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종교개혁주일설교] 나는 불을 지르러 왔다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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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욥기 24장 13-17절, 시편 101편 1-8절, 누가복음서 12장 49-56절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매년 10월 마지막 주는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1517년 10월 31일 무명의 수도사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학교의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당 정문에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논제'를 게시하는데, 이 95개조 논제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면서 유럽은 대개혁(The Reformation)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종교개혁은 종교에만 머물지 않고, 당시의 정치와 법, 학문과 예술, 교육과 사회복지 등 전 분야에 영향을 주었고, 중세와는 다른 근대 세계를 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결과 개신교가 탄생하였기에 오늘은 개신교의 뿌리를 생각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개신교를 영어로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라고 부르고, 종교개혁가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릅니다. 프로테스탄트는 '항의한다, 저항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부패한 가톨릭 교회의 교황 레오 10세는 1521년 1월 21일, 루터를 이단으로 지목하여 파문하는 칙령을 내렸으나, 루터는 교황의 파문 칙령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후 루터를 따르는 무리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고,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도 루터에게 손을 들어주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19살의 나이에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국제정세의 흐름에 따라 처음에는 루터파들에게 제한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허락합니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후, 가톨릭을 옹호하면서 제국 내 루터파 제후들에게 가톨릭으로 복귀할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루터파는 이에 맞서 1529년 4월 19일 제3차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지난 1926년에 허락했던 종교적 자유에 대한 약속을 지키라는 공식적인 항의(protestation von Speyer)를 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루터파들은 '저항하는 자' 즉 프로테스탄트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 개신교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 쓰이게 됩니다.

한편 루터의 종교개혁은 스위스의 깔뱅과 쯔빙글리에게로 이어지는데, 이들 세 사람의 신학과 신앙에 기초하여 세워진 교회들을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를 정착하고 제도화하여 종교개혁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제네바의 칼뱅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the church reformed, always reforming)고 말했습니다. 즉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늘 개혁하는 교회(Reforming Church)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우리는 개신교가 늘 개혁하는 정신으로 세상의 온갖 불의와 부패에 맞서 저항하는 신앙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항과 개혁은 세상을 향해서도, 그리고 우리 자신을 향해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머물러 안주하는 순간,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만족하는 그 순간부터 언제나 부패와 타락이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변혁의 역사]

그런데 가만 보면 성서의 신앙 전통과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언제나 변혁을 주도해 왔습니다. 고대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힘과 권력에 의지하여 부와 명예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오로지 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 믿고 안정되고 풍요로운 자기 조상의 땅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오므리 왕조 시절, 아합왕은 국제질서에 편승하여 이스라엘의 풍요와 번영을 도모합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번영에 축하를 해주기는커녕 우상 숭배와 불평등에 대하여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이 뿌리로부터 흔들리고, 민족주의적 감정이 고조될 때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갱신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에 눈뜨게 하셨고, 첫 교회가 가부장적 질서를 옹호하는 유대교로 회귀하려고 할 때, 바울 사도는 서유럽 전체로 선교여행에 나서면서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만들어냅니다. 높은 도덕성으로 존경받고 세계로 뻗어나가던 기독교가 제국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지배종교, 힘의 종교로 변질됩니다. 그러자 참된 신앙인들은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원 운동을 일으키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마저도 국가 종교에 물들고, 교황은 제국의 힘을 탐내고, 성직자들과 교회가 돈벌이에 혈안이 되자 종교 개혁가들이 변혁의 깃발을 든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한말 형식주의와 관료주의, 전근대적 계급질서에 머물러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읽지 못하고 쇠락하던 이 땅에 개신교가 들어옵니다. 개신교는 조선 민중에게 인권의 존중과 평등, 자주적 의식을 심어 주었습니다. 삼일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근대식 교육과 의료제도를 확립하는데도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개신교가 이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유교적 권위주의나 무교의 기복주의에 물들고, 내세 지향적이며 타계적이며, 현실도피적인 모습도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서슬 퍼런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과 한국의 근원적 죄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분단체제의 극복을 위해 애쓰고 노력한 것도 사실입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해체되어가는 마을 공동체의 대안으로 서로 힘이 되고 위로를 주었던 곳도 한국 개신교회였습니다. 코로나 19 상황에서 친교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얼마나 소중했는가를 여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190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교회가 급격히 성장하자 점차 자본주의의 곰팡이가 교회에 피어나고, 권력과 야합하는 등 더 이상 새로운 개혁의 동력이 상실되자, 사회적 신뢰도는 추락하고 세상의 조롱거리와 걱정거리가 되는 현상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빛을 밝히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도 바로 그런 신앙공동체 중 하나가 되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습니다.

[세상의 현실과 어둠의 세력]

세상은 교회가 타락하였다고 손가락질 하고, 그러한 비난에는 이유가 있고 일리도 있지만, 교회를 향한 비판에는 여전히 교회만큼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주길 기대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또한 비슷한 정도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고, 경쟁이 당연한 것이며, 승자는 모든 것을 거머쥐지만 패자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 몰려야 하는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함께 사는 좋은 사회를 만들자는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닥치는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각자도생의 길을 가고 있고, 거기에서 자신만의 방법을 찾지 못하면 도태되고야 마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최근 계속되고 있는 택배기사들의 죽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해고, 산업 현장에서 일어나는 각종 재해들을 보면 하청에 하청을 주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고혈을 빨아서 소수의 사람들이 배를 채우는 일들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처럼 벌어집니다. 코로나 19 상황에서도 중국의 마윈과 같은 갑부들(super riches)은 웬만한 나라들의 국내총생산을 뛰어넘는 돈을 법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유와 평등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자유는 독재 권력에 맞서게 합니다. 그러나 한편 개인의 사적재산을 인정하고 능력에 따라 돈을 벌 수 있는 경제적 자유의 보장은 시장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불평등을 양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만 그 노동의 결과가 고스란히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냥 시장에 내맡기면 불평등이 고착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이고, 그래서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한 사람이 되며 중산층은 날이 갈수로 더 살기 어렵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 세계에 몰아닥친 코로나 19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올 해 노벨 평화상은 유엔 세계식량계획이 받았습니다. 유엔 세계 식량 계획(World Food Programme, WFP)은 매년 전 세계 83개국 1억 명을 지원하는 기구입니다. 전 세계의 기아 인구를 0명으로 만들기 위한 제로 헝거(Zero Hunger)가 목표입니다. 이 기구의 발표에 의하면 코로나 19로 절대 기아 선상에 놓인 위기 기아 인구가 2019년과 비교하여 배로 늘었습니다. 작년에 다양한 기후 재앙과 전쟁으로 인해 이미 1억 3천 500만명이 굶주림으로 시달리고 있는데 이번에 코로나로 약 2억 7천명이 식량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전 세계 사람들이 음식물을 남기지 않고 버리지만 않아도 세계의 20억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지만, 아직도 인류는 자기 문제에 매몰되어서 함께 사는 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의 말씀을 봅시다.

"빛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빛이 밝혀 주는 것을 알지 못하며, 빛이 밝혀 주는 길로 가지 않는다. 살인하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을 죽이고, 밤에는 도둑질을 한다. 간음하는 자는 저물기를 바라며,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가린다. 도둑들은 대낮에 털 집을 보아 두었다가, 어두워지면 벽을 뚫고 들어간다. 이런 자들은 하나같이 밝은 한낮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그들은 한낮을 무서워하고, 오히려 어둠 속에서 평안을 누린다."(욥 24장 13-17절)

욥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의 한 자락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환한 대낮보다 악을 행하기 좋은 밤을 더 편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빛이 밝혀 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빛이 밝혀주는 길로 가지도 않습니다. 이들의 악행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과 궁핍한 사람들이 더 곤혹을 겪으며, 시민들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이 망가집니다.

그러나 이런 범죄자들의 삶을 잘 살펴보면 그 한 사람을 사탄이나 마귀, 악마로 규정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악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곤경에서 오는 숱한 상처가 그의 내면에 쌓이고, 그것이 분노와 잘못된 행동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그런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모두가 안전하고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모두가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을 지닌 한 사람의 중요성]

우리는 너무 쉽게 국가와 정부의 탓을 하지만, 결국 이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태도와 능력, 삶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은 다윗 왕의 약속이 담긴 노래로 전해지지만, 우리 모두가 이 사회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겠다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우리 모두의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시편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구절구절 하나가 전부 아름답고 보석 같습니다.

"주님, 주님의 사랑과 정의를 노래하렵니다. 주님께 노래로 찬양드리렵니다. 흠 없는 길을 배워 깨달으렵니다. 언제 나에게도 오시렵니까? 나는 내 집에서 흠이 없는 마음으로 살렵니다. 불의한 일은 눈 앞에 얼씬도 못하게 하렵니다. 거스르는 행위를 미워하고, 그런 일에는 집착하지 않겠습니다. 구부러진 생각을 멀리하고, 악한 일에는 함께 하지 않겠습니다. 숨어서 이웃을 헐뜯는 자는, 침묵하게 만들고, 눈이 높고 마음이 오만한 자는, 그대로 두지 않으렵니다. 나는 이 땅에서 믿음직한 사람을 눈여겨보았다가, 내 곁에 있게 하고, 흠이 없이 사는 사람을 찾아서 나를 받들게 하렵니다. 속이는 자는 나의 집에서 살지 못하게 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앞에 서지 못하게 하렵니다. 이 땅의 모든 악인들에게 아침마다 입을 다물게 하고, 사악한 자들을 모두 주님의 성에서 끊어버리겠습니다."

첫 마디의 각오부터가 아주 정확하고 옳은 방향을 택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사랑과 정의를 노래해야 합니다. 사랑을 담은 정의를 실천하고, 정의를 포함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정의 없는 사랑은 편향되고, 사랑 없는 정의는 가혹한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과 정의는 함께 가야 합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는 자신의 집에 있을 때부터 스스로 흠이 없이 살며, 구부러진 생각이나 불의한 일, 악한 일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주변을 좋은 사람들도 가득하게 하고, 불의한 자들은 물리칩니다. 선한 영향력은 좋은 사람들이 모일 때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작은 촛불들이 모일 때마다 어둠이 더 물러가듯이, 우리 생명사랑 신앙공동체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참된 신앙인들이 몰려오는 곳이어야지, 왜곡된 신앙, 독선적이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으며, 기득권을 쥐고 지배하려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몸이 따르지 않고 말만 무성하며, 그리스도교 진리를 탐구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참된 신앙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저는 강요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강요로는 참된 신앙교육과 양육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전적으로 각 개인이 주님 앞에서 스스로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목회자와 각종 위원회 및 모임을 두고 목회활동을 통해서 양육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결국 그것을 감당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나라 선교를 위해 정말 필요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신앙의 뿌리를 깊게 내린 사람입니다. 코로나 19의 상황은 교인들 무리에 묻혀 적당히 신앙 생활하던 우리의 게으름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홀로 스스로 서도록 하나님께서 채찍을 드신 것입니다. "신앙의 식구들이 함께 모이지 못할 때에도, 너는 홀로 언제나 내 앞에 서 있느냐?" 하나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그동안 한국 개신교는 양적 성장을 자랑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질을 묻고 계십니다. 성숙한 신앙인지 아닌지를 점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올 해 안에 예배 처소를 옮기게 됩니다. 새로 마련하는 공간은 지금의 공간보다 좁습니다. 전체가 함께 모이기엔 작은 공간입니다. 기존의 관점에서 보면 작은 공간은 목회활동에 제약이 됩니다. 그러나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공간의 협소하다고, 신앙마저 작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잘 분배하면 작은 공간이 오히려 좋은 교육을 하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 11시에만 얽매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주중에도 언제든지 새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새롭게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 예배는 정말 소중하지만, 그 예배가 실제로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하고 성숙시키는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진지하게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모이는 예배가 흩어지는 선교로 이어지고 있는지, 교회당의 예배가 생활신앙으로 거듭나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모이는 예배이든지 온라인 예배이든지 여러분 각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배우려는 의지, 더 성숙한 신앙을 가지려는 의지가 없다면 예배는 일종의 퍼포먼스, 쇼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은 구경꾼이나 시청자가 될 뿐입니다. 그저 보고 즐기고, 만족감만을 누리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종교 시장의 소비자로 사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목회와 신앙 훈련이 지향하는 바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 종교적 욕망을 채우려는 소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변화가 없다면 "예배를 통해 은혜 받았다", "설교가 감동적이다" 하는 모든 말들은 자기 위안에 머무를 뿐, 하나님 나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정적 만족을 신앙으로 착각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고 말씀하시게 될 것입니다.

[나는 불을 지르러 왔다]

오늘 예수님은 불을 지르러 세상에 왔다고 하십니다. 물이 화해와 포용, 살림과 생명의 이미지라면 불은 파괴와 심판, 죽음의 이미지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물이시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불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없앨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에 이어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분열의 양상을 보면 부모세대와 자녀세대 사이의 갈등을 다룹니다. 여기 부모와 아들과 그의 아내, 딸이 함께 사는 가정이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싸운다든지, 시누이와 올케가 싸운다든지 남매가 불화를 일으키는 것은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직 부모 세대와 그 자녀 세대만의 갈등을 부각시킵니다. 왜일까요? 이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매일 것인가, 아니면 다가올 미래를 선취할 것인가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미 변했고, 앞으로도 더욱 변해갈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과거의 영광과 습관, 지금의 기득권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불평등은 심해지고 부패한 세력들이 여전히 기세 등등 합니다. 그러나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세상은 전혀 새롭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 맞서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잘못된 관행을 붙들고 그것에 집착하면서 자신만을 위해 몰입하는 인간이 되지 말고, 새롭게 열리는 세계에 자신을 개방하면서 모두가 함께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라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 타협은 없으며, 이 둘 사이에 평화는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단도직입적인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교황은 자신을 하나님처럼 여겼습니다. 교회는 큰 성당을 지으며 돈을 벌기 위해 면죄부를 남발했고, 페스트로 인해 많은 성직자들이 죽자 성직 매매가 성행하며 아무나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조차 읽을 줄 모르는 성직자들이 교황청에서 내려주는 설교문을 외워 그저 낭송할 뿐이었습니다. 교회는 지옥에 대한 백성들의 공포심을 자극하면서 장사를 했습니다. 이 모든 행위는 성서의 정신을 위반할 뿐만 아니라 황금 송아지의 유혹에 넘어가 세상 보다 더 추하게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교회에서 성서는 올바르게 읽히지 않고, 기독교 윤리는 땅에 떨어졌으며, 교회의 조직과 체제는 힘과 권력, 돈에 의해 운영됩니다. 이러다 보니 세상 사람들을 향한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탄탄한 신학에 기반한 실력 있는 목회자들은 줄어들고, 세상의 비난과 비판 속에 교회는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다시 교회개혁이 필요한 때입니다. 종교 개혁가들은 다시 성서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들의 외침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성경말씀을 읽고 그대로 이 세상에서 살려고 철저하게 노력할 때만이 교회는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이것을 해 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저와 여러분의 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하나의 악세사리나 취미처럼 될 때, 교회는 맛 잃은 소금이 됩니다. 루터가 쓴 95개조 논제 중 50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교황이 면죄부를 퍼뜨리는 자들의 강제 징수를 알고 있다면 그는 성 베드로 성당을 양 떼들의 가죽과 뼈로 건축하느니, 차라리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 더 낫다고 그리스도인은 배워야 한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자신을 보존하고 건축물을 유지하기 위해 교인들의 피땀 어린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거짓 뉴스나 왜곡된 복음으로, 자본주의의 물들어 오염된 말씀으로 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면 그런 교회는 망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고 그 곳으로 이사 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 선교의 진지를 구축하자는 것이지, 재테크를 한다거나 세상의 고통은 무시한 채 우리만의 안락한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돌로 떡을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기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라는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다면 저는 당신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을 맑게 깨치는 것이요, 진리를 사랑하고, 선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바르게 사는 것이요, 이웃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며 자신을 내어 주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적인 이익보다 공공의 감각을 키워 공존하고 상생하는 사회를 만드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위해 우리는 새 공간을 마련합니다.

우리들의 도전과 열정들이 진정으로 우리 신앙을 참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길 빕니다. 교회가 복음을 하찮게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우습게 여겨, 하나님의 명예에 손상을 입혀서는 안 됩니다.

21세기는 중세 시대가 아닙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본의 힘이나 국가의 공권력으로 신앙을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자유롭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가지겠다고 선택하셨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려는 유혹을 뿌리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불을 지르신 예수님의 그 거룩한 사랑의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하십시오. 여러분 마음에 이미 불이 붙었다면 제가 바랄 것이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아 버림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한 하나님! 생명사랑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이 거룩한 변혁의 주체가 되게 하여 주소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첫 사랑을 회복하게 하여 주소서. 적당히 교회 다니면서 세상도 즐기려는 유혹을 뿌리치게 하여 주소서. 오히려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일구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게 하여 주소서.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데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소서. 그 옛날 요엘 선지자를 통해 영을 부어주신 하나님! 우리에게도 거룩한 영을 주셔서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노인들이 꿈을 꾸게 하여 주소서.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시대에 더 멋지고 당찬 선교를 해 나가게 하여 주소서. 온 성도가 한 마음이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자유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송축하고, 우리의 입술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10월 마지막 주를 보내며 올 한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한없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겪는 어려움들을 이겨내게 하시고, 우리가 때로 주님께 소홀할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새 시대에 적응하며 또 다른 내일을 다시 꿈꾸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배 공간을 이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새 공간을 허락해 주심에 감사하고, 그곳에도 하나님 나라 선교를 잘 감당하게 하여 주소서. 이 시간 주님께 예물과 함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받아 주소서. 오늘 예배를 통해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저 세상으로 나아가 주님께서 감당하라 명하신 소명을 이어나가겠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성령의 불을 지르십시오.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로 정진하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새 시대를 여는 변혁의 주체로 서려는 생명사랑 교우들과 지금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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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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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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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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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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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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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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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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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