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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뱀과 비둘기 사이에서

2016년 7월 10일 경동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채수일 목사

chaesuil
(Photo : ⓒ베리타스 DB)
▲경동교회 채수일 목사

성경본문

역대하 24:18-22

백성은 주 조상의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렸다. 주님께서는 백성을 주님께로 돌이키도록 경고하시려고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백성은 예언자의 말 듣기를 거절하였다. 여호야다 제사장의 아들 스가랴가 하나님의 영에 감동이 되어,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나 하나님이 말한다. 어찌하여 너희가 주님의 명을 거역하느냐? 너희가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주님을 버렸으니, 주님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없앨 음모를 꾸몄고, 드디어 왕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성전 뜰에서 그를 돌로 쳐죽였다. 이렇듯 요아스 왕은,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보인 그 충성을 생각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스가랴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이 일을 굽어 보시고, 갚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로마서 5:1-5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서 10:16-22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을 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나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 앞에서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관가에 넘겨줄 때에, 어떻게 말할까, 또는 무엇을 말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때에 지시를 받을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죽음에 넘겨주고, 아버지가 자식을 또한 그렇게 하고, 자식이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서 부모를 죽일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설교문

1.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

'이리와 양'은 구약성서와 유대교 문헌에 자주 함께 등장합니다. 이사야서는 메시아가 올 때, '이리와 양이 함께 살며'(이사야 11,6), '함께 풀을 먹는다'(이사야 65,25)는 표징으로 종말론적 평화의 시대를 예언합니다. 결코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이리와 양, 먹고 먹히는 관계의 두 동물이 평화롭게 함께 사는 세상,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메시아가 올 때 이루어지는 종말의 상징입니다.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독사와 전갈이 살고 있는 광야에서 신발과 지팡이도 없이, 전대도, 여행용 자루도, 속옷도 없이 방랑하는 급진주의자인 제자들, 소송과 채찍질과 박해가 기다리는 세상으로 가야 할 제자들의 현실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제자들이 만들어야 할 세상을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요. 이리가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위협받는 양들이 만들어야 할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그런데 이런 박해에 직면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소송과 고문, 권력자들에 의한 박해와 죽음, 배신과 증오가 기다리고 있는 세상 속으로, 무방비상태의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뱀을 '지혜'의 상징으로 말씀하셨지만, 창세기는 '간교함'의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창 3,1). '지혜'와 '간교함'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간교함'과 '지혜'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세태처럼, 내편이 하면 지혜, 적이 하면 간교함이라는 주장은 두 갈래로 갈라진 뱀의 혀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뱀이 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지혜와 치유와 생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뱀을 간교함의 상징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뱀이 냉혈동물이라는 점, 뱀의 눈은 감았다 떴다 하는 눈꺼풀 대신 투명한 비늘로 덮여 있어, 항상 뜨고 있다는 점, 갈라진 혀를 가지고 있다는 점, 다리도 없는데 빠르게 움직이면서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제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지혜와 간교함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단 말일까요? '지혜'와 '간교함'을 구별할 수 있는 길은 편 가르기가 아니라, 그 열매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따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사탄도 충분히 지혜롭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는다'(마태 11,19)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간교함과 지혜는 결국 그 사람의 삶의 결과로 차이가 입증되는 것입니다.

순결함이 배제된 지혜는 간교함으로 전락할 수 있고, 세상에 대한 충분히 현실적인 판단(뱀의 지혜)이 배제된 순결함은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이런 실존적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긴장이 경계하고자 한 것은 한편으로는 '사이비 순교'를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순교의 자리로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태 10,23)라고 하셨습니다. 순교에 대하여 경계하신 것으로 미루어보아 우리는 당시 순교강박증, 종교적 소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인물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이런 '소영웅주의적 순교강박증'에 사로잡힌 인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대의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챙기는 사이비 순교자들, 특히 지식인들 말입니다. 순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푼 이들이나 가는 길이지, 소영웅주의적 순교강박증에 사로잡힌 소인배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다른 한편으로 뱀의 간교함과 비둘기의 순결함 사이의 긴장이 경계하고자 한 것은 제자들이 박해자들에게 넘겨졌을 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니라'(마 10,19-20)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비둘기 같은 순진함과 순결함으로 두려움과 걱정 없이 그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을 단순하게 의지해야 했습니다. 제자들이라고 해서 모든 인간적 두려움과 염려와 걱정이 없을 수 없으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에 대한 믿음, 우리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하나님에 대한 순진한 신뢰만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마 10,28).

예수님의 제자들은 박해의 현실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뱀처럼 지혜로워야 했고, 동시에 두려움 없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할 수 있는 순진한 믿음을 가져야 했던 것이지요.

2. 그런데 오늘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뱀의 간교함'과 '비둘기의 순진함'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경험에 따르면 이 두 가지를 한 인격 안에 결합하여 가지고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간교한 사람을 순진하다고 말할 수 없고, 순진한 사람은 대부분 어리석은 것이 일반적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두 가지 성품을 이상적으로 결합시켰던 한 인물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그는 아브라함 링컨(1809-1865)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2012년에 제작한 영화 '링컨'에서 링컨이 암살당하기 전(1865년 4월14일)까지 노예제 철폐를 위한 수정헌법 13조를 공화당이 열세인 하원에서 표결로 통과시키기까지 정치인으로서의 링컨을 그립니다. 원작자인 도리스 컨스 굿윈의 '팀 오브 라이벌스'(국내 판은 '권력의 조건')를 읽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그의 민주당 대선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국무장관으로 발탁한 것이 이 책의 영향이었다고 해서 더 유명해진 책인데, 이것을 스필버그가 영화로 만든 것이지요.

우리에게 링컨은 켄터키의 오지 농촌 통나무집에서 자라, 60만 명의 사상자를 낸 남북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노예제를 폐지한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풍부한 유머, 공화당 대선 후보에서 패배했던 다른 세 명을 모두 국무, 재무, 법무라는 핵심적인 장관으로 임명할 정도로 용기 있고, 개방적이고, 포섭적인 리더십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필버그의 '링컨'은 공화당이 열세인 하원에서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키기 위해,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반대세력을 공직을 미끼로, 때로는 돈으로 매수하고, 때로는 협박하고 포섭하는 부도덕한 수단을 서슴치 않는 링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대 입장의 의원들을 매수하거나, 적대자와 비밀리에 거래하거나 때로는 압박을 가하면서 거짓말도 불사하는 링컨의 모습은 참모들을 당황하게 합니다. 나침반처럼 항상 드높은 이상을 지향했던 링컨에게 실망한 보좌관에게 링컨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나침반은 언제나 서 있는 곳에서 정북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늪지대, 사막, 협곡 등 도중에 만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가리키지 않지요. 목적지를 향해 가다 장애물을 모르고 거꾸러져 늪에 빠지는 정도 밖에 못 이루면 정북을 가리키는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전쟁을 끝내면서 동시에 노예제를 폐지해야 하는 외줄타기 정치 현실에서, 종전으로 인명 피해를 막으면서, 동시에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노예제의 부활을 근원에서부터 차단하기 위해 링컨은 정치적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종전과 노예제의 종언이라는 상호 배타적인 선택지 앞에서 링컨은 도덕적 이상과 현실 정치를 결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면서, 높은 도덕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비도덕적인 행위로 비난받을 일도 불사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뱀의 간교함과 비둘기의 순진함을 한 인격 안에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종교는 동기와 과정의 순수성에서 평가받는다면, 정치는 결과로서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기와 과정의 비순수성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추구하는 결과가 사익을 위한 것인지, 공익을 위한 것인지에 따라 정치적 평가는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링컨은 흑인노예해방이라는 결과의 도덕성에 대한 신념 때문에, 비록 부도덕한 방법을 택했지만, 인류의 미래에서부터의 평가 받기를 선택했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영화 장면의 사이마다 조금씩 비추지만, 링컨은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링컨의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동생은 병에 걸려 죽고, 누나는 시집가서 아기를 낳다가 죽는 등 어린 시절부터 링컨은 죽음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20대 초반에 발병한 우울증은 평생 동안 링컨을 괴롭혔습니다. 젊은 시절의 실연, 정치적 패배, 아들 윌리의 죽음, 아내의 충동적인 소비와 부정부패, 패전과 재선 실패에 대한 공포 등도 링컨의 우울증을 심화시켰습니다. 링컨은 자살 충동에 시달려 호주머니에 칼이나 총을 가지고 다닐 수 없었고, 나무에 목매달아 죽고 싶은 충동을 피하기 위해 숲 속을 혼자 산책하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링컨의 우울증을 연구한 조슈아 솅크(링컨의 우울증, 이종인 역, 랜덤하우스, 2009)는 링컨이 시와 유머로 우울증을 극복했고, 엄청난 고통을 위대한 힘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합니다. 링컨은 우울증을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좋은 인생으로 나아가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해석했고, 결과적으로 우울증은 링컨의 원숙한 성품, 사상, 정치인으로서의 공적 행동에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자살을 생각했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려면 어떤 목표를 가져야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었고, 마침내 그가 발견한 대답, 그것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세상을 자기가 살아온 것보다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명감이었습니다. 삶의 덧없음과 절망감이 오히려 그에게 비전의 명확함, 태도의 확고함, 어려운 때를 견디는 인내를 준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고, 우울증이 모든 사람을 링컨 같은 위대한 인물로 승화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해마다 1억 명 이상이 우울증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2천 년에 전 세계적으로 약 100만 명이 자살했는데, 같은 해 전쟁과 범죄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숫자와 맞먹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7년에 248만 건이었던 우울증이 2011년에는 344만 건으로 38.9 증가했다고 합니다.

링컨은 시와 유머로 우울증을 감싸 안았습니다. 우울증을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울증을 감싸 안고 그런 자신을 용서했기 때문에 링컨이 위대한 것입니다. 내면의 어둠을 완화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그 어둠을 인정하고 끌어안을 때, 우울증은 삶의 파괴자가 아니라, 위대한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링컨은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 것입니다.

3. 그렇다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진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 시대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악과 싸울 때, 간교하리만큼 충분히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현실 판단과 미래 전망이 악한 세력보다 비현실적이거나, 무식하거나, 유치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지혜를 다한 모든 인간적 판단과 행동의 결과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에게 맡기고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혜가 아니라 순진함이, 우리의 머리카락을 다 세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순진한 신뢰만이 제자들을 '끝까지 견뎌 구원을 얻게 하는 힘'(마 10,22)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진함으로 세상의 악한 세력을 이기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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