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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 문 앞에 서서 외치라

2016년 8월 16일 청파감리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김기석 목사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성경본문

렘 7:1-17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님의 성전 문에 서서, 주님께 예배하려고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유다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큰소리로 일러주라고 하셨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의 모든 생활과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이 곳에서 너희와 함께 머물러 살겠다.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 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내가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 하도록 준 이 땅, 바로 이 곳에서 너희가 머물러 살도록 하겠다"]

설교문

* 시대의 어둠을 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무더위가 절정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절기상으로 입추입니다. 여름 한복판에 가을이 들어서는 날입니다. 믿기지 않지만 좋은 소식입니다. 이제 매미 소리가 더욱 처연해질 겁니다. 달이 차면 이울고, 어둠이 지극하면 새벽이 오듯이, 세월은 그렇게 서로 스며들며 진행됩니다. 자신의 때를 잘 알아 그 때에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누리며 살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눈이 밝은 이들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고, 시련 속에 감춰진 은총의 빛을 봅니다

김영란 법 시행을 앞두고 정계, 관계, 언론계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이들일수록 이 법을 불편하게 여깁니다. 대접 받는 일에 익숙한 이들은 이 법에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관행화된 접대를 통해 이익을 확보하곤 했던 이들이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 테니 말입니다. 감리교회가 세습방지법을 만들자 법의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변칙적인 세습을 완료하는 이들을 본 경험이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거짓과 불의가 암암리에 용인되는 사회에 사는 동안 우리는 부끄러움과 염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공평과 공의가 무너진 사회에서 늘 피해를 보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게 불의한 기업들의 생존 전략이 되고 있습니다. 강자들의 오만함과 약자들의 원망이 불협화음을 일으킬 때 한 사회의 토대는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 시대를 통찰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비한 채널을 통해 듣고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시대를 고스란히 앓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특히 그러합니다. "아이고, 배야, 창자가 뒤틀려서 견딜 수 없구나. 아이고, 가슴이야. 심장이 몹시 뛰어서, 잠자코 있을 수가 없구나. 나팔 소리가 들려 오고, 전쟁의 함성이 들려 온다."(렘4:19) 동족들에게 닥쳐올 시련을 보았기에 그의 창자가 뒤틀리고, 심장이 뜁니다. 문제는 그런 사실을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홀로 보는 자의 외로움이 깊습니다. 깊은 숲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전체적인 산세를 가늠하지 못하는 것처럼, 현실에 깊이 밀착되어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들이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법입니다.

예레미야는 남왕국 유다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직감했습니다. 국제정세의 변화도 변화려니와 내부적 모순이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은 백성들의 음행과 악행으로 인해 더럽혀졌습니다. "너의 치맛자락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죄없는 피가 묻어 있다"(렘2:34). 이것이 2,600년 전 지중해변의 한 작은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이건 고스란히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자기 지위를 이용해 순식간에 재산을 불리는 이들은, 하루하루 가녀린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개, 돼지로 여깁니다. 눈 밝은 이들은 말쑥하고 세련되게 차려입은 그들의 옷에서, 그들의 지위와 교양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핏자욱을 봅니다.

* 가던 길 멈추고

문제는 하나님이 위임해주신 권위를 가지고 그 백성을 잘 보살펴야 하는 이들에게 자기 시대를 통찰할 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도자들은 제 잇속 차리기에 바쁘고, 예언자와 제사장들도 백성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눈 앞에 위기가 닥쳐왔는데도 눈을 게슴츠레 뜬 채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별 일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영적 나태가 나라 전체에 편만합니다. 지도자들은 백성들보다 한 걸음 앞서 역사를 살펴야 합니다. 그럴 역량이 없다면 눈 밝은 이들의 조언이라도 구하면 좋으련만, 망자존대한 그들은 도무지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습니다. 유다의 왕들은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앗시리아나 이집트 등 강대국들의 보호를 구하느라 바빴습니다. 예언자는 그런 현실을 통탄합니다. "그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기를 좋아하고, 어디 한 곳에 가만히 서 있지를 못한다"(렘14:10). 원칙이 한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찾아들게 마련입니다.

성리학에서는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음을 오로지 하여 이리저리 옮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드거니', '지며리'라는 단어를 아십니까? '이드거니'는 '시간이 좀 걸리면서 분량이 좀 많게'라는 뜻이고, '지며리'는 '차분하고 꾸준히'라는 뜻의 부사입니다. 모든 게 분초 단위로 분절되는 시대이다 보니 이 두 단어는 점점 잊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 사람의 길을 걷는 이들은 시간의 독재에 저항할 수 있는 근기가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이드거니', '지며리'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이 제아무리 답답해도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기다리며 꾸준히 한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앞서 걸으신 그 길 말입니다.

지도층의 비리와 부패가 일상이 될 때 사람들은 큰 죄책감없이 죄를 짓게 됩니다. 공직에 나서는 이들에 대한 인사 청문회 광경을 떠올려 보십시오. 무흠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도덕적인 흠결을 말하는 게 아니라, 법이 금지한 것을 모두가 위반했다는 말입니다.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관대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법은 무용한 것이 되고 맙니다. 위반해도 괜찮은 법이 무슨 구속력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유다 사회에 만연한 도덕적, 신앙적 해이를 보며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아,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둘러보고 찾아보아라.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을 샅샅이 뒤져 보아라. 너희가 그곳에서,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는다면, 내가 이 도성을 용서하겠다."(렘5:1)

하나님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예레미야는 동시대인들이 악한 일을 하는 데에는 슬기로우면서도, 좋은 일을 할 줄 모른다(렘4:22c)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삶을 조율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폭행과 파괴의 소리가 가득한 세상이었습니다. 어긋난 길로 질주하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은 "가던 길을 멈추어서 살펴보고, 옛길이 어딘지, 가장 좋은 길이 어딘지 물어 보고, 그 길로 가라"(렘6:16)고 하시지만, 사람들은 멈추어 설 생각이 없습니다. 멈춤은 곧 퇴보로 느껴지기 때문일까요? 가장 좋은 길보다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것은 남보다 앞서는 길입니다. 어쩌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성전 혹은 종교가 제 구실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 헛된 성전 신학

예언자들은 거짓된 환상과 허황된 점괘와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말(렘14:14)로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환심을 샀고 그로 인해 이득을 얻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 와서 제물을 바침으로 불의하게 살왔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이들과 한 패였습니다. 제사를 바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제사장들의 배는 더욱 불룩해졌습니다. 존재와 행실의 변화가 없는 종교 행위는 기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대접의 겉만 닦아서는 안 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타락하니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만 저지르고도, 성전에 들어와서는 '우리는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성전이 문제의 뿌리였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미혹하는 영에 사로잡힌 목사들이 사람들의 영혼을 옥죄고 있습니다. 그들은 은혜 혹은 영적 권위를 빙자해 자기들의 파렴치한 욕망을 충족시키려 합니다. 먹잇감에 독을 주입해서 옴쭉달싹 못하게 만든 후 잡아먹는 거미와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이라는 말의 함정에 일쑤 빠지곤 합니다. 물론 신앙에는 상식을 뛰어넘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은 역설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신앙이 몰상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일상적 관계나 삶을 파괴하는 가르침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 영성에 가깝습니다. 신앙은 사람들이 서로를 귀히 여기고, 정성스럽게 사랑하도록 만듭니다. 특정한 사람들을 혐오하고 배제하도록 선동하는 이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신앙을 배신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오도하는 성전을 바라보다가 '이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성전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존재의 변화, 그리고 믿음의 벗들이 '함께 함'을 통해 누리는 기쁨이 없다면 성전 혹은 교회는 이미 그 존재 의미를 잃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신학교 출신의 소설가 이승우는 '연금술사의 춤'이라는 작품에서 공본영이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형해만 남은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교회 앞에서 노점상을 열어놓고 액세서리를 파는 공본영은 가끔 술에 취하면 예언자처럼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향해 외칩니다.

"너희들, 십자가를 끌어내려 목에다 걺으로써 탐욕스런 육체를 장식하듯 음란하고 부패한 영혼에다 종교를 장식하는 너희들. 예배 행위를 무슨 친교 모임이나 고상한 취미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는 너희들. 신(神)이, 너희의 썩어문드러진 영혼의 무덤을 은폐하기 위한 회(灰) 외엔 아무것도 아닌, 너희들의 타락을 더 어떻게 참으랴. 그래,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부담스럽더냐. 너무 큰 십자가가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죄의 무게와 그 고통이 도저히 못 참을 정도더냐. 그래서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만들었느냐. 그래서 호색적인 너희 정부들의 모가지에다 걸어서 달랑달랑 흔들고 다니게 하였느냐. 오호! 그렇게 해서 고통이 사라지더냐. '있는' 죄가 그런다고 없어지더냐. '살아 있는' 신이 그렇게 해서 죽어주더냐...."(이승우 소설집, <日蝕에 대하여> 중에서 '연금술사의 춤', 문학과지성사, 1989년 12월 15일, p.236)

공본영은 종교가 부패한 영혼을 장식하는 장신구가 된 시대, 예배가 무슨 친교 모임처럼 변해버린 세태, 십자가가 부담스러워 외면하는 현실을 신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술주정뱅이의 독설로 치부해 버려도 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이제 잠시 멈춰 서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고 부끄러워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부끄러움이 있습니까?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을 지향하던 예언자들의 꿈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권세를 부리려는 생각을 버리고 가장 연약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눅22:26)을 꼭 붙들고 삽니까?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세워놓은 장벽들을 사랑으로 허무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제사나 번다한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찬양은 없어도 괜찮습니다. 목사의 사자후도 없어도 됩니다. 예레미야의 선배 예언자인 미가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공의를 실천하는 것, 인자를 사랑하는 것,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진정한 예배의 마음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인 나그네, 고아, 과부를 억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주눅들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이야말로 공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요? 인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어질 仁' 자의 유래가 참 재미있습니다. 1993년에 발굴된 관점 죽간에서 '어질 仁' 자는 '몸 身' 자와 '마음 心' 자가 위 아래로 결합한 형태로 표상됩니다. 그런데 갑골문에서 '身' 자는 '사람 人' 자가 배가 불룩 나온 모양으로 그려져 있어서 임신한 여성의 몸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仁이라는 글자는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몸에 깃들어 있는 또 다른 생명, 태아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뜻"이 됩니다(김상환, <공자의 생활난>, 북코리아, 2016년 6월 20일, p.354). 누구를 대하든 이런 마음으로 대한다면 세상이 조금은 살 만한 곳으로 변할 겁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앞지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새기면 됩니다.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 바로 그것이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더디더라도 이런 삶을 지며리, 이드거니 살아낼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걷는 기쁨을 날마다 누리며 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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