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탈기독교 사회를 향한 복음

채영삼 백석대 교수

ivp
(Photo : ⓒIVP)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오래 전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읽으며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은혜에 관한 한, 이 책보다 더 고전이 있을까 싶을 만큼, 수많은 예화들로 채워진 은혜에 관한 명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꽉 잡히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다.

그것은 미국의 복음주의에 대한 어떤 인상과도 결부되어 있다. '용서와 치유'에 집중하는 '오직 은혜'의 복음의 응용 정도가 그 복음의 핵심이다. 전통적으로, 크리스텐덤 안에서 즉, 기독교적 가르침과 거룩과 의의 기준이 교회와 사회 속에서 문화적으로 강조되는 사회 아래서, '은혜'는 빛을 발한다. 얀시 자신도 미국 남부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교회에서 받은 율법주의적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확실히, 바울서신 역시 당시 '유대교'라는 이를테면, 당시의 '크리스텐덤' 안에 살던 옛 언약 백성,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설명한 책들이다. 역설이지만, 바울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에, 그가 하고자 했던 이방인을 향한 사역을 훼방하고, 이방인 교회를 다시 율법 아래로 끌고 가려했던 유대교를 상대하고 싸워 복음 변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서구 교회는 빠른 속도로 '재(再)이교도화'되고 있다. 거기다 대고, 지금의 미국 복음주의처럼 '은혜' 중심의 복음으로 다가가는 것이 적절한 전략일까. 내리막이 아닐까. 우연인지, '은혜' 중심의 복음주의와 '관용' 중심의 다원주의는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어쩌면 트럼프는 쇠락하는 미국 복음주의의 해법이 아니라 증상이라는 판단이 맞을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이 '은혜의 복음'을 설득력 있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율법'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폐단이 역력한 정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탈기독교 시대에 있어서, 복음을 지속적으로 '이신칭의'와 같은 크리스텐덤을 전제로 한 '은혜의 복음'으로 접근하는 것은, 옳기는 하지만, 성경이 전략으로 내세우는 방식은 아니다. 물론, 이방인들도 양심의 율법 아래, 죄 아래 갇혀 있다. 은혜는 언제나 복음이다. 하지만, 뼈가 부러졌는데, 내과의사에게 간다면 어떻겠는가?

한 번도, 율법이나 할례나 하나님의 거룩이나 심판이나 십계명에 대해, 듣지도 알지도 고민도 갈등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 세상에서 돈과 탐욕과 세속적 가치에 매몰 되어 허무하게 살던 사람에게, 너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노력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소식은 얼마만큼 복음이 될까.

그래서 로마(Rome)를 상대로, 세상을 상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한 공동서신에는, 구원을 '칭의' 즉, 율법 아래서 어떤 행위로도 얻을 수 없었던 '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저 얻었다는 '칭의'의 복음보다는, '생명'의 복음, '소망'의 복음, '사랑'의 복음을 제시한다. 이미 1세기 당시, '탈기독교' 사회 이전의 '비(非)기독교' 사회, 다원주의의 고전적 변형인 '다신교적'(多神敎的) 사회를 향한 복음의 해석이었던 것이다.

요한이 해석한 복음을 들어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거저 의롭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포한다(요 3:16). 의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배경이 율법이 아니라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 생명, 소망, 사랑이야말로 세상에 정말 없는 것,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도 얻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바울서신에도 생명, 소망, 사랑 다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다시, 뼈가 부러지면 외과의사에게 가지, 내과의사에게 가지 않는다. 그것이 상식이고, 그것이 내과의사 말고 외과 의사가 따로 있는 이유이다. 공동서신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바울서신이라는 운동장에 갇혀 있는 서구 개신교 신약 학계나 그런 신학에 기반한 서구 교회가 쉽게 해법을 찾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쩌면, 한 번도 크리스텐덤이 되어 본 적이 없는 한국 사회 속에서, 어느 정도의 '유사크리스텐덤' 안에 갇혀 있는 교회가, 이미 다원주의적 사회였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찬가지로 '은혜-정죄'의 구도 속에서만 접근하는 것도 같은 현상이 아닐까. '생명'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소망'이란 무엇인가? 과연, 무엇이 생명을 주고, 무엇이 사랑을 알게 하고, 무엇이 소망을 주는지를 설득하는 것이 복음이 아닐까? 성경 해석은 신학을, 신학은 신앙을, 신앙은 시야를 결정한다.

※ 이 글은 채영삼 백석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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