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고향 무정

2019년 2월 4일 주일예배 설교자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성경본문

눅4:21-30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 하고 말하려고 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 고향상실의 시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설날을 앞두고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아갑니다. 세상에서 경쟁하며 사느라 예민해진 마음이 고향에서 느긋하고 부드럽게 바뀔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해묵은 상처를 건드려 명절이 더 큰 아픔의 시간이 될 수도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우리 시대를 가리켜 '고향 상실의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기술 문명이 발달해서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땅과 자연과의 접속은 줄어들었습니다. 경쟁이 내면화되면서 불안, 공허, 권태가 우리 삶 곁을 어슬렁거립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1966년에 나온 오기택의 노래 '고향무정'을 기억하실 겁니다. 매력적인 저음으로 그는 고향을 잃은 자의 쓸쓸함을 노래했습니다.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산골짝엔 물이 마르고/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 있네."

시인 백석의 대표시라 할 수 있는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도 고향을 떠나 살 수 밖에 없는 이의 곤고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돌고 있는 사람들, 노숙자로 내몰린 사람들의 심정이 이럴 겁니다. 어디에서도 환대받지 못한다는 사실처럼 쓸쓸한 게 또 있을까요?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이들은 뿌리 뽑힌 나무와 유사합니다. 위태로운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언제라도 찾아가 지친 어깨를 잠시 기댄 채 쉴 수 있는 장소 혹은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여전히 살만 할 겁니다.

지역으로서의 고향은 저기 어딘가에 있지만, 정말 지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은 점점 멀어져 가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고향 이야기를 하다보니 주님의 쓸쓸한 음성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9:58). 주님의 고향은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넘어지고 자빠져도 풀과 흙이 안아주는 따뜻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 나사렛 회당

공생애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주님은 고향을 방문했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들어가셔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통상적으로 회당 예배는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기도와 신앙고백문을 암송한 후에 율법이나 예언서 가운데 한 구절을 낭독하고 짧은 설교가 이어집니다. 그날 예수님은 성경말씀 낭독을 부탁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사야서 두루마리에서 다음 구절을 찾아 낭독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4:18-19)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예수의 나사렛 선언 혹은 사명 선언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나사렛 사람들은 골고루 가난했습니다. 변변찮은 농사를 지어도 성전세, 십일조, 첫 열매 제물 등의 '종교세'를 내고, 소금세, 판매세 등의 '간접세'를 내고, 통행세를 포함한 '관세'를 내고, 각종 수수료를 내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뼈 빠지게 일해 보아도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부스러기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예수님이 읽으신 이사야의 말씀은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에 한 줄기 시원한 샘물처럼 흘러갔을 겁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가·포·눈·눌'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명은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은혜의 해는 희년입니다. 희년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후에 맞이하는 대속죄일부터 시작되는 '거룩한 해'입니다. 일곱째 달 열흘날 뿔나팔소리가 길게 울려퍼지면서 시작되는 희년에는 빚으로 인해 남에게 넘어갔던 땅이 원주민에게 돌아가고, 종으로 팔렸던 사람들의 신분이 회복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빚은 탕감되었습니다. 땅도, 종도, 짐승도 다 쉬는 해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희년의 도래가 곧 복음이었습니다.

나사렛 회당의 사람들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눅4:21)고 선언하셨습니다. 희년은 먼 미래의 어느 날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사람들은 감탄했고,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습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여기까지는 모든 게 호의적이었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 그리고 덧붙여진 예수의 말씀이 그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야말로 희년의 구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주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고, 죄와 가난과 공포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풀어주셨고,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같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삶의 아름다움에 눈 뜨게 하셨고,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수탈로 인해 피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셨고, 굶주린 이들을 먹이셨습니다. 주님이 머무는 곳마다 사람들의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병자들은 나았고, 귀신은 쫓겨났고, 낙심했던 영혼에 화색이 돌아왔습니다. 바로 그게 희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익숙함이라는 함정

나사렛 사람들은 아직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나사렛 사람들의 호의적 반응을 즐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반응 이면에 있는 숨은 욕망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이 길게 소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예수님의 가버나움 활동 이야기가 갈릴리 전역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 나타나는 이적 이야기는 모두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을 겁니다. 고향 사람들은 가까운 이웃인 예수를 통해 그런 이적을 체험할지도 모른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쌀쌀하다 싶을 정도로 냉랭합니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 하고 말하려고 한다."(눅4:23)

이게 그들의 속마음이었을 겁니다. 주님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기를 바랐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삶의 변혁 혹은 지향의 변혁보다는 당장의 곤고한 일상에서 벗어날 기적을 바랐습니다.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았고, 혜택은 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고 손님들을 청하였지만, 처음에는 초대에 응하였다가 막상 잔칫날이 되자 갖은 핑계를 대면서 잔치에 오지 않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마다 핑계가 있었습니다. 밭을 샀기 때문에 나가봐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겨릿소 다섯 쌍을 샀기 때문에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장가를 들어 아내를 맞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자기들의 루틴(routine, 틀에 박힌 일상)을 깨뜨리는 일을 허용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는 것입니다. 익숙한 세계에 머물 뿐,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갈 생각이 없는 이들을 주님은 꾸짖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나른한 삶의 태도를 질타하기 위해 예언자들이 겪었던 일들을 예시합니다. 삼년 반이나 지속된 가뭄으로 기근이 심했을 때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시돈의 사렙다 과부(*열왕기서에서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가난했던 그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았고 결국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는 이적을 경험했습니다(왕상17:16). 엘리사 때에는 이스라엘 가운데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오직 시리아 장군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낯선 이를 환대했고, 나아만은 절박했기에 자기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람이 지시한 대로 했습니다.

* 쫓겨나심

새로운 삶은 이런 안간힘과 절박함 없이는 열리지 않는 법입니다. 믿음은 결단인 동시에 모험입니다. 자기를 걸어야 합니다. 꿩도 먹고 알도 먹을 수는 없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화가 났습니다. 잘 아는 사람, 자기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자기들을 꾸짖는 것을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익숙함의 함정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말은 그들의 알량한 선민의식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방인을 믿음의 본보기처럼 내세웠으니 말입니다. 앞서 예수의 말씀에 감탄했던 이들이 이제는 예수의 말에 분노합니다. 자기들의 이해나 자존감을 해치지 않고 자기들의 입장을 지지해줄 때 사람들은 진리를 기뻐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자기들을 고발하고 안일한 일상을 뒤흔들 때는 진리를 미워하는 게 사람의 버릇입니다. 분기탱천한 나사렛 사람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들의 믿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요? 종교적 확신, 혹은 신념으로 가장한 알량한 자존심이 때로는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비화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주님은 쫓겨나셨습니다.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죽임을 당할 뻔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운명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1:11) 하지만 주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떠나가셨다'는 말은 단순한 어떤 동작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그의 길을 가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 속에는 메시아적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폭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주님께 와서 헤롯이 그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주님은 담담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눅13:32). 보내신 분의 일을 마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강한 확신입니다.

주님은 외로우십니다. 고향에서도 배척받으셨으니 말입니다. 가장 친밀해야 할 사람들이 냉랭하게 등을 돌릴 때 어찌 외롭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주님을 외롭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동행이 되기를 바라시는 데, 우리는 아쉬울 때만 주님을 찾고, 평안하면 주님의 부름을 못 들은 체 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세상을 치유하고 새롭게 만들기 위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셔도 저마다의 일에 바쁜 우리는 그 부름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고향에서 쫓겨나신 주님의 고향이 되어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씀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안겨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처럼 외롭다고 투정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앗아갈 수 없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언제라도 혼자가 아닙니다.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8:29)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이들은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와 평화와 기쁨을 선물로 받게 마련입니다. 그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주님의 고향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마음 시린 이웃들의 따뜻한 고향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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