 회복에 집중했다면, 그리스도교는 예언자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인간과 세계의 운명에 관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동방의 종교에서는 죽은 신이라는 표상이 지배하지만, 예수의 하나님은 인간 가운데서 활동하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34).

전체적인 형식의 차원에서는 낙관주의 대 염세주의, 일원 대 이원의 대립으로 나누고, 내용의 차원에서는 논리 대 윤리, 정신 대 활동으로 나뉩니다. '정신의 회복'은 현실의 도피로 이어지지만 '그리스도교는 세계의 변혁을 희망'합니다. "예수는, 예언자들처럼 그리고 또한 많은 부분에 있어서 예언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짜라투스트라처럼 세상으로부터 자유함을 요청함과 동시에 세상 속에서의 행동도 요청"하고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함'과 '세상 속의 행동,' 이와 관련된 구절이 공관복음에 나오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입니다. "자기를 버리고"에서 끝나면 현실 도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한다'는 이유로 현실로부터 은둔하는 것을 경계하는 장치가 '세상 속의 행동'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따르라"는 것은 동어반복이 아니라 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자기를 버리고"가 세상으로부터의 자유를 가리킨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세상 안에서의 행동을 강조합니다. "날마다 네 십자가를 계속 지라"고 예수는 말합니다. 슈바이처가 보기에 그리스도교 이외에 이를 말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불교를 보면 애초에 소승불교는 탈속을 말했습니다. 물론 후에 대승불교가 등장해 현실참여를 말했지만 이 마하사상이 등장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불교의 내적 원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도가 사상과의 만남 덕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도가라면 현실초월적인 분위기를 느끼지만, 도가는 기본적으로 현실주의적입니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라는 뜻의 무행이 아니라, 무작위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만 노자는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말하며, 그래서 낙관주의적 분위기를 보일 뿐입니다. 이점에서 도가는 '생즉고'를 말하는 비관주의적 색채를 띤 인도의 불교와는 다릅니다. 도가와의 만남을 통해 불교는 대승화됩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소위 영혼구원과 전인구원, 개인구원과 세계구원 등이 대립하고 있지만, 적어도 원론적으로 봤을 때 저 종교들과는 다릅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다 비슷하지 않느냐는 비판에 대비해 슈바이처는 이렇게 말해 놓았습니다.

상이한 종교들의 색다른 근본사상들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 종교들의 이상을 살핌으로써 세계종교들을 가리고자 한다. 각각의 종교들이 실제로 그 종교들의 이상에 어느 정도 뒤쳐져 있는지는 고찰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인 현상으로서 그리스도교 역시 자신의 이상에 훨씬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예전에 행했던 것보다 더 가까이 자신의 이상에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39)

말하자면, 이상과 현실 사이의 차이야 모든 종교들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는 이상에 다가가도록 윤리적인 실천의 차원을 다른 종교들보다는 훨씬 더 강조하고 강화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논리 대 윤리의 대비 구도를 넘어서 윤리라는 범주를 다른 종교에 적용하더라도 여전히 그 안에서 그리스도교와 타종교는 구별이 될 뿐 아니라 더욱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구별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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